날이 이른데 아이 몇이 어둠 속에서 팔찌를 팔고 있었다. 재촉하는 작은 손들을 피해 아직 여명이 떠오르기 전의 사원으로 들어갔다. 사람들 뒤를 따라 걸으며 사원에 대한 설명을 들었지만 기억나는 건 말보다 손에 닿은 눅눅한 돌의 감촉이다. 밤새 습기를 머금은 까슬까슬한 잿빛 돌 곳곳마다 무늬와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정교했을 것들은 세월의 흔적으로 각진 곳 없이 무뎠다. 지어졌을 당시 선택받은 이들만 오갔을 회랑은 당시 이곳을 짓고 사용했을 이들이라면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이방인들만 잔뜩이다.
도시 속 사원이란 뜻으로 이름 지어진 앙코르와트는 울창한 밀림에 가려져 세간에 잊혔다 19세기 들어 세상에 알려졌다. 오랜 세월이 흘러 다시금 가치를 알아준 이들에게 사원은 망설임 없이 자신을 내어주었다. 사원이 다시 열린 후 보존이란 미명으로 도둑맞은 것은 그저 돌덩이나 나무 짝에 불과하단 듯이 제게 온 객을 무심히 맞이하며 허름한 살림살이를 내보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이동하는 이들 뒤를 따르면서도 고개는 사방을 살핀다. 뜻 모를 무늬와 조각은 오랜 그날 망치와 정으로 돌벽을 다듬었을 손들을 상상 해보게 한다. 지문이 닳고 마디가 굵고 옹이 같은 굳은살이 노랗게 박힌 손들. 땅땅땅, 극극극. 때리고 갉작이며 내는 소리가 돌벽에 그어진 무늬와 조각마다 부산스럽다. 이 거대한 돌들을 가져오고 쌓고 파고 깎아내면서 그들은 무슨 말을 주고받았을까. 일이 끝난 뒤 온몸에 묻은 돌가루를 근처 물가에서 씻고 집으로 돌아갔을까. 캄캄한 밤 훌렁이는 모닥불길에 붉게 비친 얼굴 하나가 씩 웃고 있다. 짙게 패인 볼우물의 앙상한 사내 허벅지에 붉은빛의 피부를 가진 아이가 흐물흐물 걸려있다. 노란 굳은살이 배긴 손이 아이의 배를 간질인다. 깔깔거리던 아이가 졸린 눈을 끔벅인다. 잦아드는 모닥불길 근처에서 사내는 하루 종일 돌벽을 상대하느라 경직된 손으로 아이를 끌어안는다. 머리칼을 넘겨주고 괜히 볼을 잡아 흔들다 이내 제 팔뚝을 아이에게 내어주곤 곤한 잠에 빠진다. 그러다 다시 날이 밝으면 여기로 돌아와 그로선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을 이 막연함을 정교하게 다듬어내는 것이다.
정말 존재했느냐 물어볼 길 없는 그 어느 날의 그들은 그들의 손으로 두드리고 깎아냈을 돌벽 곳곳마다 무딘 무늬와 조각으로 자신들을 증명하고 있었다.
앙코르와트에서 느낀 신비로움은 이어 찾은 타프롬 사원에서 배가 되었다. 쓰러지고 부서진 사원 위로 유백색의 거대한 열대 나무가 자라 있었다. 뿌리와 줄기가 사원 돌 틈마다 갈래갈래 뻗어 있었다. 소리로 표현하자면 쾅쾅 내리쳐지는 햇볕 아래 나무는 자신에게 압도된 이들에겐 관심 없단 듯 능청스럽게 서 있었다. 당장이라도 사원을 무너지게 만들 것 같은 나무들이 실은 골조 역할을 했다. 사람의 손으로 망가지고 잊힌 문명의 몰락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재건한 식물은 언제나 최후의 지배자다.
거기서 떨어져 나온 작은 나무 잎사귀 같은 아이들이 사원 입구를 배회하며 팔찌를 팔았다. 사주지 말란 말을 호통처럼 뱉은 가이드의 말에도 나는 몰래 팔찌 한 묶음을 사 주머니에 넣었다.
"하우 올드 아유?"
여행 중 배를 타는 날이었다. 콩알처럼 생긴 남자아이 둘이 배에 올라탔다. 소소한 간식거리를 내밀며 사달란 눈치를 보이던 아이들이 이내 가이드가 지른 호통 소리에 어깨를 웅크렸다. 배가 출발하려면 시간이 남아 있어 그 시간 내에 간식거리를 팔고 나갈 모양이었다. 어른의 호통이 익숙한 모습으로 우물쭈물하는 아이들에게 작게 말을 걸었다. 영어 질문엔 대답이 없던 아이들이 비행기에 오르기 전 급하게 배워간 캄보디아어 단어엔 눈썹을 들썩인다. 손가락 몇 개를 펼쳐 보인 아이들의 모습을 나는 즉석 사진기로 찍었다. 인화된 사진 한 장을 건네주자 사진 속 자신들의 얼굴을 보고 서로 키득거린다. 배가 출발하기 직전 배에서 달려 나간 아이들은 선착장 위에서도 사진 속 자신들 얼굴에 시선이 붙들려 있었다.
"당장은 도와줘서 좋겠죠. 하지만 그 후는요? 부모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계속 구걸을 할 거예요. 학교에 가서 공부를 시키는 것보다 돈 벌어 오라 시키는 게 더 편할 테니까. 그래선 상황은 나아지지 않아요."
유람을 끝낸 후 식사하던 도중 가이드는 자신이 호통 쳐서라도 아이들에게 무언갈 사거나 돈을 주지 말라했던 이유를 설명했다. 식당 앞에서 젊은 엄마와 아이가 사람들에게 구걸하고 있는 모습에 심란해 있던 사람들이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은 불쌍해 보여도 그 애들의 미래를 위해선 단호해야 해요."
그녀의 말은 여행 내내 그곳 아이들에게 갖게 되는 같잖은 나의 감성을 억제해주는 고삐가 되어주었다. 이후 관광지를 돌아다닐 때마다 내게 펼쳐지곤 하는 작은 손들을 태연히 외면할 줄 알게 되었다.
"1970년대에 농업 사회주의를 건설하려 한 독재자에 의해 많은 지식인들이 살해당했어요. 죽어도 좋을 사람을 구별하던 한 예로 도망치는 사람 중 아무나 붙잡아 손바닥을 펼쳐 보이게 했죠. 지문이 닳아 있으면 사는 것이고, 지문이 남은 고운 손이라면 망설이지 않고 죽였어요."
농기구와 펜을 쥔 손의 두 생김새는 너무도 다르다. 손마디가 불거지지도 않고 지문도 남아 있는 매끄러운 손이 발각된 많은 이들이 그 자리에서 즉결 처형당했다. 손이 고왔던 많은 이들이 사라진 땅에 남겨진 이들은 애써 앎을 회피해왔다. 그들에게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곧 자신들 세계에서의 낙오를 의미했을 것이다. 하여 살아남은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교육시키지 않았고 그 악습은 독재자가 사라진 오랫동안 무의식 중 남아 끈질기게 전승되었다. 끝나버린 킬링필드는 그러나 여전히 그들 마음속에서 낫과 칼을 휘둘러대고 있었다. 1975년에서 1979년. 4년간 이어진 학살 후 남은 폐허 위에 그들은 인골 사원을 세웠다.
해골이 전시된 왓트마이 사원에서 나는 내 멀쩡한 손목을 꽉꽉 주물러대고 있었다. 근처엔 버스를 타고 온 우리 밖에 없는 듯했다. 어느 사원에서든 흔하게 보였던 팔찌 파는 아이들도 무덤가에선 몸을 사렸다. 불벼락 같은 햇빛 아래서 학살의 증거를 관람하던 우리들은 가이드의 손짓을 따라 다시 버스에 올랐다. 젊다기엔 어린 축에 더 가까운 운전기사가 액셀을 밟았다.
비극이 탑이 되어 쌓인 곳을 벗어나 한참을 달리자 붉은 흙 위에 지어진 집들이 나타났다. 햇빛에 바짝 달궈진 흙 속에서 막 건져낸 것처럼 붉은 피부를 가진 아이들이 거기 있었다. 자신들 곁을 느리게 지나는 버스를 궁금한 눈으로 응시하거나 경주하듯 달린다. 팔찌를 팔거나 부모 대신 구걸하는 아이처럼 능청스럽거나 혹은 주눅 든 데 없이 말간 눈이었다. 버스를 이길 수 없던 아이들이 저만치 멀어지다 사라졌다.
인가 없는 도로를 맹렬히 달리는 버스 차창 너머로 어느 순간 연꽃 부지가 펼쳐졌다. 아무리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을 것처럼 거대한 호수에 연꽃이 촘촘히 피어있었다. 넓게 펼쳐진 초록 잎사귀와 수직으로 자란 연분홍 꽃이 백색 하늘과 대비되어 몽환적인 느낌을 주었다. 울타리도 없는 곳에 흔하게 널려선 쾅쾅 내리쬐는 햇볕을 태연히 감내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여행 중 내가 보았던 것들로부터 내게로 넘어왔던 이미지들이 하나의 암시란 생각이 들었다.
사원을 짓누르며 쭉쭉 뻗어 올랐던 유백색 열대 나무와, 이젠 모두의 기억에서 잊힌 어느 날 망치와 정으로 부지런히 돌벽을 두들겼을 손들, 선착장에 서서 자신들 얼굴이 찍힌 사진을 어루만지던 손가락들, 온몸을 팔랑거리며 이방인이 탄 버스 뒤를 힘껏 따라 달리던 아이들, 흙이 잔뜩 괸 물에서 잎사귀와 꽃을 틔운 수많은 연꽃들.
사라진 자리에 다시 자라나는 것이 삶이라면 여기 이들은 한 번도 몰락한 적이 없다. 끈질기게 살아낸 증거들로 가득한 땅 위를 달리며 나는 한결 낙관적인 마음이 되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오랜 후인 지금, 이따금 거기서 보았던 아이들의 현재가 궁금해지곤 한다. 사원의 돌벽 사이마다 뿌리와 줄기를 얽고 스스로 골조가 된 식물처럼 거기 마른땅 위 어디건 흔하고 질기게 자라났던 아이들. 훗날 다시 그곳을 찾는 날엔 이방인에게 팔찌를 내미는 아이보다 또래와 버스 뒤꽁무니를 쫓아 힘껏 달리기 하는 아이들이 더 많으리라 생각된다. 그 아이들도 언젠가 커다래진 손으로 지켜야 할 누군가를 꼭 끌어안고 있겠지. 거기 자라나는 모든 이의 손이 자신들의 도시를 재건하고 증명해 낼 것이다. 그저 무너지게 두지 않는 유백색 열대 나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