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봅니다
오늘처럼 무채색의 멜랑콜리한 날에는 반 고흐의 열정의 컬러가 그립습니다. 눈부신 황금빛 해바라기들과 아를의 붉은 포도색의 에너지가 절실해집니다. 고흐가 이토록 강렬한 열정으로 캠퍼스를 물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애착이론의 관점으로 보면 초기성장기에 불충분한 양육과 돌봄을 받은 사람은 신체적, 정서적으로 올바른 성장을 하지 못하고 정도가 심할 경우에는 정신 병리로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애착 결핍의 결과는 아동기와 청소년기에 드러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초기 청년기때 발병이 되지요.
반 고흐는 태어나기 1년 전 같은 날에 사산된 형의 이름으로 살았습니다. 자기의 생일날, 어머니는 집 근처에 있는 형의 무덤에서 형을 그리워하며 슬피 울곤 했었는데 이런 환경적 이유때문인지 가족력이 원인인지 고흐 역시 우울증으로 평생 고통을 겪었습니다. 온전히 나의 어머니를 경험하지 못하고, 만나지 못한 형에게 어머니의 관심과 사랑을 빼앗긴 듯 살았을 것이지요. 잇단 동생들의 출생으로 점점 더 어머니의 돌봄에서 멀어져갔습니다.
고흐의 모성결핍은 이루어 질수 없는 사랑에 대한 선택으로 이어졌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사랑했던 하숙집 주인 딸인 외제니는 이미 약혼자가 있었고. 두 번째로 사랑한 사촌누나 케이는 고흐보다 나이도 많았고 남편과 사별했던 터라 집안에서 반대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사랑이었던 시앵과의 관계도 파국의 끝이 보이는 위태한 사랑이었습니다. 죽은 형의 죽음을 슬퍼하느라 자신을 온전히 품어주지 못했던 모성에 대한 결핍을 다른 여인들을 통해 충족시키려 하였지만 결국은 아픔으로 점철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과거의 미해결된 상처를 재현하여 현재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무의식적 과정을 반복한다는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가 선택한 여인들은 그토록 사랑을 갈망했으나 끝내 충족시켜주지 못한 그의 어머니를 닮은듯합니다.
반 고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이어 목회자가 되고자 하였지만 목회자들의 문화와 제도에 적응하기 어려운 성격과 대인관계의 어려움으로 결국은 꿈을 접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화가’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발견하며 그가 작품 활동을 한 10여 년간 1100여점의 작품을 남기는 초인적인 창작에너지를 발휘하였습니다. 그림은 그의 내면의 표출이었고 세상을 향한 소리 없는 외침이었습니다. 고흐는 깊은 소외와 불안 속에서도 희망과 생명력이 꿈틀거리는 그림으로 삶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그린 ‘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농부와 노동자들의 삶을 표현했던 고흐그림의 익숙한 소재 중 하나였습니다. 검푸른 하늘과 까마귀 떼는 죽음을 상징한다고들 하지요.
태어나자 형의 죽음의 그림자를 맛보아야 했던 그로서는 죽음이 그리 낯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밀밭위로 자유로이 날아오르는 까마귀 떼는 가난과 소외, 질병으로 인한 그의 삶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그의 열망이 묻어나왔습니다. 이 그림에서도 노란색의 화가라는 그의 이름처럼 어둡고 두려운 죽음을 황금빛의 희망과 열정으로 표현했습니다.
노랑은 우리의 감정을 긍정적이고 낙천적으로 만들어주지만 노랑을 너무 많이 쓸 경우에는 불안, 우울감이 깊어져 자살충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색채전문가들이 경고합니다. 그것이 고흐의 죽음에 관해 증명되지 않은 추측 중 자살이 있는 이유일까요?
사회의 냉대와 가난으로 심리적 에너지가 고갈되어 거무스름한 무채색의 상태일 수밖에 없었던 고흐의 마음에 노란색, 황금색의 힘 있는 터치는 먼저 화가인 고흐에게 심리적 에너지를 제공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의 그림을 보는 우리도 동일한 감정과 에너지를 공유하며 심리치유를 경험하는 것이겠지요.
태양의 컬러가 없는 오늘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에너지가 없는 것 같은데 구름사이로 한줄기 햇빛이라도 비친다면 밖을 향해 달려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요? 컬러에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나의 심리적 컬러는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옷장 문을 열면 가득히 걸려있는 무채색의 옷처럼 어둡고 움츠려들어있지는 않는지 들여다봐야겠습니다.
상담사인 나는 채워지지 않는 모성의 결핍때문에 성장기를 지나 평생동안 우울감과 불안, 그리고 삶에 대한 무기력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을 만나게 됩니다. 성인이 되어 자녀를 키우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내면의 공허와 우울로 자기의 자녀조차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상처를 주고받게 됩니다. 돌이켜보면 나의 부모님도 나에게 적지 않은 상처를 주셨고 그런 미성숙한 부모님의 모습이 나도 모르게 나의 자녀에게 전수될 때 깜짝깜짝 놀라게 됩니다.
그러면서 “완벽한 부모는 없다. 다만 충분히 좋은 부모가 있을 뿐이라는 도널드 위니컷의 말로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모성결핍의 공허함과 불안의 고통을 캠퍼스에 쏟아 부었던 고흐처럼 오늘은 내 마음의 캠퍼스에 고흐가 주는 희망과 생명력을 담은 노랑으로 물들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