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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게 걷기 Sep 10. 2020

당연한 권리를 쓸데없이 미안했다

  재택근무를 하면서 직원들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다.  김 차장은 책으로 빽빽한 서재에서 화상회의에 접속한다. 집에서 책을 읽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는데 놀랍고 재미있다. 최 과장은 화상회의를 하면서 보니 코를 벌름거리는 습관이 있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그의 콧구멍을 볼 때마다 화들짝 놀라고 불편하다. 팀장 벽에는 톨스토이 일러스트가 의외라는 듯이 걸려 있다. 팀장이 톨스토이의 을 읽었을 거라고 상상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는 이성과 감성 사이의 줄다리기 따위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어쨌든 회사에서 보는 사람들의 모습과 집 안 내부를 배경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딘가 다른 느낌이다.


화상회의를 하고 있을 때였다. '엄마 뭐해?"라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마치 일부러 훼방을 놓는 것처럼 팀장이 발언을 할 때마다 줄기차게 '엄마 뭐해? 엄마 저 사람 누구야?'라는 질문을 했다. 그 목소리에 당황한 것은 정작 아이의 엄마인 윤 과장이 아니라 나였다. 나는 아이를 빨리 밖으로 내보내야 할 텐데 어떻게 하나 걱정했다. 팀장은 참을성이 없다. 자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말을 잘라 버리면 얼굴이 달아오르는 성격이다. 그리고는 이내 기분 나쁜 눈빛을 강렬하게 보낸다. 그런데 지금 회의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여러 차례 끼어들고 있으니 다들 팀장의 반응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의 엄마인 윤 과장은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그리고는 잠시 후 아이를 무릎 위로 안아 올렸는지 아이의 얼굴이 화면에 들어왔다. 아이는 뭔가 엄마에게 심통이 나서 입술을 쑥 내밀고 있다.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머리를 짧게 자른 아이는 회의에는 관심도 없고 오직 엄마가 빨리 회의를 끝내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눈치다. 결국 팀장은 하하하 웃더니 오후 회의에서 남은 얘기를 하자고 회의를 끝냈다. 생각했던 것처럼 상황은 이상해지지 않았고 팀장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회의에 얼굴을 삐죽이 내민 아이 얼굴은 모처럼  미소를 짓게 했다.  


 나는 서울로 발령을 받으면서 임신 사실을 숨겼다. 나중에 팀장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일부러 힘든 일을 도맡아서 했다. 본사 회의에 직접 참석하기 위해서 장거리 운전도 했다. 무거운 짐을 옮겨야 할 일이 생기면 도움 없이 어떻게든 혼자서 해결을 했다. 그렇게 팀장을 겨우 우호적으로 만들었는데  조직개편이 되면서 팀장이 바뀌었다. 새 팀장은 젊은 여직원 있으면 팀 전체가 고생한다는 말을 들으라는 듯이 했다. 이래저래 임신한 직원은 조직에 피해를 주는 존재로 인식되던 시절이었다. 나는 무거운 몸으로 출근을 하고 퇴근한 날 밤에 아이를 낳았다.  

 

 집은 회사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배기에 있는 복도식 아파트였다. 가지고 있는 돈이 넉넉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아파트도 감지덕지였지만 외벽 페인트가 얼룩덜룩 다 벗겨진 낡은 아파트였다. 그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삶에 지쳐 있었다. 그들은 길에서 심하게 싸우거나 울기도 했다. 밤이면 동네는 을씨년스럽게 변했다.


 나는 그 아파트에 정을 붙이기 힘들었다. 그래서 아이를 포대기에 업고 자주 밖으로 나왔다. 아이를 데리고 동네를 걷다 보면 회사 건물이 보였다. 그때마다 나는 불편하고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아빠조차도 나에게 출산휴가 3개월은 너무 긴 거 아니냐고 했다. 나는 바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몸이 다 회복되었는데 병가를 쓰고 집에서 꾀병을 부리고 있는 사람이 된 것처럼 마음이 무거웠다.


 하루는 날을 잡아서 직원들에게 줄 김밥을 만들었다. 시금치를 데치고 계란을 두껍게 넣은 김밥을 만들어서 사무실에 가지고 갈 생각이었다. 아이를 떼놓고 갈 수는 없어서 아이를 포대기에 업은 처량 맞은 행색을 하고 출산휴가 기간에 굳이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 날 김밥이 맛이 있었는지 직원들이 좋아했는지 그런 건 기억 속에 없다. 그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아이를 들쳐업고 도시락통을 들고 가던 초여름의 골목과 회사 앞에서 망설이다가 들어가던 그 순간의 머뭇거림만 기억에 남아 있다.


 3개월의 출산휴가는 법적으로 보장된 온전한 나의 권리였다. 미안해할 필요도 불편해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중요한 순간마다 미안하지 않은 일에 미안하면서 살아왔다.


 이제 조금 당당해져도 괜찮지 않을까. 내가 나에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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