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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혜 Jul 11. 2024

나는 인생의 어디쯤을 헤매고 있을까?

지숙은 자식들에게 루미는 괜찮을 거라고 말했다. 삼 년 전 여름휴가도 오 년 전 여름휴가도 우리끼리 다녀오지 않았느냐. 앞 집 아줌마에게 루미 밥만 좀 살펴달라고 부탁했었는데 괜찮았다며. 밥과 물이 충분하니 이번에도 루미는 괜찮다고 말했다. 일주일 사이에 지숙은 노파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숙은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지숙은 원래도 약간 소심하다, 매사 의욕이 없다는 말을 종종 했었다. 특히 상준이 그런 말들을 많이 했었다. 두 사람이 결혼할 무렵에도 시댁 어른들이 말했었다. 여자가 집에서 내조만 잘하면 된다. 얌전한 게 좋다고. 지숙은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다. 그저 문득문득 언제부터 이렇게 할 말도 없고, 말할 사람도 없는지 떠올렸다.



  지숙이 좀 괜찮아지자 상준은 아들에게 자기가 타던 차를 주었다. 시간 날 때 엄마 좀 들여다보라는 의미였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느라 엄마 보러 갈 시간 없다는 툴툴거림을 잠재우기 위한 방편이었다. 유책배우자의 위선일지도. 차를 산 뒤에도 아들에게 시간이 많이 생기지는 않았다. 



  지숙의 딸은 고등학생이었다. 뭐든 곧잘 하는 아이였다. 어떤 사람들은 첫째는 잘생겼다거나 겉멋이 좀 들었다고 얘기했다. 둘째 딸은 똘똘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지숙은 때로 아이들을 평가하는 사람들이 싫었다. 당신들에게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칭찬을 들을 때는 내심 뿌듯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딸내미는 전교권을 놓친 적이 없었다. 



  부부는 갈등을 아이들에게 계속 숨기려고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숨겨지지 않았다. 이혼할 무렵에 아들은 입을 닫았고 딸은 학교나 친구들에게 알려지지 않게 조심해 달라고만 말했다. 지숙의 자살시도 또한 아이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 지숙과 아이들 사이를 가로막은 벽은 보이지 않았지만 견고했다.



  “엄마, 친구들이 새엄마 예쁘대. 어쩌다 마주쳤어.” 어느 날 딸아이가 무심히 말했다. 과 먹을 음식을 준비하던 지숙은 뜬금없는 말에 잠시 멍해졌다. 아이는 아이 아빠와 함께 살고 있었다. 아이의 새엄마도 함께. 그리고 지숙의 집을 자주 찾았다. 


 

  “그러니까 엄마도 집에만 있지 말고 밖에도 좀 다니고, 결혼하기 전에는 학원선생님도 했었다며 그런 거 다시 하면 안 돼?” 아이가 보채듯 말했다. 





  “그게 몇 년 전인데. 네 오빠 낳기도 전이면 거의 이십년 넘었겠다. 학교는 어땠어?” 지숙이 얼버무리며 화제를 돌렸다. 아이에게 먹이려고 볶음밥을 하던 중이었다.



  “응. 그냥.” 아이가 대답했다.



  “그래 그럼 밥 먹자” 지숙이 말했다.



  “엄마 나 밥 먹을 시간 없어. 잠깐 루미 보러 들른 거야” 아이는 짐짓 바쁜 체하며 말했다. 오 분 전까지만 해도 본격적으로 늘어질 기세였다. 티브이 앞 소파에 누워 한쪽 겨드랑이에 강아지를 끼고 핸드폰을 보던 딸은 어느새 현관에 나앉아있었다. 꽉 매 놓은 신발 끈 탓에 발이 들어가지 않는지 연신 낑낑대고 있었다. 



  지숙이 아이의 뒤로 다가가 말했다. “뭐 해. 밥 먹고 가지. 신발 그거 안 불편해?”



  지숙의 말을 들은 아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비수가 날아와 꽂힐 것만 같았다. 십 대의 아이들은 가끔씩 이상한 부분에서 기분이 상하고는 했다. 지숙은 아이들이 이런 모습을 보일 때도 혼내거나 훈육하지 못했다.  



  "하나도 안 불편해." 아이가 말했다. '언제 저렇게 발이 컸지?' 지숙은 몇 년을 놓쳐버린 것 같았다. 루미가 아이를 따라나가려고 했다. 아이가 손을 흔들며 현관문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아이가 문을 닫고 나갔다. 그리고 지숙은 다시 혼자 남겨졌다. TV에서 울리는 시끄러운 소리가 집에 깔렸다.



  원래는 TV를 잘 보지 않았다. 애들 교육을 위해서 하루종일 TV 앞에서 멍청히 보내는 시간은 유익하지 않다는 애아빠의 지론 때문이었다. 지숙도 왠지 TV를 틀어놓으면 시끄럽고 번잡스러웠다. 동네 아줌마들이 다 본다는 드라마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관심 없는 척했었다. 아이를 위해서 티브이 드라마를 보지 않는다고 말하면 아파트 아줌마들은 어떻게 그러냐고 추켜세웠다. 애들이 공부를 잘하니 이런 고상한 척도 은근히 먹혀들었다. 지숙은 그런 선망의 표정을 즐겨왔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집에는 항상 TV 소리가 났다. 지숙이 퇴원하고 나서부터 갑자기 상준이 집에 드나들었다. 뭔가 늘 챙겨주려는 식이었다. 죄책감일까? 어느 날 그는 이거라도 보라며 책을 한 보따리 가자다 놓았다. 그러더니 한 달째 같은 자리에 있는 책을 도로 가져가고 TV를 들여놓았다. 해외 사이트에서 구매했다는 설명과 함께 TV만 덜렁 사다 놓고 갔다. 자잘한 설명서와 선들도 같이 던져놓고 갔다. 지숙은 귀찮아 그것들을 그냥 두었다. 어떻게 설치하는지 모르겠고. 어느 날 상준이 불렀다는 사람이 집의 초인종을 눌렀고, TV를 설치해 주었다. 그는 어떻게 TV 없이 살았냐며 이제껏 TV를 보지 않았지만 TV 수신료를 내고 있었다면 그걸 돌려받을 수 있다고 뿌듯하게 말했다. 



  그때부터 텅 빈 공간은 소리가 채웠다. TV를 틀어놓아야 잠을 잘 수 있었고 밥을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소리가 계속 나는 집에서는 깊게 잠들 수 없었다. 지숙은 문득 잠에서 깨면 그냥 누워있거나 수면제를 먹었다. 지숙은 잠에 들어있거나 깨어있었다. 그 사이 어딘가를 계속 배회했다. 항상 물에 잠겨있는 것처럼 몸이 무겁고 추웠다. 산소가 부족한지 한쪽 뇌가 무거운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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