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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게 걷기 Oct 19. 2020

마음이 힘든 날, 집으로 가는 길

 점심을 먹고 커피를 홀짝일 때까지도 별다른 징후가 없었다. 오늘따라 돈가스를 먹고 싶어 하는 팀장을 따라서 우리는 우르르 식당으로 몰려갔다. 팀원은 모두 다섯이다. 식당에서 자리에 앉는 짧은 순간에도 우리는 엄청나게 머리를 굴리며 신경전을 벌인다.


  가장 최악의 자리는 바로 팀장의 맞은편 자리! 그곳에 앉으면 식사시간 내내 팀장의 얼굴과 눈을 마주 보며 밥을 먹어야 한다. 식당에 들어오는 순서로 보았을 때 최악의 자리에 앉을 뻔했지만 그래도 교묘하게 피했다. 팀장 옆 자리다. 맞은편 보다 낫다.


 식사가 끝나고 커피를 마시던 팀장은 센티해졌다. 갑자기 예전에 모시던 상무님이 생각난다는 것이다.


" 정말 인품이 좋은 분이셨지. 아무리 직급이 낮은 직원의 얘기도 늘 존중하셨어.

   배려가 몸에 배어 있는 분이야. 나도 앞으로는 그분처럼 직원을 존중하는 자세를 가져야겠어"


이런 코미디가 있나. 인품과 존중과 배려라는 단어가 그의 입에서 나오다니. 입 안 가득 머금고 있던 카모마일을 뿜을뻔했다. 그러나 위기를 잘 넘겼다. 우리는 그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문제는 오후 회의에서 발생했다. 다음 달에 회사에 큰 행사가 있어서 준비가 한창이다. 우리 팀이 수석팀이기 때문에 인력도 차출해야 하고 지원도 해야 하고 할 일이 산더미다. 그 행사 준비를 위해서 이제까지 체크리스트를 작성하고 시간대별 동선 시나리오를 짜고 역할 분담을 해 왔다. 그런데 이제까지 팀장은 한 번도 회의에 들어오지 않았다.


몰랐다. 그가 일을 하기 싫어서 나만 계속 밀어 넣고 의도적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오늘 억지춘향으로 회의에 참석한 팀장은 멀찌감치 뒷자리에 앉았다. 그동안 만들어놓은 체크리스트를 관련 부서 직원들이 검토하는 자리였다. 그리고 5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거친 숨소리가 뒤에서 들려온다. 흥분하거나 화가 나면 참지 못하고 분출하는, 익숙한 팀장의 숨소리다. 그때까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엑셀에는 시간대 별로 해야 할 일이 나열되어 있었고 담당자 열에는 관련자들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었다.


팀장은 조용한 회의에 더 이상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결국 폭발했다.


" 잠깐만, 뭐하는 짓거리지? 왜 내 이름이 저기에 있지?"


회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사람들이 당황해서 굳어 있는데 팀장은 아예 노트북을 들고 회의실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아니 그래도 분이 안 풀렸는지 5분 뒤에 다시 들어왔다.


" 내 이름을 다 지우라고요. 내 이름을 다 지우고 OOO이름을 넣으라고요. "


여기에서 OOO은 나다. 그러니까 우리 팀장은 담당자에 본인의 이름이 올라가 있는 걸 못 견디겠다는 것이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이렇게 흥분할 일인가 싶었다. 몇 년 전에 다른 건물 행사를 할 때도 전임 팀장이 전체적인 업무를 지휘하고 자잘한 것을 다 전두지휘했었다. 그런데 팀장은 그런 귀찮고 티 안나는 일이 하기 싫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표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러고 나서도 팀장은 안경 너머 매서운 눈으로 나를 1분 가까이 노려 보다가 씩씩거리며 나가 버렸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처음에는 놀라고 어리둥절하다가 내가 뭘 잘못했나 심각하게 고민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렇게 화 낼 일도 아니고 그렇게 감정적으로 대응할 상황도 아니다. 이제까지 그 담당자 파일은 메일로 여러 차례 공유가 되기도 했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나의 감정이 변화되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놀람, 어리둥절, 두려움, 그러다가 억울함과 분노로 나의 감정은 서서히 변화되었다.


책임지지 않는 허울뿐인 팀장, 일은 하기 싫고 대접은 받고 싶은 꼰대의 전형적인 표상, 내 속에서 온갖 날카로운 비판의 말들이 쏟아졌다.


그렇게 우리 팀장은 뛰쳐나가 버리고 남은 사람들이 현장을 돌면서 동선을 다시 한번 체크했다. 건물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확인하고 나니 어느새 밖은 어두워졌고 7시가 훌쩍 넘었다. 가방을 챙겨서 나오는 길에 보니 회사 앞 커피숍에 팀장이 앉아 있다. 다른 팀장을 불러내서 열심히 화난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 모양이다. 맞은편에 앉은 팀장이 비위를 잘  맞춰주는 우리팀장 얼굴에 특유의 웃음이 흐르고 몸은 거만하게 뒤로 젖혀져 있다. 발을 까닥거리며 커피를 홀짝이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낮에 커피숍에서 진지하게 존중과 배려를 꿈꾸던 그의 모습이 교차된다.


차에 올라서 라디오를 켜니 이문세의 '가로수 그늘 아래서'가 흘러나온다.

"아름다운 이 세상, 잊지 않으리. 내가 사랑한 얘기,  저 별이 지는 가로수 하늘 밑"

아름다운 이 세상이란다. 갑자기 참고 있던 무언가가 올라오려고 한다.


서울 도심을 빠져나가는 차들이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다. 빠르게 속도를 낼 수 없는 차들은 엉덩이에 주황색 라이트를 켜고 느리게 도시를 빠져나가고 있다.  


나는 집으로 간다. 도로 위에 있는 모두가 집으로 간다. 주황색 가로등이 줄지어 서있다. 곧 익숙한 길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내가 겪었던 수모는 별 일도 아닌 게 될 것이다.


   동네 카페 간판이 보이고 그 옆으로 분주한 떡집을 지난다. 왕만두 가게의 커다란 솥에서는 아직도 뜨거운 김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이제 모퉁이만 돌면 나의 집이 보일 것이다.


사진 출처: http://m.blog.daum.net/mike50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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