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단편소설 거울상
아래는 저의 SF소설 거울상의 6화입니다.
1화부터 5화까지는 인물들이 어떤 가상의 공간에서 알 수 없는 퀘스트를 수행하는 것을 다루었습니다. 이어질 몇 편에서는 가상의 공간으로 주인공들이 들어가기 이전 지구에서 있었던, 소년의 과거 이야기를 다룰 예정입니다. 소년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네요. 소년의 이름은 무힙입니다.
소년은 어쩌다가 홀로그램 세계에 갇히게 되었는지, 지구를 떠나고 있는 우주선은 어디로 향하는지, 소년의 친구인 제이와 가을이는 정말 남매 사이인지, 퀘스트에 실패한 가을이를 비롯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등등 풀어나가야 하는 과제들이 남아있네요. 모든 떡밥을 다 회수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다음화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
무힙은 군데군데 찢어진 잿빛 재킷의 어깻죽지를 잡았다. 그리곤 익숙한 듯 그것을 탈탈 털었다. 그는 약간 추운 듯 몸을 떨었지만 옷을 터는데 열심히였다. 사방으로 퍼지는 먼지에 그의 미간이 찌그러졌다. 회색 먼지가 떨어져 나가자 청색의 재킷이 드러났다. 재킷의 등 부분에는 이름과 연락처가 적혀있었다. 무힙, 세라. 그와 어머니의 이름이다.
그는 지난밤에 세라가 했던 말이 떠올렸다.
"무힙, 이번엔 가야 해."
"안 간다고 했잖아. 지낼만하다니까.. 자꾸 그러네."
"첫 번째 수정호가 G80에 도착했어. 그리고 이건 좋은 싸인이야. 새로운 행성에 안정적으로 도착한 걸 확인한 과학자들도 이제 곧 모두 떠날 거라고. 우리 둘 다 1년 내에 떠나야 해."
"그럼 엄마 갈 때 가면 되잖아."
"너 상반기에 가는 게 안전해. 나는 올해 하반기 우주선 탑승자 목록에 들어가 있어. 혹시 네가 못 가면 나 혼자 어떻게 가니. 지난번에도.." 세라는 무힙을 탑승자 목록에 올려주기 위해서 부단히도 노력했다. 무힙을 어떻게 든 수정호에 태워 보내야 세라의 오랜 짐도 가벼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힙은 세라를 쏘아보았다. 꾹 다문 입매가 꿈틀거렸다. 무힙은 무언가 말하려는 듯하다가 그냥 돌아선다. 곧이어 짜증스럽게 문을 닫고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세라가 소리쳤다.
"너 이번에 가는 걸로 알아!!" 세라는 그 말을 끝으로 몇 번 기침을 콜록 댔다.
오염된 지구에서 더 이상 살 수없다는 것은 오랜 기간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전기 비축분이 바닥을 향해가고 있다. 바람이나 파도로 근근이 생성되는 전기도 사용 시간이 정해져 있었다. 가구별 사용 가능 시간도 계속 줄어들 것이다. 식량도 문제다. 최소한의 사회적 통제기능을 하는 연구소와 사회조직의 일원들마저 모두 떠난다면 남은 이들은 서로 싸우다 자멸하고 말 것이다.
세라의 외할머니는 지구에서 떠나는 첫 번째 연구자가 될 것 인지 지구에서 생을 거둘 것인지 선택했다. 태어난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기로 결정한 그녀는 하루하루를 연구에만 몰입했다. 그리고 그 일을 자신의 딸에게, 손녀에게 물려주었다. 그녀들은 탈출을 위한 전략을 수십 번 계획하고 수정하고 실패했다. 실패한 사례는 굳이 외부에 공표하지 않았다.
이곳이 점점 살아가기 힘들어진다는 공포는 때로 생존에 유용했다. 과거에 비해서 안 좋은 조건에서도 사람들은 악착같이 살아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을 영영 탈출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믿는 건 다른 문제다. 허무는 인류의 생존에 걸림돌이다. 그래서였다. 대를 이은 연구는 조용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세라의 일은 사람들이 호응해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지구를 떠나고 싶어 해야 한다.
세라의 연구소에서 지구를 순차적으로 떠날 수 있다고 공표하자 사람들은 희망을 품었다. 그렇게 모인 많은 사람들을 우주선에 실어 쏘아 올렸다. 그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빠른 속도로 유영하고 있다. 그간 수백 대의 우주선이 지구에 남은 자원을 긁어모아 지구를 떠났다. 지구를 떠난 사람들은 동면상태로 긴 유영을 계속한다.
반면, 지구의 사람들은 굶어 죽었다. 세라는 죄책감을 늘 갖고 살았다. ‘아마 지구에서 계속 살기로 선택했다면, 로켓 쏠 예산으로 여길 재건 해서 모두 충분히 먹고 마셨을 텐데.' 그럴 때마다, 단 한 번의 성공이 인류를 계속 살아나가게 할 것이라는 어머니의 말을 떠올렸다. 위험한 걸 알지만 그래도 떠나는 사람들이 바라는 건 오직 당신만의 안녕은 아니었다.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 대를 이어서 내려오는 첨단 과학기술과 소명이 세라에게는 버거웠다. 그들이 내렸던 잘못된 선택들도. 길에서 죽어가는 누군가를 모른 척해야 하는 순간들도. 모두. 섬세하게 빚어진 자신의 유전자 또한 두려웠다. 전 인류 중에서 연구에 가장 적합한 유전자를 가졌다는 세라의 유전자는 세라 어머니의 유전자와 같았다. 할머니, 증조할머니와도 모두 같았다. 뱃속에 아이를 품고 출산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유전자를 공유했다. 그리고 자라나 가면서 세라는 어머니의 생각과 연구의 방법들을 그대로 배웠다.
서른 즈음에 세라는 아이를 가졌었다. 어쩌다 만난 사람과의 한 번이었다. 임신의 징후를 알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이미 아이는 뱃속에서 죽어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인류는 방사선과 환경호르몬에 노출된 지 시간이 꽤나 지났다. 정상적인 생식기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세라의 세대 이후로는 개체수 조절을 위해 아이를 낳을 수 없게끔 시술을 했다. 세라도 십 대 때 시술을 받았지만 우연인지 운명인지 그녀는 아이를 가졌다. 아이를 낳는 기능은 인공적인 배양기계로 대체했고 흠결이 적은 유전자를 그대로 복제한 배아나 유전자를 군데군데 잘라내어 다시 이어 붙여 새로운 배아를 만들기도 했다. 다음 세대는 어떤 구성의 아이들이 이끌어 나갈지 정하는 것은 사회학자들과 생명공학자들의 몫이었다.
세라는 아이를 잃었을 때도 그다지 슬프지 않았다. 아이를 키우는 것이 더 복잡한 일이었다. 그의 할머니도 어머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또 어떤 결점을 가진 아이가 태어날 수도 있어서 두려웠다. 이상했다. 당연히 아이를 가질 일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생겨난 아이였으니. 피곤하고 지치고 더부룩한 느낌이 들었을 때 그냥 지나가는 몸살이겠거니 여겼다. 실험실의 누군가가 너 애가 생긴 게 아니냐고 물었을 때는 말도 안 된다고 여겼고, 관련된 자료를 찾아본 이후에서야 정말 임신인가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당시 새로 발사될 수정호의 탑승자 목록에 그녀가 있었고, 대를 이어내려 온 이 백 년간의 탐험은 결실을 맺을 것처럼 보였다. 사실 세라가 떠난 이후에 같은 사람이 또 태어나 세라를 엄마로 알고 지내게 될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의사를 만나러 가는 길에 그녀는 기도했다. 큰 병이 아니길. 그리고 임신도 아니길. 의사의 메마른 표정과 축축한 초음파 겔의 느낌이 낯설었다. 임신이 맞다는 대답이 돌아왔을 때 외부로 뻗어나가던 모든 의욕들이 내장의 어딘가 즈음에서 사그라드는 느낌을 받았다. 곧이어 따라온 사산 소식은 며칠간 그녀를 따라다녔다.
세라가 무힙을 만난 건 그 무렵이었다. 연구소와 집을 오가던 그녀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짙은 고동색의 담요 같은 것을 두른 하나의 덩어리 같았다. 작은 동물 같기도 했다. 다가온 사람의 얼굴은 앳되보였지만 푸석푸석했다. 입술은 생기를 잃은 듯 붉은빛이 없고 회백색의 각질로 덮여있었다. 눈 밑의 퀭한 파임은 그녀의 눈을 더욱 커다랗게 보이게 했다. 구불구불한 머리카락 몇 가닥이 보였다. 커다란 담요사이로 그녀의 앙상한 팔이 뻗어 나왔다. 역시 팔도 건조해서 뱀의 피부처럼 거칠었다. 작고 마른 겨울나무 같았다. 소녀의 손에는 쪽지가 들려있었다. 세라가 주춤거리자 소녀는 세라의 손에 쪽지를 쥐어주었다. 세라가 쪽지를 받아 드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소녀가 씩 웃더니 뒤돌아 사라졌다.
'333 NGK, 101A'
쪽지에 남겨진 주소는 비어있는 빌딩이었다. 세라는 거기서 천에 둘러싸인 아이를 발견했다. 울지도 않는 아이에게는 맞지도 않는 커다란 마스크가 덮여있었다. 공기는 그 마스크 옆으로 다 새어 들어오고 다시 새어나가는 듯했다. 아이를 살펴보기 위해서 보자기를 건드리자 사진 한 장이 옆으로 떨어졌다.
사진 뒤에는 갈겨 적은 듯한 글이 있었다.
'와 줘서 고마워. 네가 올 줄 알았어. 아이를 부탁해. 자연적으로 태어난 소중한 아이야. 이름은 무힙. 우린 다시 돌아올 수 없어.'
그리고 여러 해가 지난 지금 그 애는 방황하는 청소년기를 보내는 무힙으로 자랐다. 멸망해 가는 지구에서 떠날 수 있는 티켓을 쥐어준대도 싫다며 문을 쾅 닫고 들어가는 그 뒷모습을 보며 세라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마셨다. 몇 번이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다가 세라는 책장에 가서 휴대용 산소탱크를 꺼내 들었다. 산소마스크를 입에 대고 숨을 몇 번 쉬니 훨씬 머리가 맑아졌다. 머리는 맑아졌지만 그녀의 눈은 조금 붉고 촉촉해졌다.
재킷을 마구 털고 무힙이 집에 들어갔다. 내부는 화려하지 않았다. 여러 번의 수리를 했지만 아무래도 깔끔한 집안의 느낌은 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모두 오래된 집들밖에 남지 않아서, 이 정도 생활환경이면 감지덕지했다. 무힙은 수정호에서 차갑게 얼어가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차가운 건 이곳도 마찬가지이니까. 무힙은 매고 있던 그의 가방을 열어 몇 개의 식량을 꺼냈다. 배급받은 식량과 계란. 숨겨놓은 닭 몇 마리로부터 겨우 얻어낸 계란까지 포함해도 식량은 많지 않았다. 이전의 수정호에 타기로 한 친구가 남겨준 닭 몇 마리였다. 그들도 이걸 누구에게서 뺏어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언젠가부터 형제는 닭을 키우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젊은이들이 필요한 실험이 있다는 소식에 그들은 바로 우주선 티켓을 따냈다.
모든 실험의 결과는 100% 성공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지구를 떠나간 수정호만 해도 몇 백기이다. 그 많은 우주선에 동결된 사람들, 수없이 많은 유전자와 수정란, 동물의 것들까지 포함하면 어마어마한 그 많은 것들이 인류가 다시 살아갈 수 있다는 행성에 도착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뒤에 출발한 수정호가 더 높은 확률로 목적지까지 간다는 설이 있었지만 무힙은 낮은 확률에 자신과 세라를 거는데 자신이 없었다.
무힙은 알루미늄 같은 것으로 포장된 식량을 보며 한숨 쉬었다. 그 양은 작년보다 줄어들었다. 맛도 예전만 못했다. 그마저도 음식을 구하러 가는 길에 빼앗기지 않으려면 언제든 싸울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세라는 너무 약했다. 세라 말대로 정말 가용자원이 없는지는 모를 일이다. 누군가가 독점하고 있을 수도. 세라는 가끔 연구실에서 스낵 같은 것들을 가져와 조심스럽게 꺼내놓았다. 그러곤 무힙에게 누가 보지 않을 때 먹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내가 없으면 세라 혼자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세라는 늙었고 밥도 제대로 먹지 않았고, 자주 아팠다. 어린 시절에는 좀 더 짙은 갈색의 머리에 차가운 인상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그녀의 머리는 희끗희끗해졌다. 사십 대 후반의 세라는 세라의 할머니가 육십 대 때 찍은 사진의 외모와 비슷했다. 책을 펴고 안경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그녀가 몇 백 년이 걸리는 우주여행을 할 수 없다고 무힙은 단정했다. 세라는 지구의 환경이 좋지 않아서, 스트레스 때문에, 무힙을 키워내느라 빨리 늙어간다고 말했다. 하지만 무힙은 때로 환경 때문이 아니라 유전자 복제를 통한 번식의 한계라고 그녀에게 다그쳤다. 그러고 나면 세라는 '그런가? 어쩔 수 없지 뭐 네가 내가 아닌 게 다행인 건가? 자연적으로 태어난 소중한 젊은이?'이라는 말을 덧붙이곤 했다.
세라의 퇴근 무렵에 무힙은 늘 분주해졌다. 특히 먼지폭풍이 치는 날이면 더욱. 무힙은 매일 비슷한 시간에 세라를 데리러 가는데 매일 분주했다. 무힙은 한 블록 한 블록 주변을 경계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누런 잿빛의 먼지가 다시 청자켓의 파란 섬유 사이사이에 끼어들어갔다. 무힙은 먼지를 뒤집어쓰며 세라의 연구실로 다가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무힙은 오래된 전화박스 안에 들어가 서서 다가오는 세라를 한눈에 찾았다. 이제는 아무도 이 붉은 전화박스에 관심이 없지만 과거에는 관광지로 유명했다고 한다. 전화박스는 전화기로써는 더 이상 가치가 없지만 연구소 사람들을 기다리는 가족들의 쉼터로 쓰인다. 세라가 무힙을 발견하고 크게 손을 흔들었다. 마스크 뒤로 가려진 그녀는 환하게 미소 짓고 있으리라. 무힙은 이마부터 턱까지를 덮을 수 있게 디자인된 세라의 마스크를 보며 다소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고글과 마스크를 따로 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는 마스크의 필터 부분이 누레진 것을 보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어? 고마워." 오래된 공중전화박스 문을 열며 세라가 말했다.
"별로. 얼어서 기다려야 할 시간에 비교하자면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닐 거야." 무힙이 세라에게 약간 놀리듯 말했다. 수정호에 타면 반냉동상태로 목적지까지 이동해야 한다. 그 시간이 얼마나 길 지 알 수 없다.
"비꼬지 말고." 세라가 무힙을 한 번 째려봤다. 하지만 고글과 마스크에 가려 무힙은 그녀를 보지 못했다. 무힙은 여느 십 대와 같이 큰 사고를 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우주선을 타고 가는 동안 동면 상태에 들어가야 하는 것을 싫어했다. 가끔 던지는 시니컬한 무힙의 말에 세라는 늘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싸움의 끝은 늘 냉전이었다.
세라가 무힙을 보며 자신 있게 말했다. "그렇게 지루하지는 않을 거야. 알잖아. 동면한 동안 메타서버에 들어갈 수 있어. 거기도 작은 세상이 실재한다니까. 나는 메타에 들어가기에 꽤 늙었어. 하지만 무힙.. 너는.. 할 수 있어. 이번에 출발하는 수정호부터는 메타를 본격적으로 적용할 거야."
무힙은 세라가 메타에 대해서 설명하자 쳐다보지 않고 걸음을 빨리했다. 그러다 세라를 한참 앞서 걸을 무렵 잠깐 세라를 돌아봤다. 그의 얼굴이 먼지바람에 흐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몇백 년을 가짜세상에 갇혀 사는데 정말 지루하지 않아?" 무힙이 왠지 슬프게 말했다.
"지루하지 않아." 세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뒤돌아서 다시 걸으려는 무힙의 팔을 붙잡고 세라가 말했다.
"알프레도가 메타버전을 최신으로 업데이트했어. 그의 생애에 엄청난 발전이 있었어. 내가 네가 지금이 지구를 떠날 시간이라고 말하는 건 모든 것이 준비되었기 때문이야. 내 평생을, 내 어머니의 평생을, 그 어머니의 평생을 바쳐서 만들어낸 결과야." 세라는 강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무힙이 대답 없이 서있자 세라가 덧붙였다. "모르지 않잖아." 그녀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냉장고에 들어간 채 가짜세상을 헤매는 실험실 사람들로부터 얻은 발전이겠지. 연구소가 고귀한 희생이라고 포장하는 거" 무힙은 여전히 완강했다. "죽음이잖아. 끝."
세라는 무힙을 바라보다. 잡고 있던 그의 팔을 놓고는 집을 향해 앞서서 걸었다. 터벅터벅 걷는 발걸음 소리는 바람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미안." 무힙이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라가 없잖아."
세라는 무힙의 말을 듣고 멈춰 섰다. 무힙은 한 때 세라의 뒷모습이 넘을 수 없는 큰 산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산은 시간이 갈수록 작아져서 어느덧 무힙보다 한 뼘은 자그마해졌다. 세라는 걸으며 코를 훌쩍거렸다. 그녀의 측만증은 악간 오른쪽 어깨를 낮아지게 했는데, 그날따라 그녀의 치우친 걸음걸이는 무힙의 신경을 긁었다. 그러고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길 위의 쌓인 쓰레기들은 미라가 되어 말라비틀어져갔다. 때로 잡초들이 자라 나왔지만 역시 금방 색을 잃어버렸다. 무힙의 친부모의 피부는 지금 무힙의 것보다 훨씬 다채로운 색이었다. 무힙은 자신이 색을 잃고 바래어져 가는 것 같았다.
"널 절차대로 입양했어야 됐어." 세라는 집으로 들어서며 협탁 위의 사진들을 보며 말했다. 세라의 할머니, 어머니, 세라가 같이 찍은 사진과 무힙의 친부모님의 사진이었다. 세라의 사진첩에는 하얀 피부의 그녀와 더 흰 피부의 그녀의 엄마, 할머니의 사진들이 있었다. 세 사람은 매우 닮았다. 지금의 세라는 세라의 할머니와 어머니 사이 그 어딘가 정도로 나이 들어 있었다. 같은 유전자를 가졌으니 닮을 수밖에. 하지만, 무힙은 달랐다. 무힙은 부모님을 기억할 수 없었고, 사진도 단 한 장뿐이었다. 뒷면엔 아이는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이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겨우 한 줄의 메시지와 함께.
"입양하면 뭐. 지금도 잘 살고 있잖아. 그리고 아마 결과도 비슷하지 않을까?" 무힙이 말했다.
"네게 정당한 신분이 있었다면, 연구소에서 일할 수도 있고. 필요하다면 이전에 떠난 수정호에 이미 타서 새로운 터전을 찾아서 떠나고 있을 수도 있잖아." 세라가 말했다.
"어쩔 수 없잖아. 내가 싫어서 안 간걸." 무힙이 말했다.
"그래도 무힙. 홀로그램 속에서는 원하는 만큼 헤엄치고 달릴 수 있어. 오 년 전에 안 떠나고 지금 가는 게 훨씬 나을 거야." 세라가 말했다.
"수영은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긴 한데. 지난번에 도망쳐서 다시는 안태워준다며. 나도 탈 생각 없어." 무힙이 말했다.
세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신분이 완전하지 않은 무힙을 우주선에 태우기 위해서 세라는 모든 것을 걸 수 있었다.
"알다시피 빅토리아가 철수 발표했잖아. 일 년 내에는 여기 꼭 떠나야 해." 세라가 옷가지를 정리하며 말했다.
소파에 푹 앉은 무힙이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빅토리아를 따라 했다. "우리는 모든 가능성을 시뮬레이션했습니다만, 더 이상 가용할 자원이 없음을 밝힙니다. 연구 시설과 모든 연구원 및 가족은 1년 이내에 지구에서 철수합니다."
세라가 어이없다는 듯 픽 웃으며 말했다. "너 정말 똑같은데. 빅토리아랑. 무섭다 따라 하지 마."
1년 이내에 연구시설이 철수한다는 것은 남은 사람들을 버리겠다는 이야기였다. 인류에 가장 필요한 사람으로 분류된 세라는 살 확률이 높다. 과학자들은 우선으로 선별해야 새로운 세상에도 잘 적응할 수 있을 것이라나. 과학자들은 우주선이 유영하는 동안에도 실험을 진행할 수 있고 중간중간 동면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세라는 자신의 지위를 무힙에게 상속해 줄 수 없었다.
"엄마. 나도 가끔은 무서워." 무힙이 말했다.
세라는 5년 전 실험에 참여하는 것을 조건으로 무힙을 수정호에 승선시켜 줄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무힙은 몇 번이고 그 제안을 거절했다. 거의 직전까지 절차를 진행하던 중 무힙이 사라져 버렸다. 그것도 2주간이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죽어나가는 세상에서 2주간의 부재는 죽음을 의미했다. 세라가 컴퓨터에 떠오른 데이터를 확인하는 동안 한 동료 수재가 세라 옆으로 바싹 다가섰다. 그리고는 "일주일 넘게 애가 집으로 안 들어온다면서요? 아. 걔는 이제 애가 아닌가요?? 2주나 실종이라면 곧 상 치르겠네요."
세라는 어이없다는 듯 수재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이를 찾지 못했는데 어떻게 장례를 치를 수 있나요? 그리고 다시 돌아올 거예요." 세라는 지쳐서 말했다.
수재는 다시 "2주나 실종 상태면 거의 죽은 거나 다름없지. 죽었대도 찾으러 갈 수 없잖아. 애 찾으러 다니다가 우리 같은 사람들은 거리의 사람들에게 잡혀가거나 살해당하거나 고문당한다고. 그 애를 몇 년 동안이나 더 키워줄 거야?"라고 되받아쳤다. 그는 때로 위로인지 유머인지 비난인지 방향을 알 수 없는 어떤 것들을 뿜어냈고, 그날은 세라를 향해 그것들이 날아들었다.
"무힙은 내 가족이야." 세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희고 얇은 보호복이 바스락 소리를 냈다. 수재보다 키가 큰 세라가 수재를 내려다보았다. 수재는 자신의 툭 불거진 배를 몇 번 두드리며 세라의 어깨를 토닥였다. "어이구. 미안. 미안해. 앉으라고." 세라가 수재에게서 눈을 떼고 모니터를 응시하자 수재가 말을 이어나갔다.
"흠.. 그런데 무힙이 네 가족이라는 말은 맞지 않지. 아무튼 법적으로 네 가족이 아니잖아. 수정호 2218호에 태울 수 있나? 네 가족이라면 태울 수 있을 텐데." 그는 비아냥 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웃으며 덧붙였다. "아무튼 열심히 하라고, 근데 이걸 열심히 한다고 해서 승선했을 때 좋은 포지션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네 어머니가 끝내지 못한 일을 열심히 하기보다는 센터장이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게 좋을 거야."
그의 시선이 실험실 밖 창문을 향했다. 단발머리의 아이가 그들에게 오라는 듯 손짓했다. 연구센터의 장 빅토리아였다. 비록 겉보기에는 열 살 정도의 소녀로 보이지만 사실 그는 몇 백 년간 이어진 연구 내용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유전자를 복제하고 그에게 직업과 소명을 물려주는 일은 흔했지만, 센터장은 조금 달랐다. 이전의 센터장과 똑같았다. 전대의 센터장과 비슷한 말을 하거나 세라와 이전 센터장의 대화도 기억하는 어린아이가 세라는 왠지 불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