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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게 걷기 Oct 12. 2020

냉동 대패 삼겹살의 추억

  나보다 내 월급날을 더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건 바로 당시 대학생이었던 남자 친구 K였다.


    K는 생활이 무척 곤궁했다. 그가 살고 있는 집은 보증금도 없이 월세 10만 원만 내고 사는 집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주인집이 있고 그 옆에 딸린 방 하나가 K의 방이었다. 방을 나오면 부엌이 있는데 그 당시 부엌들이 대체로 그러했던 것처럼 바닥에는 타일이 발려 있어서 욕실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화장실은 부엌문을 열고 나오면 바깥에 있었는데 양변기가 아니라 쪼그리고 볼일을 보는 구조였다. 그나마 물 내리는 부분이 고장이 나서 볼일을 보고 나면 양동이에 있는 물을 퍼서 부어줘야 했다. K는 시골에서 올라온 돈으로 월세 10만 원을 내고 남은 돈으로 생필품이나 식재료를 샀다. 하지만 대체로 그는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고 김치를 애지중지하며 남은 국물까지 함부로 버리지 않고 찌개로 끓여서 알뜰하게 생활해 가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K는 꽤 긍정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우풍이 심한 자신의 방을 아늑하게 만들기 위해 빨간색 호랑이 무늬 담요를 벽에 걸어 놓았다. 그리고 어디에서 전기 오븐기 같은 것을 얻어다가 거기에 고구마도 구워 먹곤 했다. 그 나름대로는 서글픈 자취방에서 낭만과 운치를 즐기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가끔 고기가 먹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K는 나의 월급날을 나보다 더 기다리곤 했다. 나의 월급날은 우리가 공식적으로 고기를 먹는 날이었다.


나는 단과학원 영어 강사로 잠깐 일한 적이 있다. 그 학원 정보는 지역 정보지에서 얻었다. 근무 시간은 오후 3시부터 밤 10시까지, 월급은 70만 원이었다. 처음 학원에 면접을 보러 갔을 때 원장은 개량 한복을 입고 있었다. 덩치가 좋고 얼굴의 혈색이 좋은, 부잣집 아들처럼 생긴 얼굴이었다. 그는 나에게 바로 수업 시강을 해 보라고 했다. 나는 To 부정사의 부사적 용법을 설명했던 것 같다. 오랫동안 과외를 해 왔기 때문에 그쪽 파트는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파트였다. 내가 막히는 곳 없이 술술 강의를 이어가자 그는 흡족해하는 것 같았고 바로 다음날부터 출근할 수 있겠냐고 나의 의사를 타진했다. 그래서 나는 힘들이지 않고 단과학원 강사로 취직이 되었다. 학원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내실이 있었다. 건물 2층은 학원이고 3층은 자습실로 운영했다. 학원 선생님들도 12명 이나 되었다. 학원 원장과 부원장은 부부였다. 그들은 둘 다 그다지 호감 가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학원이 집에서 가까웠고 시간대도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나는 그 학원에서 당분간 일하기로 했다.


 내 월급날이 되면 K는 학원 일층 앞에서 나를 기다렸다. 학원 수업이 끝날 때쯤 창문으로 흘끔 밖을 내다보면 그의 정수리가 보였다. 그는 철 지난 낡은 청록색 점퍼를 입고 있었다. 멋을 부릴 옷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늘 그 옷이었다. 그는 어깨에 동그란 도면통을 메고 있었다. 한창 눈에 콩깍지가 씌어져 있을 때였다. 행색은 초라했지만 어딘가 멋스럽다고 생각하며 혼자 설레었다. 나는 괜히 뿌듯해져서 남자 친구가 무얼 하고 있나 동태를 살피며 퇴근시간을 기다렸다. 내려다보면 그도 연신 시간을 확인하는 눈치였고 어쩌면 나보다 삼겹살 외식을 더 기다리고 있는 건가 싶기도 했다.  


 드디어 수업이 끝나면 우리는 근처에 있는 대학가로 갔다. 우리는 가성비가 좋은 '이모네 삼겹살'이라는 식당을 알고 있었다. 냉동 대패 삼겹살은 1인분에 2500원이었다. 우리는 일단 2인분을 주문했다. 아줌마가 불판에 은박 호일을 깔아 주고 나면 이제 고기를 구울 준비가 되었다. 우리는 냉동 대패 삼겹살을 호일 위에 올리기 시작했다. 고기 만으로는 양이 부족할 수 있기 때문에 콩나물을 넉넉하게 달라고 해서 불판에 같이 올렸다. 김치도 올려서 구웠다. 그 때나 지금이나 술 없이 못 사는 K는 소주 1명을 주문했다. 삼겹살이 익기 시작하면 상추에 파채와 삼겹살을 올려서 제대로 먹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학원에서 아이들을 다루느라 녹초가 되어 있던 터라 삼겹살은 꿀맛이었다. 나는 삼겹살을 씹는 둥 마는 둥 먹어치우고 있었다. 나는 중등부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중 1 아이들은 말이 중학생이지 아직 꼬마들이었다. 그중에 몇몇 장난꾸러기들에게 대처하다 보면 진이 빠지기 일쑤였다.


     K의 일상도 만만치 않았다. K는 건축을 전공하고 있었는데 공모전 준비를 할 때면 잠을 거의 못 자는 눈치였다. 겨울이 거의 끝자락인데 K는 계절이 바뀌는 줄도 모르고 두꺼운 점퍼를 입고 있었다. 그도 하루 종일 제대로 밥을 못 먹었는지 허겁지겁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리는 사랑하는 연인이라기에는 너무나 경쟁적으로 삼겹살을 먹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배가 불러오면 그때서야 여유를 되찾고 연인의 하루는 어떠했는지 궁금해하는 식이었다. 이제 그 불판에 공깃밥을 2개 추가해서 볶아 먹으면 우리의 만찬은 거의 막바지로 접어든다. 그 당시 삼겹살 2인분에서 3인분, 소주 한 병, 공깃밥 2개를 주문하면 만 오천 원 정도에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자주 K를 타박했다. 학생 신분이라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한 번씩은 부아가 치밀었다. K는 돈이 없어도 너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십 대 중반이었고 다른 친구들처럼 남자 친구에게 근사한 대접을 받고 싶은 허영심이 있었다.


"친구들은 남자 친구가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데리고 간다는데 나는 기껏 온다는 데가 삼겹살집이네.

그나마 계산도 내 차지이고"


그럴 때마다 K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나중에 돈 벌면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 하고 웃으면서 소주를 입에 털어 넣곤 했다. 그렇게 K는 내게 설움 받으면서도 나의 월급날을 기다렸고 월급날이 되면 어김없이 학원 일층에서 어슬렁거리며 나의 귀가를 기다렸다. 그리고 나는 학원 창문으로 흘끔거리며 K가 도착해 있는지를 확인하곤 했다. 그렇게 둘이 만나서 배부르게 고기를 먹고 소주까지 마시고 나면 우리는 잔뜩 행복해져서 길에 파는 호떡을 하나씩 입에 어 물고 대학가를 배회하곤 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K와 나는 그 후로 그때만큼 맛있는 삼겹살을 먹어보지 못했다. 분명 그때 먹던 고기는 질이 좋은 고기도 아니었을 것이고 환경 호르몬이 나오는 알루미늄 호일에 구웠으니 몸에도 좋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방문한 제주 흑돼지 집에서도, 유명 돼지 생포갈비 맛집에서도 나는 그 맛을 찾을 수 없었다.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결핍과 희망과 간절함이 필요하다. 무언가 가지고 싶은 간절함이 클수록 그 물건을 가지게 되었을 때 행복감은 커지고 마찬가지로 많이 배고프고 허기진 상태일수록 먹는 음식의 맛은 놀라울 정도로 맛있는 음식으로 변하게 된다. 그래서 지갑을 열기 위해서 몇 번이나 망설이던 그 시절에 먹었던 음식의 맛이 이렇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는 모양이다.


  그때는 주변에 취업해서 자리잡은 선배들의 여유와 자신만만한 모습이 부러웠다. 그들은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어 보였다. 선배들의 그런 모습이 막연히 부럽고 그들의 그런 모습을 남몰래 동경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두렵고 위압적이고 나보다 잘 나 보이던 시절, 그 때 얇은 지갑을 들고 찾아갔던 그 허름한 삼겹살 집의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던 삼겹살은 넉넉하게 우리의 배를 채워주고 우리의 허한 마음을 달래 주었다. 우리처럼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제비처럼 찾아 들던 그 허름한 간판의 식당은 아직도 그곳에 있을까?



 그 때 우리가 먹었던 삼겹살은 그저 나의 배를 채워주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무것도 기약할 수 없던 내 청춘의 불안을 달래주는 위로였다. 그리고 그것은 따뜻한 온기가 되어 오래도록 나를 덥혀 주었다.  


(그 후로도 K는 오랫동안 돈 없는 학생 신분으로 나에게 삼겹살을 얻어 먹으며 구박을 받곤 했지만

지금은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 당당하게 내 계좌로 월급을 이체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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