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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게 걷기 Sep 29. 2020

남편의 중고 거래


  남편은 한동안 중고거래를 하지 않았다. 전자사전을 싸게 사려고 덜컥 입금부터 했다가 사기를 당한 후부터 중고거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때 남편을 속인 사람은 카톡에 아이를 안고 있는 사진을 메인으로 올려놓았다. 나중에야 그게 사기꾼의 전형적인 수법 중 하나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때는 아이 얼굴을 공개적으로 올릴 정도라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철석같이 믿었다. 그 후로 남편은 중고거래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남편은 또다시 중고거래를 하려고 한다. 그것도 끝방 총각 때문에 말이다. 여기에서 끝방 총각은 우리 집 끝방에 기거하는 아들이다. 나는 아들을 마음속으로 끝방 총각이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니까 정당하게 숙식하는 비용을 지불하고 공식적으로 세 들어 있는 귀한 손님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웃긴 얘기지만) 벌써 쫓아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손이 많이 갔던 아들은 키우기가 유난히 힘들었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ADHD 때문에 집중력이나 사회성이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이 녀석은 나이에 비해서 공감능력이나 이해심도 턱없이 낮다. 가끔은 농담에 정색을 하고, 사소한 일에 화를 내기도 한다. 아들과 논쟁을 하게 되면 나는 아득한 사막으로 떠밀려 가는 기분을 느낀다. 그럴 때 나는 사막에서 얼굴에 모래바람을 맞고 서 있는 것 같다. 그래도 그냥 참고 눈을 감고 서 있을 뿐 나는 바람을 맞서서 걷거나 도망갈 수도 없다. 그런데도 바람이 잦아지기만 하면 나는 그 모래바람을 금세 잊어버리고 다시 사막으로 뛰어들어간다. 부모란 그런 존재인 것 같다. 아이한테 실망하고 눈물이 날 정도로 화가 났다가도 금세 그런 것쯤 다 잊어버릴 수 있는 존재다.




   아이는 한동안 통기타에 빠져 있다가 얼마 전부터 전기기타를 갖고 싶어 했다. 전기 기타를 사려면 앰프도 구매해야 하니 어림잡아 계산해 봐도 금액이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성적이 겸손한 학생이라고 하더라도 이제 공부를 슬슬 시작하는 흉내라도 내야 할 나이다. 그런데 공부에는 소질도 관심도 없는 데다 노력도 하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 있는 모습을 보면 울화가 치미는데 남편은 그새 또 마음이 약해졌다. 저렇게 갖고 싶어 하니까 구해 주고 싶은 모양이다.



   남편은 중고 기타 직거래를 하기 위해 조금 전 출발했다. 남편은 혹시 판매자에게 에누리를 부탁할까 어젯밤 내내 고민을 했다. 문자를 몇 번이나 썼다가 지웠다가 고민을 한다. 뭐가 그렇게 어렵냐는 나의 말에 남편의 얼굴은 금세 민망한 표정으로 바뀐다. 중고 거래하면서 깎아 달라고 하는 거 좀 없어 보이던데. 나의 말에 남편도 수긍을 하는 눈치다. '괜히 깎아달라고 간을 보다가 좋은 물건을 놓칠 수도 있겠지' 남편도 동의한다.  거래를 하기 전부터 저렇게 진을 빼고 있는 걸 옆에서 보기만 해도 한심하다 싶었다. 그렇게 저녁 내 남편의 마음을 심란하게 했던 기타 판매자는 결국 남편에게 기타를 팔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남편은 아침부터 신이 났다. 평소 같았으면 늘어지게 늦잠을 잤을 텐데 아침 일찍부터 머리를 감고 드라이를 하고 있다. 콧노래도 흥얼거리는 모양새가 기분이 산뜻한 데다가 곧 마주할 기타에 벌써부터 들떠 있는 모양이다.


" 판매자가 어디 사는 사람인데?"

나의 말에 남편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한다. 뭔가 구린 게 있는 거다. 나의 추궁에 남편은 말문을 연다. 그리고 판매자가 사는 곳은 김포라고 실토를 한다. 우리가 사는 곳이 경기 남부니까 우리 집에서 김포까지는 안 막힐 때 가더라도 1시간 30분은 잡아야 하는 거리다.

"판매자가 중간에서 만나자고 배려를 해줘서 여의도에서 만나기로 했어. "

 우리 집과 김포의 중간 지점이 여의도일 턱도 없지만 여의도까지 중고 기타를 사기 위해서 간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린가 싶었다. 그럴 바에 그냥 새 기타를 사라는 내 말을 남편은 가볍게 무시하고 기어이 집을 나선다. 오히려 요즘 너무 답답해서 드라이브를 하고 싶었던 참인데 잘 되었다고 하면서 말이다. 드라이브를 하려면 양평이나 강원도 쪽으로 빠져서 달려야 맛이지 도심 한복판으로 드라이브 간다는 게 말이 되냐고 뒤에서 구시렁거리는데 남편은 내 잔소리쯤 가볍게 무시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현관을 나선다.


   내가 마포 부근으로 출장을 자주 가그쪽 도로 상황은 빠삭하다. 그쪽으로 가는 길은 종종 지옥으로 변한다. 광명으로 빠지는 외곽으로 가게 되면 40킬로미터를 가뿐히 넘는 거리를 달려야 할 것이고 시내를 통과한다면 차에서 하염없이 앞 차 꽁무니만 바라봐야 하는 지옥을 경험하게 하는 구간이다. 한 번씩 출장을 갔다 오면 멀미가 날 정도로 지긋지긋한 그 길을 중고 기타를 사기 위해서 가뿐히 출발을 한 남편이 어처구니가 없다.


    얼마 후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남편의 목소리는 한 톤 높다. 판매자는 50대 남자였고 기타는 생각보다 상태가 좋다고 했다. 기타 아저씨는 딸이 졸라서 기타를 사줬는데 몇 번 연습도 않고 싫증을 내서 내내 방구석에 처박혀 있었단다. 멀리까지 고생스럽게 갔는데 기타의 상태가 거의 새 상품에 준하는 상태라는 것에 남편은 신이 난 모양이다. 게다가 판매자 아저씨는 아들을 위해서 그 먼 거리를 한달음에 달려간 남편의 부성애(?)에 감동해서  만원을 깎아줬다고 한다. 남편은 멀리까지 가서 생각보다 좋은 컨디션의 기타를 획득했음은 물론 예상치도 못했던 할인까지 받고 당당하게 돌아오고 있다. 목소리를 보아하니 전쟁에서 전리품을 획득한 군인같이 의기양양한 기세다.



      

   기타 아저씨의 상황이 짐작이 간다. 우리 집에도 그렇게 해서 구매한 천체 망원경이 있다. 심지어 그 천체망원경과 함께 입을 수 있는 과학자 가운도 있다. 아이는 처음 망원경을 받고 나서 몇 번 밤하늘을 본다고 들고 나가더니 곧 흥미를 잃었다. 이제 아이는 망원경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렸고 망원경 위에는 아이 실내화 가방이나 츄리닝이 걸려 있었다. 망원경을 사 주면 하늘을 보고 별을 보면서 꿈꾸며 성장하기를 바랐는데 그것도 결국 나의 부질없는 욕심에 지나지 않았다.  



  곧이어 남편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커다란 기타 가방을 들고 있다. 끝방 총각도 방에서 나온다. 아이는 수줍고 행복해서 웃음을 참지 못한다. 한동안 보지 못한 아들의 기분 좋은 웃음이 얼굴을 가득 뒤덮고 있다. 나도 모르게 슬금슬금 구경을 하러 다가간다. 이럴 때 아니면 저 아이 얼굴에서 저런 웃음을 언제 볼 수 있나 싶다.
아들은 기타를 어깨에 메어본다.



   남편은 오늘 종일 종횡무진했다. 중고 기타를 사러 여의도로 갔고 앰프를 사러 분당으로 갔고 기타 줄을 갈고 음을 맞추느라 용인 수지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남편은 목이 말랐는지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컵에 따른다. 아이는 기타를 들고 여기저기 살펴보고 있다. 아이는 너무 좋은지 잠깐 말을 더듬는다. 그렇게 속을 썩이고 힘들게 해도 그냥 웃어 주기만 해도 행복해진다.  


 아들은 거실에서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아들이 저렇게 거실에 나와서 노래를 부르는 일은 거의 일어나기 힘든 사건(?)이다. 남편은 맞은편에 앉아서 느긋하게 맥주를 마시고 있다. 아이의 표정을 보니 남편의 오늘 하루는 이미 다 보상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아마 보상 그 이상의 무엇을 받았을 것이다.



 남편은 뿌듯한 표정으로 맥주를 목으로 넘기고 있다. 남편의 얼굴에는 기분 좋은 미소가 서서히 퍼져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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