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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게 걷기 Sep 21. 2020

자동차를 가까운 곳에 주차하지 못하는 이유

부자들이 사는 법 1


  퇴근하고 들어온 남편이 차를 가까이 주차하지 말라고 한다.

"차를 동 바로 앞에 주차라인에 주차하지 말고 210동 앞에 있는 공간에 주차해"

"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 우리 동에서 우리 차가 제일 고물차야. 그러니까 최대한 멀리 세우라고"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58평이다. 이 집을 구할 때도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았으며 또 얼마나 바보짓을 하고 다녔는지 모른다. 남편과 나는 둘 다 물러 터져서 한 번씩 바보짓을 하고야 만다.

   

   우리는 서울에 살다가 경기 남부의 학군이 좋은 동네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학군이 좋다는 것도 매력적이었지만 (그때는 아들이 공부를 곧잘 했다) 더 중요한 것은 아들이 그곳으로 이사 가는 것을 간절하게 원했다.


  어느 날 아이는 무조건 이사를 가고 싶다고 했다. 가고 싶은 곳도 아이는 이미 정해 놓은 상태였다. 사촌동생이 살고 있어서 가끔 놀러 가던 도시였다. 당시 아들의 담임선생님은 모둠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그 모둠이 과제가 미비하거나 태도가 좋지 않으면 단체로 벌을 주는 방식으로 교육을 했다. ADHD 때문에 손으로 하는 과제 수행이 느린 아들은 곧잘 속도가 뒤쳐졌고 아들 덕분에 모둠 전체가 벌을 받는 일이 계속되자 아이들은 아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아들은 새로운 곳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싶어 했고 아들의 진지한 태도 때문에 우리는 이사를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이사를 결정하고 나니 집을 구하는 게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학군이 좋은 동네에서 방학을 전후해서 전셋집을 구하는 것은 전쟁이었다. 남편의 직장은 광화문이었다. 물건이 나왔다는 말을 듣고 광역버스를 타고 출발하면 조금 전 계약이 성사되었다는 전화가 왔다. 물건이 없으니 사람들은 집도 보지 않고 경쟁적으로 계약을 했다. 이런 일이 몇 번 더 반복되자 우리는 초조해졌다. 아이가 중학교를 배정받으려면 전입신고를 해야 하는 기한이 있었다. 그 날짜는 점점 다가오는데 우리는 한 달이 넘도록 집을 구경도 못하고 바로 앞에서 놓쳐버리는 것이었다.


   부동산 사장이 그러지 말고 58평 물건이 있으니 한번 보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34평을 구하고 있었으니 58평을 구경하는 것은 생각도 못 해본 일이었다. 부동산 사장은 34평과 58평의 전세 가격이 똑같으니 구경이나 해 보자고 했다.  우리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58평 집으로 들어갔다. 집은 구조가 특이하고 복도도 있었다. 거실에는 딱 봐도 비싸 보이는 도자기 같은 것도 있고 가구들도 엄청 고급스러워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역시 관리비가 문제였다. 부동산 아줌마는 아는 사람이 마침 그 동에 살고 있으니 전화해서 확인을 바로 해 주겠다고 했다. 아줌마는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친한 사이인 듯 몇 마디 인사말을 하더니 바로 관리비를 물어봤다. " 그러니까 이번 달은 아직 안 나왔고 지난달은 38만 원 나왔다는 거네요. "


설명은 이랬다. 아시다시피 이 동네는 아파트가 낡아서 관리비가 많이 나온다. 30평 대도 관리비가 20~30만 원은 나올 거다. 그렇게 따지면 한 달에 10만 원 정도 더 부담하고 있는 건데 그냥 반전세 10만 원 더 내고 산다고 편하게 마음먹고 넓은 데서 살아 봐라.


  그래도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는 일단 생각 좀 해 보고 다시 오겠다고 하고 부동산을 나왔다. 이미 허기는 걷잡을 수 없는 상태였다. 생각해 보니 아침부터 먹은 게 없었다. 일단 눈 앞에 보이는 중국집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둘 다 짬뽕을 주문했다. 잠시 후 짬뽕이 나왔는데 해물이 듬뿍 들어있는 수타짬뽕이었다. 하루 종일 추운 데서 떨고 다니느라 우리는 둘 다 몸이 얼어 있었다. 추운 몸이 녹기 시작하자 맥이 탁 풀렸다. 처음에는 58평으로 이사를 간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더운 음식이 뱃속으로 들어가자 뭔가 느긋해진 기분이 들었다. 남편이 먼저 말을 꺼냈다.

" 미친척하고 거기로 계약할까?"

남편의 미친 소리에 나는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생애 처음으로 58평 아파트에 전셋짐을 부리게 되었다.


  우리가 이사 간 동은 부자들만 사는 동이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아침에 출근하려고 엘리베이터를 타면 골프웨어를 입은 이웃들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60대가 훌쩍 넘어 보이는 여자들도 운동으로 단련된 근육을 뽐내며 골프백을 들고 다녔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는 할머니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구찌를 입고 있었다. 우리는 그 할머니를 '구찌 할머니'라고 부르기로 했다.


   한 번은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가 "혹시 자가예요? 전세예요?"라는 질문을 했다. 무례하다는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내 입에서는 전세라는 대답이 자동적으로 나갔다. 그는 역시 짐작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의 설명에 의하면 이 동에 사는 사람들은 입주 당시, 그러니까 25년 전에 같이 입주해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 가족 같은 관계의 이웃이라는 것이었다. 서로 자녀들의 근황도 다 꿰고 있을 지경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동에는 헌법재판관으로 퇴직하신 분도 살고 있고 S전자 부사장도 살고 있다고 했다.  어쩐지 이웃 주민들은 지나치게 고상하고 지나치게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이 동에 사는 사람들은 마트에서 장을 보면 동 바로 앞에 차를 대고 트렁크를 탁 열었다. 그러면 경비 아저씨가 커다란 손수레를 끌고 와서 그 짐을 착착착 보기 좋게 손수레에 싣고 끌고 갔다. 경비 아저씨는 그 손수레를 끌고 가서 엘리베이터 앞에까지 옮겨다 놓았다. 주민은 그 손수레를 끌고 올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 것도 우리의 정서와는 맞지 않는 행태들이었다.

   

    우리 동을 나오면 바로 앞에 차를 8대 정도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거기에 주차를 하게 되면 출근할 때 시간을 꽤 단축할 수 있다. 집에서 나와서 바로 차로 뛰어들어 가면 되니까 말이다. 그런데 남편이 나에게 주차를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곳에 주차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 나는 차에 대해서 좀 무지하다. 그래서 그냥 어떤 차가 비싼 차고 좋은 차인지 잘 구분을 못한다. 그저 외제차를 뒤에서 박으면 끝장이라는 생각으로 외제차 정도는 구분을 한다. 그런데 이 동에 사는 사람들은 집집마다 외제차를 2대씩 굴렸다. 동 앞 주차공간에 외제차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고 나중에 남편이 그 차들이 외제차 중에서도 아주 비싼 외제차라는 걸 알려주었다.

 

  사실 내 차는 13년인가 15년 된 구형 소나타였다. 그 차는 왼쪽 조수석 문에 스크래치가 좀 있기도 하고 아무래도 연식이 연식이다 보니 세월의 티를 물씬 풍기는 차였다. 그런데 내가 차를 외제차 사이에 떡하니 주차하고 올라왔더니 남편이 정색을 하는 것이다. 굳이 여기에 세우고 올라오지 말고 동 뒤편에 주차장에 세우라는 것이다.  경비 아저씨가 되었든 주민이 되었든 우리 차종이 뭔지 아는 것도 싫고 이 동에서 우리만 전세 사는 것 같은데 굳이 고물차를 알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그 말을 듣고 나는 남편한테 짜증을 냈다.

" 당신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웃긴다. 그렇게 할 필요가 뭐가 있어? 내가 당당하면 되는 거 아냐?"

 남편의 속물적인 근성과 알량한 자존심이 유치하다 싶었다.


  그런데 얼마 뒤 자동차 정기검사를 받으러 갔다가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검사를 마친 아저씨는

"차가 좀 찌그러지고 해서 끌고 다니기 쪽팔려서 그렇지 아직 쌩쌩합니다."라고 활짝 웃었다.

나는 차를 돌려 나오면서 기분이 묘했다. '뭐지? 이 차가 쪽팔릴 정도야?'


     그래서 나는 차를 가까운 곳에 주차하지 않고 멀리 주차하기로 마음먹었다. 생각해 보면 남편의 말도 꽤 일리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가까운 곳에 주차 공간이 있어도 돌아 나가서 210동 앞에다 주차를 했다. 나는 꽤 용의주도했던 것 같다. 새로 바뀐 경비 아저씨도 내 차가 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퇴근을 하고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데 누가 벨을 눌렀다. 경비실 아저씨였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아저씨는 비가 이렇게 오는데 차에 창문을 다 열어 놓으면 어떻게 하냐고 어서 가보라고 했다.

나는 순간 당황했다.

" 제 차라니요? "

" 그 저쪽 210동 앞에 서 있던데. 회색인가 쥐색인가 소나타 아니여?"


그렇다 아저씨는 알고 있었다. 나는 용의주도하지 못했고 심지어 솔직하지도 못했다.

나는 나 자신과 아저씨 모두에게 민망해하면서 슬리퍼를 끌고 뛰어 나갔다.

내 손에는 소나타 열쇠가 일없이 달랑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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