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인연
9장. 인연
나는 유독 피천득의 에세이 『인연』을 좋아한다.
고3 시절, 문학 선생님은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항상 칠판에 한 줄씩 문장을 적어 주셨다.
특별히 아끼는 구절들은 종이에 프린트해서 나눠주시기도 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 종이를 무심하게 교과서에 끼워놓거나, 잃어버리거나, 아예 버리기도 했지만—
나는 아니었다.
그 문장들이 좋았다.
어쩌면, 1988년에 태어나서
60만 명의 수험생과 경쟁해야 했던 고3의 나를 버티게 해 준 건
바로 그런 문장들이었는지도 모른다.
문학 수업 시간은 고된 고3 생활 속
작은 안식처였다.
매 수업마다 받아 적은 글귀들은 내 다이어리에 남겨졌고,
그렇게 쌓인 말들은 나의 세계관이 되었고, 삶의 기준이 되었다.
***
그리고 8년 뒤,
나는 그 학교에, 바로 그 교실에, 다시 섰다.
이번엔 ‘학생’이 아니라, **‘교생 선생님’**으로.
스물일곱 살의 나는, 꽃같이 예쁜 우리 반 학생들에게
조례 시간마다 고3 시절 내가 기록했던 문장들을 똑같이 칠판에 적어주었다.
나의 은사님, 문학 선생님처럼.
마지막 조례 시간.
아쉬운 교생 실습의 끝에서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아끼는 문장 하나를 남겼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 피천득, 『인연』
그 말을 칠판에 남기던 그 순간에는 몰랐다.
그 문장이 앞으로도 얼마나 오랫동안
내 삶의 순간들을 관통하게 될지.
****
다시 6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지구 반대편, 낯선 도시 밴쿠버에서
나는 다시 그 문장을 떠올린다.
‘언제 헤어질지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
만나고, 스치고, 사랑하고, 놓아야 했던 사람들.’
한국에서는 만날 수 없었을,
나에게 귀인이었던 사람들.
나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준 사람들,
그리고 내 안의 상처를 건드린 사람들까지.
좋았든 아팠든,
그 모든 인연을 통해
나는 많이 배웠고,
여전히 배우는 중이다.
"그 용기 덕분에 나는 새로운 사람들과 마주했고,
내가 몰랐던 나를 마주했다.
그래서 누군가 이 시기에 유학을 하겠다고 말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말할 것이다.
“도전해.
힘들겠지만, 그만큼 넌 너를 더 잘 알게 될 거야.”
이 유학생활이 내게 준 건
자격증이나 외국어 실력보다 훨씬 더 크고,
**뜨거운 인생의 ‘경험’**이었다.
목이 간질간질하거나,
기침이 조금만 나도
곧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
‘설마 코로나?’
만약 내가 진짜 코로나에 걸린다면,
검사는 어떻게 받고, 치료는 어디서 받아야 할까.
도와줄 가족도, 말 한마디 놓을 사람도 없는 이곳에서
그냥 혼자 아프다 죽으면… 어쩌지.
나는 매일 같은 바람을 되뇌었다.
“귀국하는 날까지만, 제발 건강하자.”
그러다 문득,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톡, 하고 올라왔다.
한국에 있는, 나의 소중한 인연들.
직접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문자로 걱정해 주고, 말없이 생각해 주는 사람들.
그들의 마음이 있어서
나는 덜 외롭다.
한국에 있는 나의 인연들도
2020년의 어려운 순간을 견디고 있겠지.
나처럼.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다시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 피천득
나는 그 구절을 조용히 읊조린다.
“내 인연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나처럼 살아내고 있을 거야.”
외롭고 고립되었던 시간이 조금씩 풀리면서
주변 사람들과 다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내 삶도, 내 감정도,
조금씩 다르게 변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