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민혜 Jul 11. 2024

요즘 세상에 이혼이 흠인가.

'요즘 세상에 이혼이 흠인가. 하지만 나도 요즘 세상 사람에 속하는가?' 지숙은 생각이 많았다.



  지숙은 자신이 이전과는 다르다고 느꼈다. 몇 년 전 갑자기 생겼던 종양 때문에 자궁과 난소까지 떼어버렸다. 그러고 나서는 왠지 이혼녀라는 말에서 '녀'라는 말이 자신을 지칭하는 말인지 가끔 의문스러워했다. 수술을 할 때 병원에서 의사는 간단한 수술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자녀계획이 없으시죠. 그 나이쯤에 생기는 근종은 떼는 게 나아요. 게다가 크기도 위치도 수술하면 훨씬 나을 거예요. 의사의 말은 지숙의 자궁과 난소에 여러 개의 혹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부가 위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하나는 위험해질 확률이 높단다. 언제든 터지거나 커져서 뱃속에서 장기가 돌아가 다른 장기를 짓누르거나 피가 안 통해서 정체되어 있다가 그째로 터져버릴 수 있단다. 의사는 그 종양들이 뱃속에 들어있는 시한폭탄이라는 짧은 비유와 함께 자신은 폭탄 해체 전문가라며 빙그레 웃었다. 지숙은 우선 알겠다고 했다. 집에 가는 버스에서 그녀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듯했다. 지금이라도 폭탄이 터져 버스가 불길에 사로잡히면 어떨까? 그럼 여성으로서 죽을 수 있지 않을까.



  숙현은 인간성이나 여성성은 생식기관에 붙어있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괜찮다고. 그깟 질병은 질병일 뿐이고 수술받고 호르몬 치료받고 건강해지는 게 우선이라며, 우리 나이 때 여자들은 언제든 아플 수 있다고 했다. 자기도 갱년기에 들어간 지 좀 되어 약으로 버티고 있다고. 쉴 새 없이 땀이 나고 그러다 추워지고 남편만 보고 있으면 화딱지가 난다고 말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화가 날 때마다 참았더니 속에서 그게 독이 되었단다. 이제까지 쌓아왔던 것들은 조금씩 삐져나온다고. 수술을 받더라도 계속 치료받고 그러면 된다고. 여전히 여자이고 엄마라고 토닥여주었다. 숙현은 항상 그랬다. 뭔가 지숙이나 다른 친구들보다 먼저 힘든 일을 겪었다며 여러 조언을 해주었다. 하지만 정작 숙현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는 아무도 몰랐다. 그런 점은 때로 지숙에게 부채감으로 다가왔다. 숙현이 아플 때 힘들 때 도와야 한다는 마음으로. 몇 년 전의 수술과 최근의 이혼까지. 그 사이 지숙이 숙현을 도울 기회는 없었다. 수술을 받는 타이밍 즈음부터 남편과 사이가 계속 안 좋아졌었고, 결혼 생활을 정리했고, 아이들과 계속해서 잘잘한 갈등을 겪었다. 눈에 보이는 일련의 사건들과 함께 마음의 병이 계속 커져갔다. 숙현은 좋은 사람이었다. 아마 지숙에 그녀의 공감과 위로를 원했다면 숙현은 기꺼이 그것들을 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숙은 자신의 숙현에게 은근하게 우울을 전염시키고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조금씩 오랜 친구와의 왕래를 줄여갔다.




  집에 있는 동안 향을 피웠다. 양키캔들의 브랜드명을 보고 지숙은 약간 의아해졌다. 캔들워머를 켜고 워머에 열이 오르면 캔들을 올리고 불을 붙였다. 계속 따끈한 채 유지되는 향초는 좋은 향기를 오래도록 발산한다. 향초의 불빛은 흔들거리지만 캔들워머가 비추는 빛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 향초가 반쯤 녹아 액체가 될 때쯤 지숙은 불을 껐다. 온 집안에 향기가 은은하게 퍼진다. 클린 코튼이라는 이름이어서 그런가 향초에서는 섬유유연제의 보송한 향이 났다. 



  아파트 베란다에는 몇 년째 방치된 물건들이 있다. 지숙은 요즘 그것들을 조금씩 더디게 치우고 있다. 캔들워머와 캔들도 그 속에 있었다. 누군가 명절 선물로 보낸 것이다. 창고 깊숙이 박혀있다가 한 가정의 파경 덕분에 세상에 향기를 발산하고 있는 향초를 보면서 지숙이 중얼댔다. "좋은 점도 있네." 내일은 홈플러스에 가기로 했다. 가는 김에 루미에게 줄 간식도 좀 사 오고 장도 좀 볼 요량으로. 지숙이 시끄럽게 떠드는 TV를 보려 고개를 돌렸다. 루미가 지숙을 보며 꼬리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종종걸음으로 다가갔다.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루미를 보며 지숙은 이번에 동물병원에 가면 물어볼 여러 질문들을 노트에 적었다. 요 며칠 루미는 기운이 없었다. 늙은 개들은 원래 기운이 없기 마련이다. 하지만 루미는 요즘 불러도 시큰둥하고 밥을 먹는 양도 많이 줄었다. 루미는 1년에 한 번은 접종이다 뭐다 하는 자질구레한 이유로 병원에 간다. 작년 이맘때즈음부터는 성인병 예방과 적절한 관리를 위해 일 년에 두 번은 병원에 들르기로 담당의와 상의했다. 13살의 몰티즈인 루미는 약간의 비만에 당뇨를 앓고 있다. 루미는 졸음을 참았다. 졸음이 가득한 눈을 꿈뻑였다. 지숙을 바라보려 무던히도 노력했다. 지숙이 부르면 한 달음에 달려가야 하는데 요즘 루미의 눈에는 희뿌연 것이 끼어갔다. 여기저기 부딪혔다. 불편하더라도 루미는 지숙이 불러주는 것이 좋았고 그녀에게 가는 길이 좋았다. 지숙은 언젠가부터 오래 잤다. 아린 그보다 더 오래 자게 되어서 서로를 보듬을 시간이 전보다 많이 줄었다. 언젠가부터 이 늙은 아기는 사람들이 만질 때 짖거나 으르렁거렸다. 만져지는 곳에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집주인들이 우울하고 싸워대니 개도 스트레스를 받는 걸까?

이전 03화 나는 인생의 어디쯤을 헤매고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