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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니 Oct 30. 2022

창립 멤버가 된다는 건

프롤로그

20대, 비영리 문화예술 단체 창단기


2020년 어느 날, 서울로 이동하는 KTX에서 전화가 울렸다. 주영이었다.


"서울 언제 와?"


당시 대구에서 2년째 근무 중이었다. 대구에 연고가 없었던 나는 주말이면 종종 서울로 올라갔다. 그날도 어김없이 요란하게 달리는 KTX 열차 안이었다.


주영은 나와 함께 단체를 시작한 창립 멤버다. 2015년 여름, 스물한 살의 나는 오케스트라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싶었고 대뜸 주영에게 지휘를 부탁했다. 그는 나보다 6살이 많은 선배였고 내가 아는 유일한 작곡과였으며, 취미로 첼로를 연주하기 위해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동아리에 가입한 독특한 사람이었다. 놀랍게도 당시의 나는 작곡과면 지휘도 당연히 잘하는 줄 알았다. (작곡과 지휘는 엄연히 다른 영역이다.) 그래서 주영에게 연락을 했다. 다짜고짜 나와 함께 오케스트라 프로젝트를 이끌어가 보지 않겠냐고 물었고, 우리는 그 후로 4년 넘는 시간을 함께하며 매일 같이 문화예술 단체를 운영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의아할 수 있지만 우리는 사실 제대로 된 대화를 해 본 적도 없는 사이였다. 그냥 같은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동아리에 가입한 신규 단원, 그리고 그 해의 연주회를 이끌어 갈 임원진으로 각자 어떤 역할을 맡았을 뿐.


"내년엔 가지 않을까요? 가야 할 텐데..."

"빨리 서울 왔으면 좋겠다."


거의 1년 만의 통화였다. 나는 창립 이래 줄곧 단체 운영에만 매진했는데, 대학교를 졸업할 때쯤 우연히 나에게 딱 맞는 입사 전형을 발견했고 공모전에 응모하듯이 순식간에 지원을 했다. 운이 좋게도 최종 합격을 해서, 25살이살 되던 해에 마케팅 직무로 입사를 했다. 취업도 계획을 세워서 한 건 아니었으니 당연히 단체와 일을 어떻게 병행할 지에 대한 계획도 없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인생의 변곡점이 눈 앞에 펼쳐졌다. 게다가 우리 회사는 신입사원 첫 해에 관행처럼 지방 발령을 냈다. 이 역시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몇 주 간의 연수를 마치고 나는 비연고지인 대구로 발령을 받았고, 그렇게 단체를 떠났다. 암묵적으로 자리를 비웠다는 표현을 썼지만, 당시 나의 마음가짐은 허겁지겁 떠나기 바빴던 것 같다.


단체는 나에게 자부심을 넘어 알량한 '자존심'과도 같은 존재였다. 사회인이 되었다는 핑계로 단체를 떠나, 주 5일 사무실로 출근하고 새로운 조직 문화에 적응하며 지낸 지도 어언 2년. 그동안 단체는 많이 성장했고, 나는 회사의 신입사원으로 성장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단체가 성장하고 있음에 안도하면서도, 내가 직접 도울 수 없다는 미안함이 더 크게 남아서 단체의 소식을 애써 외면하려 했다. 얼마나 치열하게 단체를 운영해왔는지 알기 때문에. 그동안 내가 들인 시간과 노력에 대해 누구보다 떳떳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시 돌아갈 용기가 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얄팍한 내 자존심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불쑥 튀어나와 제멋대로 말을 뱉어내고 있었다.


"제가 돌아가면, 우리 단체가 많이 커졌으니 이제는 인적 자원에도 체계를 갖춰야 할 것 같고, 기업과 연계하는 대외 커뮤니케이션에 더 신경 쓰고..."


요약하자면 회사에서 폭풍 성장 하고 있는만큼, 이제는 단체의 경영 전략적인 측면에 보탬이 될 수 있을 거란 말을 하고 있었다. 스스로 죄책감 앞에 쉽게 무너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마음과 머리가 왜 따로 노는지, 나 없이 단체를 운영하고 있을 주영에게 미안해서 그야말로 ‘구구절절' 이런 저런 말들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돌아오는 답변이 너무 간결했다.


"아니야 뭔가를 하지 않아도 돼."

"네?"

"돌아오기나 해. 너가 돌아오면 좋겠다, 진짜로."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그 감정이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정말 너무 힘들어서 도망치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도망치면 모든 게 끝날것만 같았다. 어쩌다보니 사회로 나아가겠다는 핑계로 잠시 외면 했는데, 내가 오랜 시간 몸 담고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어딘가 마음이 움찔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갈팡질팡하는 나의 청춘이, 어쩌면 더욱 미숙하던 시절에도 이끌었던 단체로 돌아간다는 것.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다시 손을 내민다는 것. 그 모든 생각이 내 마음을 일렁이게 했다.


나는 덜컹이는 KTX 칸에서 발생하는 거센 소음과 함께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소음에도 굴하지 않고 주영과 한참 동안 낄낄거리며 오래 된 단원들의 근황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미안함으로 점철된 나의 머쓱함은 어디로 가고, 다시 철부지 같았던 이십대 초반에 대표 행세를 하던 모습이 되어 통화를 하고 있었다. 열차가 서울에 점점 가까워질 수록, 내 마음도 점점 단체로 향하고 있었다. 고민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이제는 나를 기억하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겠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중요치 않았다. 창립 멤버들이 나를 기억하고, 내가 그들과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설렘이 가득했다.


우리는 늘 단체와 함께 성장 해왔다. 또 어떤 모습으로 단체와 내가, 그리고 우리가 성장할 지 기대가 됐다. 그 날 이후로도 수차례 ‘이게 맞는 걸까?’하는 고민을 했지만 함께하는 상상을 시작해버린 이상 멈출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한 기획 단원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 문화예술봉사단메리 창립자 박주영 음악감독님, 신민지 메리콰이어 대표님, 그리고 김재원 전 메리오케스트라 대표님, 안녕하세요? 세 분 모두 선뜻 <메리 매거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래는 당시 제작된 <메리 매거진>에 실린 창립 멤버들의 인터뷰 전문이다.





인터뷰: 메리를 만든 사람들


Q. 서로의 첫인상은.

재원: 한창 카메라를 들고 동아리원들의 프로필을 다 찍어주곤 했다. 주영 오빠는 탈색한 머리에, 작곡과에다, 첼로도 켜고... 아무튼, 화려했다.

주영: 솔직히... 처음엔 재원이 얼굴도 몰랐다.(하하) 함께 임원진이었지만, 마주칠 일이 별로 없었다. 임원진끼리도 안 친할 수 있으니까.(머쓱) 메리를 통해 만난 민지는 메리의 영상 제작 담당으로 기획팀이라고 볼 수 없었고, 1기까지 큰 소통이 없었다. 2기 때 처음 전화번호를 주고받았을 정도다.(웃음)

민지: 재원이와 학과 동기이자 같은 영상학회였고 MT 때 처음 봤지만, 1학년 땐 재원이를 잘 몰랐다. 2학년이 되어서야 메리로 같이 일하며 비로소 제대로 알게 됐다. 재원이는 메리 대표로서 운영을 맡고, 주영 오빠는 지휘를 하고, 난 영상을 만드는 역할이었다. 그래서 굉장히 어른스럽고 신기하게 느껴졌다.


Q. ‘메리’ 설립 계기는.

재원: 동아리 활동을 하며 ‘대외적인 활동을 할 수 없을까?’를 고민했다. 임원이라면 ‘돈을 벌어와야 한다.’라는 마음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메리츠화재가 주관하는 ‘메리츠아츠봉사단’ 공모전에 지원하려고 다짜고짜 주영 오빠에게 연락했다. 아직도 동아리방에서 갑자기 전화한 게 생생하다. 21살에 아무것도 모르고 모두가 편하다고 생각했다. 빨리 일을 추진하고 싶은데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동아리 작곡과 오빠’가 생각나 연락했다.

주영: 마침 하고 있던 교생실습 경험을 토대로 ‘학생들과 함께하면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것 같다, 청소년과 함께해보자!’라는 얘기가 나왔다. 이후 회의를 거듭해 ‘청소년과 대학생, 아마추어 공연을 해보자!’가 됐다. 이 아이디어로 공모전에서 2등을 차지했고, 큰 지원금을 받았다.

민지: 정리하자면 2015년 5월 재원이가 ‘메리츠아츠봉사단 3기’ 공모전에 지원했고, 2위를 수상하면서 ‘6개월 동안 5회 공연’을 조건으로 공연 운영비를 지원받는 형태로 메리가 시작됐다.


Q. 그때도 외부 단원을 모집한 건가?

재원: 아니다. 첫 기수는 동아리 사람들이 봉사활동 하는 것처럼 시작했고, 고등학교는 삼육고등학교, 한 곳만 같이 했다. 1기 땐 ‘지하철과 고등학교를 섭외할 수 있구나!’하는 가능성을 발견했고, 2기부터 공개모집했다.

주영: 1기 땐 한 대학교 동아리와 한 고등학교 동아리가 함께 공연하는 느낌이었다.


Q. 세 분이 함께하게 된 계기는.

민지: 재원이가 메리츠 공모전 기획안을 쓰면서 내가 영상에 관심 있다는 걸 알았는지 학교 근처 카페 NOEL에 데려갔다. 공모전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해주면서 영상으로 만들어보는 게 어떠냐는 제의를 했다. 둘 다 영상에 욕심이 있고, 마침 ‘연말 학회 방송제’에 영상을 출품했어야 해서 ‘나도 하겠다.’며 시작했다. 지금까지, 이렇게 오래 같이하게 될 줄 몰랐다. 1월 말 해단식에서 마지막 결과 보고만 하면 끝이었다. 목표도 조금씩 달랐다. 주영 오빠랑 재원이는 6개월간 동아리 지원금이 필요했고, 나는 멋진 영상을 만들고자 했다.

재원: 제가 두 사람을 끌어들인 거네요?(웃음) 민지와 함께 영상을 만들면서 ‘대학생 오케스트라’와 ‘청소년과 함께 지하철에서 봉사’하는 게 좋은 소재가 되겠다 싶었다. 특히, 주영오빠는 한 번도 지휘해본 적이 없었는데, 메리츠아츠봉사단의 후원으로 오신 지휘자 멘토의 코치를 받으며 지휘자로서 오케스트라 연습을 진행했다. 그렇게 메리의 첫 번째 다큐를 완성했다.

주영: 셋 다, 절대 이렇게 길게 보지 않았다. 재원이가 기획하고, 날 지휘자로, 민지를 영상스텝으로 모집한 게 시작이었다. 당시 27살, 대학생 끝 무렵이라 미래를 걱정했다.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오케스트라 지휘를 경험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하는 마음이 있었다. 재원에게 연락받았을 때, ‘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각의 니즈가 맞았던 거다. 둘 다 너무 어려 보였지만, 서로 바라던 점이 모두 충족됐다.


Q. '메리' 이름의 탄생 비화는.

재원: 아직도 이름 정한 곳이 기억난다. 시청역 8번 출구 앞 던킨도너츠. 다큐의 제목을 지으며, 오케스트라 이름을 고민했다. ‘메리 크리스마스’의 ‘메리’와 산타모자가 엮이면 그림이 되겠다 싶어 ‘Merry’로 정했다. 후원사와 어감이 비슷해 성의 있어 보이기도 했고, ‘즐겁고, 명랑하다’는 의미를 담았다.

민지: 참고로 산타모자는 마지막 공연에만 쓰고, 첫 문화봉사엔 쓰지 않았다. ‘큰메리, 작은메리, 메리클로스’도 3기쯤 돼서야 만든 이름이다.


Q. 이후에도 메리를 계속하게 된 계기는.

재원: 여기서부터 민지가 핵심 인물로 등장하는 스토리다!(웃음)

주영: 민지로부터 2인방에서 3인방이 되는 사건이 시작된다. 1기 해단식 날, 셋이서 술을 마시자더라. 한 번도 셋이 술 마신 적이 없어서 ‘뭐지?’ 싶었는데, 1기 활동을 보고 우리 단체를 후원해주겠다는 작은 스타트업 회사가 있다는 거다.

재원: 그곳은 사회공헌활동 단체를 기업이 후원해줄 수 있게 스토리를 만들어주는 중개 스타트업 쉐어앤케어였다. 매칭됐던 기업은 ‘뿌까’로 잘 알려진 VOOZ라는 회사다. 언론정보학과다 보니 욕심이 좀 있어서 누가 시키지도 않은 ‘메리오케스트라’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었고, 다큐와 많은 사진을 업로드했다. 그걸 보고 민지 개인계정으로 연락이 왔다. 그렇게 시작됐다.

민지: 기부 플랫폼을 통해 후원금을 모금 받고, VOOZ에서 해당 액수만큼 후원금을 지원해줬다. 당사 홈페이지에 올린 ‘메리오케스트라를 후원해 주세요.’라는 스토리를 보고 서비스 이용자들이 기부하고, 우린 그 기부금을 받는 거였다. 그러면서 2기의 서막을 올렸다.

주영: 그때 그 맥주 집에서 ‘대학교 동아리에서 벗어나 수도권 대학생을 모집하자. 청소년은 원래 하던 방식대로 학교와 결연을 하자. 할 거면 제대로 하자!’라면서 책상을 쾅 치고 다짐했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어떻게 보면 1기보다 2기가 진정한 메리의 시작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Q. 메리를 운영하면서 힘들었던 경험.

재원: ‘한 명이 포기하면, 메리가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지: 메리가 가진 건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다. 단원 모집도 처음이었고, 공연 대관을 위해 지하철역을 일일이 찾아가 문의해도 레퍼런스가 부족해서 거절당하고, 심지어 연습실도 없어서 지하철 역사 안에서 연습했다. 청소년 동아리를 찾을 때도, 한 달 동안 서울시 중고등학교 리스트를 모조리 다 뽑아서 오케스트라가 있을 만한 학교에 다 전화해봤는데, 99% 거절당했다. 그리고 지금은 누군가 ‘이렇게 하는 게 효율적이야.’라며 알려주는 사람이 있지만, 당시엔 그 누구도 정답을 몰랐다.

주영: 정답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안 되면 다른 방식으로 하면 되지~’하면서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긴 했는데, 사실 지금 말하는 메리의 방향성은 점진적으로 발전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땐 힘들면 서로에게 의지하고 책임감으로 했던 거지, ‘메리가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라는 비전을 이루려고 열심히 했다고는 할 수 없다. 지금은 어느 정도 인정받을 수 있어 다행이다.


Q. 힘든 것을 어떻게 극복했나.

재원: 5기까지 하면서 각자 인생의 암흑기가 한 번씩 찾아왔다. 지금은 사이즈가 많이 커졌지만, 당시엔 세 명의 인력이 전부라 학업보다 메리에 더 집중했다. 그러다가 슬럼프가 찾아왔다. 21살에 메리를 시작해 ‘대표’ 타이틀을 얻었지만, 목표가 없었기에 ‘이 단체는 대체 뭘까?’라는 질문을 계속 던졌다.

민지: 당시에 하고 싶은 게 많았고, 메리는 그중 하나일 뿐이었다. 우선순위가 아니었기에, 두 사람은 나에게 ‘인력이 적은데, 왜 신경을 안 쓰지?’라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주영: 재원이와 민지가 슬럼프에 빠졌을 때, 무조건 감싸주기보다 채찍질하며 끌고 왔다. 감싸줄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당시 나이가 있어 신경 쓸 게 많았다. 민지는 ‘이 정도 하면 된 것 같은데, 왜 더 많은 걸 요구하지?’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고, 재원이는 어린 나이에 대표가 돼서 모든 걸 다 이끌기엔 시간과 감정이 많이 소비됐던 거다. 서로를 혼내면서 왔다. 그 과정에서 신뢰가 생겼다고 표현하고 싶다. 어찌 됐든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니까. 방법은 잘못되었을지 몰라도, 서로 의지하고 신뢰를 쌓았기 때문이다.


Q.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재원: 준비 과정에 힘을 다 쏟고, 공연 당일에는 민지랑 카메라를 들고 계속 뛰어다니고... 그래서 막상 공연 날엔 ‘아, 끝났다.’하는 후련함이 너무 컸다. ‘새롭다.’고 느낀 건 첫 광화문 자선연주회.

민지: 재원이 집에서 밤을 새우며 일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재원이 집이 기획팀의 아지트였다. 새벽에 야식 먹으면서 아침 7시까지 영상을 만들었던 게 오히려 기억에 많이 남는다.

재원: 다큐멘터리를 만들 땐 특히 더욱더 바빴다. 영상기획팀 다섯 명이 학교 갔다가, 혹은 아르바이트 갔다가 다시 집으로 모여 밤새 작업했다. 민지와 밤새 영상 편집하고, 주영 오빠는 밤새 음악 편곡하고...

주영: 나는 악보를 편집할 테니, 너희는 영상을 편집하거라. 나도 밤샐 테니, 너희도 밤을 새우거라.(웃음)


Q. 메리를 통해 배운 점

재원: 내 단점을 깨달았다. 또, 내 가슴을 뛰게 하는 동기를 확실히 파악했다. 이 동력으로 취업도 할 수 있었다.

민지: 일이 ‘자아실현의 도구’인 걸 깨달았다. 대학생활 동안 직장과 직무를 탐구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쏟았는데, 막상 직장에 오니 ‘직장 밖의 삶’을 어떻게 꾸려나갈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그런 의미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곳이 ‘메리’라는 게 감사하다. ‘직장 밖에서도 내가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고,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구나!’를 느끼게 해준다. 또,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배웠다. 그래서 더 열심히 집중할 수 있는 것 같다.

주영: 메리에서 인성을 배우고, 내 장단점도 알게 되었지만, ‘신뢰’를 가장 깊게 깨달았다. ‘무언가를 하려면 누군가를 신뢰해야 한다’, ‘신뢰가 생겨야 일이 된다’는 신뢰의 가치를 알게 됐다.


Q. 1년 후의 계획은.

민지: 메리는 ‘시민들이 일상 속에서 문화예술가가 되고, 그로써 우리는 자아를 실현하고 지역사회에 봉사한다.’는 컨셉을 지닌다. 현재 프로그램 대상이 청소년, 청년, 대학생에 머물러 있는데, 이 계층을 가족, 노인, 직장인 등으로 넓히는 것이 바람이다.

주영: 메리의 가치관과는 살짝 안 맞을 수도 있지만, ‘정착’하는 거다. 예전엔 ‘지부를 더 만들고 해외로 나가자!’, ‘기차나 배에서 연주하자!’ 등을 얘기했지만, 코로나로 힘든 상황이다. 지금까지 계속 ‘성장’해왔다면, 앞으로는 ‘정착’하는 시기가 되면 좋지 않을까?

재원: 제3자의 시선으로 메리를 보니 ‘메리가 무엇을 해야 의미 있지?’라는 질문이 생기더라. 또, 많은 사람이 메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걸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에 대한 고민도 생긴다. 아직 해답을 계속 찾고 있는 중이다.


Q. 지금까지 인연을 맺어온 옆 사람에게 한 마디.

주영: 재원아, 빨리 돌아와. 민지야, 지금처럼만.(쑥스) 셋이 모두 함께 한 시간은 많지 않아서, ‘셋이 같이 일하는 날이 다시 오면 좋겠다.’고 전부터 말해왔다. 각자 경제적으로 안정되는 시기가 가까워지고 있다. 함께 ‘더 성장하는 메리’를 만들고 싶다.

재원: 나 없는 동안 다들 너무 고생했어요.

민지: 재원아, 지나고 보니 네가 정말 최고더라. 시간이 지날수록 ‘재원이가 빨리 돌아와야 한다.’를 느낀다. 이전과는 다른 이슈가 발생하는데, 해결책을 같이 고민할 친구가 재원이라면 너~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영 오빠, 베토벤 합창같이 빡센 새로운 곡 지휘해보는 건 어떠신지!? 주영 오빠가 메리 1기부터 9기까지 능력을 쏟아부었고, 지금은 강원지부를 담당하고 있다. 이젠 전 지부가 함께 하나의 멋진 콘텐츠를 만들어 보면 좋겠다.


Q. 메리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민지: 성장

주영: 행복

재원: 헌신


Q. 나에게 메리란.

재원: 자부심

주영: 과거이자, 현재이자, 미래이다

민지: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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