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공항에 발이 묶인 모녀
희고 시원한 넓은 공간의 천장은 족히 사 미터는 되어 보인다. 희고 굵은 기둥들과 엘리베이터, 독특한 건물의 구조물들이 안과 밖을 구분하고 있다. 아름답기로 유명하다는 공항에는 갈길 잃은 사람들이 가득하다. 그들은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움직이는 비행기들에 때로 관심을 가졌다가 또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체념했다. 그 사이 종종걸음으로 모녀의 시선에는 음식점과 기념품 가게, 커다란 전광판들이 스친다.
소리는 유기체처럼 끊임없이 이어졌다. 사람들의 소리 그들이 끌고 가는 카트소리, 어디에선가 나는 쇠가 부딪히는 소리, 백색 소음과 같은 에스컬레이터 움직이는 소리.. 그 소리들을 뚫고 사람을 찾는다는 안내가 들려왔다.
“세오님. 킴. 세옴. 킴....“ 지우에게는 익숙한 엄마의 이름이었다. ”게이트..“ 열심히 게이트를 향해 같이 걷고 있는 엄마의 이름이 들려오는 게 이상했다.
선임 씨는 분주했다. 손에 든 보딩패스를 봤다가 게이트의 숫자들을 봤다. 그러다가 손가락으로 이곳저곳을 가리켰다. 멈춰 선 지우를 이상하게 바라보던 선임이 말했다. “이쪽이야. “
“엄마! 잠깐만.. 들어봐.” 지우가 천장으로 손가락을 향하며 선임에게 말했다.
“세오님 킴. 세오님 킴. 게이트 28..” 안내 방송이 다시 울렸다.
“부르잖아.“ 지우가 말했다.
“누가?” 선임이 물었다.
“방송에서.“ 지우가 시답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누구를?” 선임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 말했다.
“엄마 부르는 거 같아. 28번 게이트로 오래. “
“어마야. 나를 왜? 여기에는 게이트 15번이라고 적혀있는데? “ 선임이 손에 든 보딩패스를 지우에게 내밀어 보여주며 말했다.
“답답하다. 선임 씨..” 지우는 선임을 뒤로 한채 게이트 28번을 찾아 걸었다.
“지우야.” 선임이 돌아선 지우를 불렀다.
“아! 빨리 오라니까?” 지우가 선임을 향해 짜증스레 말했다. 지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지우가 몇 번 기침을 했다.
선임의 보딩패스에 찍힌 15번 게이트와 28번 게이트는 반대쪽에 있었다. 선임은 그 갈림길에서 잠깐 고민하다 이내 지우를 따라 걸었다. 대리석 바닥이 유독 시리게 느껴졌다.
“진짜 불렀어? 난 왜 못 들었지? “ 선임이 지우의 옆에 다가서며 물었다.
“아 좀! 불렀다니까. 가자. “ 지우가 말했다. 몇 번 비행기가 연착되면서 지우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약간 몸살끼가 있는 것 같았다.
선임은 수긍한 듯 손에 든 보딩패스를 허리춤에 매고 있던 가방에 잘 정리해서 넣었다. 그리곤 왠지 결연한 표정으로 28번 게이트를 향해 걸었다. 지우와 선임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침묵 사이를 공항의 소리가 채웠다.
침묵을 깬 건 선임이었다.
“엄마가 나이가 좀 들어서 못 알아들을 수도 있지.”
선임이 말했다. 그녀는 절대로 영어를 못해서 듣지 못했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지우도 그걸 알았다.
“니가 있어서 편하긴 한데.. 좀 불편하다.” 선임이 덧붙였다.
지우는 그 말을 듣고는 푹 한숨을 쉬며 멈춰 섰다. 앞서가는 엄마를 보며 지우가 말했다.
“아, 진짜. 나도 스트레스받아.” 한숨 섞인 목소리는 여전히 갈라졌다.
“그렇게 스트레스받으면 너는 비행기 타는 곳으로 가. 나는 15번 들렀다 갈게. “ 선임이 말했다. ”너 부른 것도 아니라며. “ 그리고는 지우를 뒤로 한 채 선임 씨가 걸었다. 선임은 약간 흘러내리는 허리춤의 가방을 고쳐 매고 조그만 캐리어를 다시 잡아끌었다.
지우는 그런 엄마를 지켜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선임을 따라갔다.
“말이나 통하면 몰라.” 지우가 혼자 퉁퉁거리며 중얼댔다.
선임 씨는 28번 게이트로 당당히 걸었다. 앞에 보이는 게이트에는 몇 사람의 외국인이 삼삼오오 모여서 떠들고 있었다. 선임은 덜컥 겁이 났다.
선임의 머릿속에 이민 온 지 십 년간 마주했던 여러 얼굴들이 스쳐갔다. 원래 한인타운의 식당은 한국인들만의 공간이라 거의 영어를 쓸 일이 없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와서 선임은 무지 애를 먹고 있었다.
‘왜 부른 거지? 맡긴 짐에 김치가 들어서 그런가? 티켓 살 때 입력을 뭘 잘못했나.‘ 오만가지 생각이 스치는 동안 선임은 게이트 직원들 앞에 서있었다.
‘저..’ 선임 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글서글하게 생긴 허여멀건한 키 큰 남자가 카운터 너머에서 말했다. 선임이 들은 건 헬프뿐이었다. 선임은 다음 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을 향해 신분증을 내밀었다. 그는 선임의 사진과 정보들이 적힌 작은 카드를 보더니 옆의 직원과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참을 이야기하던 그들은 선임을 보며 웃었다. 그러면서 선임에게 뭐라 말했지만 선임은 도통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선임이 주섬주섬 주머니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통역 어플을 켰다. 하지만 이내 인터넷 연결이 잘 안 된다는 이유로 어플이 꺼져버렸다.
“뭐래?” 지우가 어느새 선임의 뒤에 서있었다.
“모르겠어.” 선임이 지우에게 말했다. 지우가 입을 떼려 하자 선임이 팔로 지우를 은근히 밀어냈다. 그리고는 검지를 펴 들고는 한 번 더 통역 어플을 해보겠다고 말했다. 직원이 선임과 지우를 보며 말했다. “노 프라블럼.” 선임이 한참 핸드폰과 씨름하자 지우가 그들과 이야기를 시작했다.
왜 그들이 선임의 이름을 불렀는지 묻자 그들은 몇 번의 연착 때문에 다시 비행기 표를 예약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들은 선임 씨의 이름으로 비행기표가 두 번 예약되어 있어서 비행기 출발 전에 이름을 부른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항공편이 문제는 없는 거지? “ 지우가 물었다.
“응. 다 체크했어. 우리가 예약 실수한 것도 확인했고, 다음 항공편은 15번 게이트에서 타면 돼.” 직원이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
“고마워.” 지우가 말했다.
“그래. 좋은 하루 보내.”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
돌아서려는 지우에게 선임이 말했다.
“그것도 물어봐!”
“뭐?” 지우가 말했다.
“아침에 말한고 호텔하고 식사 쿠폰.”
꼬박 20시간 넘게 연착과 취소를 반복하던 비행 편 때문에 선임과 지우는 공항가까이 있는 호텔을 급하게 예약해서 묵었다.
아침에 지우가 항공사에서 온 메일을 열어보니 항공편이 또 지연된다는 통보와 함께 호텔이나 식사에 대해서는 직원에게 물어보라는 내용이 메일 구석에 아주 조그맣게 적혀있었다.
선임은 지우에게 빨리 물어보라는 듯 재촉했다.
“물어봐봐.” 선임이 말했다.
“그냥 가자.” 지우가 말했다.
“뭘 그냥 가. 아니면 메일 보여줘. 내가 물어볼게.” 선임이 말했다.
그들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는 항공사 직원들이 어리둥절하게 모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수가 물었다. “항공 지연에 따른 보상이 있나요?”
남자직원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안타깝게도 날씨 때문에 지연되거나 결항되는 건 우리가 보상하지 않아.” 확실한 거절의 제스처 덕에 선임도 그가 호텔 지원을 해주지 않을 거란 걸 알았다.
그는 팜플렛 하나를 내밀며 말했다. “대신에 이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할인된 가격으로 숙박을 할 수 있어. “
“우린 이미 숙박했어.” 지우가 말했다.
“뭐래?” 선임이 물었다.
“안된대.” 지우가 말했다. 카운터의 직원은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메일. 보여줘.” 선임이 지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우는 메일함을 뒤적이며 메일 말미에 적혀있던 내용을 찾았다.
“여기 있네.” 지우의 핸드폰을 같이 보던 선임이 말했다. 그리고는 선임이 지우의 핸드폰을 직원들에게 보여주었다.
지우가 말했다. “여기에 적혀있어.”
게이트 직원이 말했다. “아 나는 게이트 직원이라 잘 몰라. 이런 건 커스터머 서비스 팀에 물어봐야 해.”
카운터 너머에 있던 다른 직원도 지우의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러더니 남자 직원을 보며 “이 메일에는 누구한테 물어보란 건 없긴 하네.” 그러더니 “호텔은 당장 해줄 수 있는 게 없고 식사 바우처는 줄게. 그리고 연착되면서 쓴 비용은 여기에 클레임 해.”라며 아까 남자직원 줬던 브로셔의 맨 뒷장에 적힌 홈페이지 주소를 보여줬다. 그러더니 그 직원은 한참 모니터를 보며 마우스를 달깍였다. 곧 탑승권 같이 생긴 종이를 몇 장 뽑더니 “점심, 저녁 각각 15달러씩 두 사람이라 총 60달러 바우처야. 1년 동안 쓸 수 있어.” 선임이 지우를 보며 말했다. “잘됐네.” 선임은 직원들이 건넨 바우처를 받아 들고 말했다. ”땡큐!”
두 사람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비행기를 탈 게이트로 향했다. 걸어가는 길에는 면세점, 기념품점, 식당들이 있었다.
지우와 같이 걸어가던 선임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비빔밥 집이 있네?”
지우가 말했다.
“먹고 갈까?”
선임이 지우를 보며 네 장의 바우처를 흔들었다.
기상상황이나 항공기 결함 등으로 비행기가 연착되어 답답한 마음을 써 본 자전적 소설입니다.
저는 남편과 여름 휴가를 와서 캐나에서 떠나질 못하고 있어요. 도착시간 기준으로 48시간 정도 비행기가 계속 밀리고 있어서 공항 근처 숙소에서 이틀 묵고 다음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네요. 비행기 기다리며 써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