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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게 걷기 Sep 18. 2020

스타벅스와 몇 가지 상념

  텔레비전에서 집을 정리하고 공간을 새롭게 구성해 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오늘 출연한 가족은 정은표 배우 가족이다. 초등학교 때 몇 번 방송에서 얼굴을 봤던 그 집 아이들은 이제 키가 훌쩍 커서 고등학생과 중학생이 되었고 보기만 해도 미소를 짓게 하는 늦둥이도 생겼다. 그 집에는 대가족이 사는 집답게 살림살이들이 포화상태이다. 문을 열 때마다 물건들이 쏟아질 듯하고 방과 거실에도 물건들이 가득 차 있다. 아마 이사를 가지 않고 10년 가까이 한 집에서 살았으니 살림살이는 점점 더 늘어났을 것이고 어느 순간 정리하려는 생각을 포기했을 것이다.


  중간에 정은표 배우가 공부를 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는 유아용 의자 위에 택배 상자를 올려놓고 그 위에 태블릿 PC를 올려서 공부할 공간을 만들었다. 옆에는 건조대가 윙윙 돌아가고 있고 건조대에는 속옷과 양말 등이 여기저기 걸려 있다. 그 앞에 작은 캠핑의자를 가져다가 앉아서 그는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문장은 'I came Starbucks in the morning"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나는 아침에 스타벅스에 갔습니다."라는 문장을 반복적으로 읽고 있는 것이다.


  집 근처에 스타벅스가 있다. 나는 휴가나 주말에 가끔 스타벅스를 간다. 스타벅스에 가면 책을 읽기도 하고 수첩에 글을 끄적거려 보기도 한다. 물론 자주 가지는 못한다. 생각날 때마다 가기에 스타벅스 가격은 꽤 비싼 편이다. 물론 나는 샌드위치나 케이크는 주문하지 않는다. 스타벅스에서 이것저것 자유롭게 주문해서 먹을 정도로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타벅스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으면 나는 꽤 만족스러운 기분이 든다. 매장에는 재즈나 뉴에이지 계열의 음악이 은은하게 흘러나오고 넓은 공간은 쾌적하고 아늑하게 꾸며져 있다. 나는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받자마자 뚜껑을 열어서 크레마를 확인한다. 그리고 입술에 크레마를 묻히고 맛을 보면서 그 쌉싸르함에 만족스러워진다.


  그럴 때  나는 스타벅스보다 스타벅스에 앉아 여유를 즐기고 있는 내가 좋아진다.


  그런데 그토록 좁고 옹색한 공간에 자신을 욱여넣고 공부를 하고 있는 그의 입에서 스타벅스라는 단어가 나오다니 아이러니하다.  


  어른은 전지전능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다. 그때 내가 본 어른들은 지갑에서 돈을 꺼내서 사고 싶은 걸 마음껏 사고 차를 운전해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하루 만에 갔다 오기도 하는 슈퍼맨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나도 어른이 되면 내가 갖고 싶은 걸 마음껏 사고, 하고 싶은 걸 다 하면서 살아야지' 생각했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나면 어른의 삶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직도 세상일에 서투르고 바보처럼 속임수에 당하기도 하고 가끔은 엉뚱한 실수를 해서 웃음거리가 되기도 한다. 몇 천 원 할인을 더 받겠다고 쇼핑몰 쿠폰 사이트를 여기저기 클릭하느라 녹초가 되기도 하고 스타벅스 갈 때도 한번 더 고민하고 들어간다.


  그래서 오늘 그 장면에서 나는 몇 번이나 눈물이 나려고 했다. 그가 한 말 중에 '30년을 배우 생활을 했는데도 사는 게 이렇네요.'라는 말이 있었다. 20년을 직장생활을 했는데도 사는 게 아직 이렇다.


  그런데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너무 불쌍하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저는 그것만으로도 너무 좋았습니다"

그가 불쌍하게 느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삶이라는 거대한 파도 위에서 묵묵하게 그가 항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촬영하기 전에 감추고 싶은 것을 감추거나 치워 놓았을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진정으로 자신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나에게는 아직 부끄러운 부분이 많다. 그것을 무언가로 덮어서 완전히 다른 것처럼 포장하고 싶다고 느낄 때도 있다. 그러나 나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 지금 이 자체만으로도 즐겁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는 여전히 스타벅스를 가끔 가고 싶어 할 것이고 그런 나의 작은 허세에 만족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조금씩 진짜 어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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