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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혜 Jul 11. 2024

그럼에도 일상을 찾아가야한다.

지숙은 가끔 스스로 할 수 있는 잘잘한 일을 큰 아들에게 부탁했다. 아마도 그건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같이 하고 싶어서였다. 그날도 그랬다. 루미의 정기검진 날 지숙은 아들에게 부탁했다. 집에 잠깐 들러서 루미를 데리고 병원에 가는 걸 도와달라고. 일주일쯤 전에 아들에게 이야기를 해놓았다. 그리고 병원 가기 전날에도 내일 집에 올 수 있지라는 질문에 아들은 어 알겠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오고 있어?" 지숙이 시계를 보며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루미는 자그마한 케이지 안에 엎드려있었고 아침을 굶은 탓에 조금은 힘이 없어 보였다.  



  "엄마 그냥 다음에 가. 다음 주에 내가 데려다줄게. 지금? 지금은 안돼 나 바빠 이따 스터디 가야 해." 전화기 너머로 곤란하다는 듯한 지훈의 목소리가 울렸다. 



  "오늘 가기로 예약해 놨어." 지숙이 말했다. 그녀는 맥이 빠졌다.



  "아니 엄마 왜 꼭 오늘 가야 해. 오늘만 날인가. 매일 집에 있잖아." 아들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후. 택시 타고 가면 되니 신경 쓰지 마." 지숙은 한숨을 쉬었다. 택시 불러서 타고 가면 그만이었다. 그냥 아이와 같이 가고싶은 마음에 부탁한 것이었다. 지숙은 바로 택시를 불렀다.






  콜택시를 부른 지숙은 단지 앞에서 15분 넘게 택시를 기다렸다. 노란색의 택시가 미끄러지듯 지숙 앞에 섰다. 지숙이 택시에 타자 택시기사는 기분이 나쁜 듯 구시렁댔다. "아니 뭔 아파트 단지 들어오는데 이렇게 길을 막나 택시라고 뻔히 적혀 있는데." 택시기사의 구시렁거림을 끝으로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이렇게 돌아 들어올 줄 알았으면 단지 앞에 나갈걸 그랬네요." 정적을 깨고 지숙이 말했다.



  "개가 이쁘네" 택시기사가 루미를 보며 말했다. 정말이지 애정이라고는 한 톨도 담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개를 태울 거면 얘기를 좀 하지 개털 알레르기 있는 손님이 다음에 탈 수도 있는데." 



  지숙은 혼난 기분이 들었다. 기사의 말을 무시한 채 그녀는 창밖을 멍하니 보았다. 개 어쩌고 얘기를 좀 더 하다가 기사는 한참 인상을 찌푸린 채 입을 꾹 닫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뭔가 또 중얼거렸다. 지숙은 그가 통화를 하는건지 지숙에게 말을 거는 것인지 헷갈렸다.



  지숙이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 냄새가 났다. 카운터에 있던 직원이 지숙에게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오늘 좀 일찍 오셨네요. 지금 점심시간이라 삼십 분 정도만 기다려주세요. 접수 먼저 도와드릴게요. 이따 부르시면 1번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지숙은 루미가 들어있는 케이지를 양 팔로 받쳐 들고 대기실에서 앉아서 기다렸다. 루미를 케이지째로 데리고 다니는 게 제법 힘에 부쳤는지 지숙은 앉자마자 숨을 몰아쉬었다.



  "루미 보호자분 오셔서 잠깐 설명 들으시고 진료실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카운터에 앉아있던 아가씨가 지숙에게 말했다. 어느새 루미를 케이지에서 꺼내 안고 있던 지숙이 찌뿌둥한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녀는 안고 있던 아리를 다시 케이지에 넣었다.



  "어머님, 오늘 루미는 교수님께서 한 번 보고 혈액 검사할 거예요. 이따가 봐서 무릎이 더 안 좋아졌다고 하시면 엑스레이 찍을 수도 있어요. 그러면 시간이 좀 오래 걸릴 거예요. 우선 복도 끝 1 진료실로 가시면 됩니다." 지숙은 그 얘기를 가만히 들었다.



  그녀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지숙을 보며 말했다. "혹시 짐이 많으시면 케이지는 여기 두고 루미만 안고 가셔도 돼요.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친절한 목소리였다.



  "감사하죠." 지숙이 답했다.



  지숙은 잠깐 새 루미를 꺼내 들고 짐짝 같은 케이지를 건넸다. 그리고는 진료실로 갔다. 루미는 몸이 불편한지 약간 몸을 뒤척였다. 이미 여러 번 와보았던 동물병원이지만, 루미는 병원이 마냥 편하지는 않아보였다. 지숙도 그랬다. 예전에 다니던 아파트 단지 앞 작은 동물병원에 갈 때는 그냥 슈퍼 가는 느낌으로 외출했었다. 그때는 그냥 산책하듯이 가면 되니 짐이 많지 않았다. 언젠가 숙현이 그 동네 동물병원은 영 돌팔이 같다며, 아는 사람을 소개해 준 뒤로는 대학병원으로 오고 있다. 숙현이 안다는 사람은 대학 병원에서 일하는 그녀의 사촌동생이었다. 지숙이 대학병원은 너무 과하고 진료비도 비싸다고 했지만 숙현은 막무가내였다. 친구 좋다는게 뭐냐며 무조건 그곳으로 가라고 추천했다. 숙현을 떠올리자 지숙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지숙이 진료실의 문을 열었다. 깨끗하게 정리된 방은 환했고 오른쪽에 있는 거대한 책장엔 여러 두꺼운 책들과 상패가 늘어서 있었다. 책장에 이어서 오른쪽 벽엔 커다란 세 개의 모니터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방 중간을 가로지르는 탁자는 강아지나 고양이를 얹기 좋아보였다. "오셨어요. 루미도 안녕" 흰 가운을 입은 젊은 교수는 다정하게 웃으며 루미를 쓰다듬었다. 지숙은 왠지 차가운 느낌의 의사가 환하게 웃자 그가 숙현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병원에 이런 간단한 진료로 와도 되나요?" 지숙이 물었다. 진료실 뒤편에는 실습 중인 듯한 학생들이 네댓 명 옹기종기 모여서 있었다. 진현과 하영이었다. 여자 애는 루미와 눈이 마주치자 "안녕"하고 손을 흔들었다. 대학원생 몇 명이 중간중간 진료실에 들어왔다 나갔다. 오밀조밀하니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와도 되죠." 의사는 지숙에게 답했다. 그리고는 "요즘 루미 특별히 불편한 곳은 없죠?"라며 물었다.



  "예전보다 잠자는 시간이 많이 늘어난 것 같아요. 눈이 잘 안 보이는지 귀가 잘 안 들리는지 가끔 화들짝 놀라기도 하고요." 지숙이 주머니에 있던 노트를 꺼내 읽었다. 읽다 보니 굳이 적어오지 않아도 말할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



  "그러게요. 눈이 좀 탁하네요. 오늘 혈액검사를 한 번하고, 전반적으로 볼게요. 나이에 비해서 건강한 편이에요. 하지만, 강아지들이 나이가 들면 사람처럼 이곳저곳 아프거든요. 음.. 사람도 나이 들면 고혈압, 당뇨, 심장질환 같은 성인병이 생기잖아요. 그렇더라도 잘 관리해 주면, 그 병들을 달고 살 긴 하더라도 갑자기 악화되는 경우는 드물어요. 강아지들도 그렇거든요. 보호자분처럼 잘 관리해 주고 주기적으로 병원 오셔서 체크하면 훨씬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 수 있어요. 너무 걱정 마세요. 전에 무릎도 한번 찍어 봤었네요."



  수의사는 차트를 한번 보고는 루미의 목부터 겨드랑이, 허리, 사타구니까지를 손으로 만져보았다. 그리고는 등쪽과 배쪽을 다시 한 번 짚어보았다. 무릎 부분을 확인하고, 청진기로 가슴 부분 여기저기 소리를 들어보고 시계도 한 번 봤다. 루미가 숨을 쉴 때마다 갈비뼈가 옆으로 벌어졌다 줄어들었다. 지숙은 바쁘게 숨을 쉬는 루미를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무릎은 더 심해지지 않아서 오늘 따로 엑스레이를 찍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심박도 정상이고 헐떡거리는 것도 없네요. 숨차거나 기침하지도 않죠?" 그가 덧붙였다.



  "네. 산책 가서 심하게 뛰면 헥헥거려요." 지숙이 말했다.



  "뛰면 원래 숨이 차죠. 숨찰 때 드르렁거린다거나 숨넘어가는 소리는 나지 않나요?" 교수가 말했다.



  "잘 안나요. 근데 요즘 제가 산책을 많이 못 시키고 있긴 해요. 루미도 금방 지치는 것 같고.." 지숙이 자신없게 말했다.



  "그렇구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피 뽑는 건 들으셨죠?" 교수가 말했다.



  "네" 교수는 강아지를 한번 쓰다듬고 이것저것 의료도구가 담긴 트레이를 끌어왔다. 그리고는 핀셋으로 알코올솜을 집어들었다. 교수가 옆에 있는 학생에게 손짓하자 학생은 고무줄을 챙겨 들고는 루미의 왼쪽 앞다리 안쪽에 걸고 그리고 루미를 잡아주었다. 작은 강아지는 크게 저항하지 않고 앞다리를 내맡겼다. 가녀린 앞다리를 살짝 들어 올리자 개는 뒤로 더 주저앉으려 했다. 하지만 잡혀있어서 더 뒤로 가기는 힘들어 보였다. 교수가 고무줄을 묶고 흰 짧은 털로 덮인 다리를 축축한 솜으로 닦으니 혈관이 우룩 붉어져 나왔다. 울룩불룩해진 혈관일 지라도 아주 얇았다. 의료진이 피를 뽑으며 압박된 고무줄을 풀 때도 루미는 가만히 있었다. 이따금씩 루미는 지숙을 보며 살랑 꼬리를 흔들며 웃었다.



  "보호자분. 루미 피부도 저희가 한 번 볼게요. 약간 안 좋은 부분은 약도 바르고 처치할 예정이에요. 대기실에서 기다리시면 되고요. 한 시간 있다가 검사결과 나오면 뵐게요." 교수가 루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가운을 입은 학생이 지혈을 마치고 루미를 안아들었다. 그들은 왜인지 지숙에게 꾸벅 인사한 뒤 진료실 뒤편으로 나있는 문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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