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하철에서 공연을 하는 오케스트라
'메리는 누가 만든 거예요?'라는 질문을 자주 듣는다.
시민관객과 함께하는 대규모 공연을 기획하는 단체이다보니 뒤풀이를 성대하게 하는 편인데, 작년에 내가 단체에 복귀한 뒤로는 매 뒤풀이마다 이 질문을 들었다. 나이와 실력에 상관 없이 누구나 생활예술을 즐길 수 있는 메리에서 한 번의 공연을 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호기심이 생기는 듯 하다. 메리에 애정을 갖게 된 분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나에게 질문을 하면,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 꿈틀거린다. 감사한 마음, 뿌듯한 마음, 그리고 행복한 마음. 그것은 메리(Merry)한 마음이다.
사실 나에게 질문을 한 것이니 누가 만들었는지를 알고싶다기보단 왜, 그리고 어쩌다 이렇게 멋진 단체가 활동을 지속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한 것이리라. 그 때마다 되풀이 하는,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전래동화 처럼 풀어 놓는 나의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오케스트라 중앙동아리에 지원했다. 언론학도가 되었다는 설레는 마음으로 교문을 드나들던 14학번 새내기의 첫 동아리였다. 입시 경쟁을 부추기는 우리나라 교육 제도 때문에라도, 대부분 고등학생일 때 대학 생활에 대한 로망을 하나쯤 갖지 않는가. 나에게는 그게 오케스트라였다.
초등학교 때 부모님의 권유로 바이올린 학원을 다녔다. 그 때의 기억이 꽤나 좋게 남았는지, 성인이 되면 다시 악기를 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90년대 생인 '나 때'는 초등학생들의 흔한 학원 등록 패턴이 태권도, 피아노 그리고 조금 더 욕심 내면 미술이나 바이올린 등의 예체능 활동이었던 것 같다. 베이비붐 세대 부모님들이 당시 자녀들에게 이것 저것 많이 시키는 분위기였던 것 같은데, 지덕체를 함양토록 이끄는게 당대 부모들의 중요한 미션이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모쪼록, 흔쾌히 자녀의 예체능 활동을 독려해준 부모님 덕분에 나는 그럭저럭 연주할 만한 4/4 사이즈 바이올린을 갖고 있었고 운지법을 잊지 않고 악보를 리딩할 수 있는 있는 정도의 실력을 지녔다. 잘 하는 건 아니지만 오케스트라 활동은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입학한 지 2주쯤 되었을까. 교양 수업을 들으러 캠퍼스를 걷던 어느 날, 현이 풀린 바이올린을 이젤에 걸어두고 큰 판넬에 '오케스트라'라고 쓴 동아리 부스가 눈에 띄었다.
"오케스트라 동아리 지원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며칠 뒤에 동아리 방으로 와서 간단한 오디션을 보면 됩니다!"
"악기가 지방에 있어서..."
"아! 빌려드릴 수 있어요. 바이올린이면 간단히 활 긋고 스케일 연주 해주시면 돼요. 일단 오디션부터 보러 오세요!"
아무튼 그렇게 나는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어 동아리 방을 드나 들며 여름 방학마다 잘 알지도 못하는 클래식 교향곡을 연주하기 위해 애썼다. 하고잡이 성향의 나는 이듬 해 동아리의 기획부장도 맡았다. 어렸을 때부터 편집 디자인 하기를 취미로 삼았는데, 내가 좋아하는 동아리 활동에 재능을 발휘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날, 동아리 방으로 가는 길에 학생회관 건물 벽면에 붙은 지원 사업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한국메세나협회와 메리츠화재가 공동 주관하는 '메리츠아츠봉사단'이란 활동이었다. 대학생 동아리 중에 문화예술과 봉사 활동을 접목한 활동 계획을 공모하고, 심사를 통해 활동을 지원해주는 사회공헌 프로그램이었다. 지원 방식은 영상과 PPT를 활용해서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식이었고 최종 6개 동아리에 선정되면 관련 분야의 예술가 멘토를 배정해주어 함께 N회의 '문화봉사' 활동을 실천하면 되었다. 1등 상금이 300만 원, 2등이 200만 원... 몇 달 뒤에 우리 동아리는 멋진 연주 홀을 대관하여 공연을 올리려면 예산이 조금 빠듯했는데, 제격인 공모 사업을 발견한 것 같았다. 기획부장으로서 지나칠 수 없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지원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지원 여부를 고민할 틈이 없었다. 일단 지원하기로 마음은 먹었고, 어떻게든 되게 만드는 데 집중했다. 전공이 전공인만큼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하여 영상을 제출해야 하는 지원 방식에는 막힘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ENFP 성향인데, 충동적인 낭만추구형이며 직관에 매우 충실하다. 이 성향 덕분에 메리가 지금까지 유지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진심이다.)
그런데 평범한 대학생 오케스트라 동아리 단원들과 무슨 '문화봉사'를 한단 말인가? 대책이 필요했다. 동아리 방으로 들어가 생각을 했다. 일단 소외계층을 위해 찾아가는 연주 행사를 하면 될 것 같았다. 각종 복지관에 전화 해볼까? 소규모 앙상블 편성으로 연주할 수 있는 곡은 많을테니 문제 없어보였다. 그런데 이대론 아쉬웠다. 어느 정도의 MSG가 필요했다. 당시 클래식을 좋아하는 언론학도로서 푹 빠져있는 다큐멘터리가 있었는데, 바로 '엘 시스테마(El Sistema)'였다. 베네수엘라 빈민가의 아이들을 악기로 교화한 인류애 넘치는 사례였다. 심지어 그 프로젝트를 통해 성장한 한 꼬마가 지금 세계적인 지휘자가 되어서 전 세계가 주목하는 '바람직한 오케스트라 교육' 사례로 꼽히기도 했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꿈의 오케스트라'라는 이름으로 각 지역마다 청소년 오케스트라 프로그램이 성행했다. 각종 문화재단의 지원과 함께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분위기였다. (물론 우리나라의 오케스트라 교육은 빈곤층 보다는 부유층이 향유하는 문화에 가깝게 운영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생활 예술의 기회를 제공하는 교육의 방향성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므로, 전국 각지의 꿈의 오케스트라 프로그램은 볼 때마다 응원하고 있다.)
'오케스트라, 다큐멘터리?'
뭔가 멋진 그림이 나올 것 같았다. 엘 시스테마를 모티프 삼아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싶었다. 일단 대학생 단원을 모아서, 버스킹 공연을 나가자. 재능기부를 하는 거야. 지하철 역사는 어때? 마치 유럽에서 발 닿는 곳마다 거리 공연을 하듯이 우리나라에서도 가능하지 않을까? 아, 너무 좋아. 서울 시내 곳곳에는 지하철 역이 다 있지 않은가! 생각만해도 이미 멋있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유일한 작곡과 선배에게 전화를 했다. 주영이었다.
"오빠, 저 재원인데요! 문화봉사라고, 공모전 지원을 위한 활동을 기획하는데 도와줄 수 있어요?"
비전공생의 입장에서 물어볼 법한 몇 가지 질문을 건네고, 주영이 답을 해줬다. 어느 정도 편성으로 어떤 곡을 할 수 있을 지, 버스킹이라거나 플래시몹과 같은 이벤트가 가능할 지, 그리고 무엇보다 조금 더 괜찮은 MSG는 없을 지에 대한 의견까지 물었다.
"청소년이랑 같이 하는 건 어때?"
당시 주영은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으로 교생 실습을 하고 있었는데, 학교에서 청소년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다보니 자연스럽게 아이디어를 제안한 것이었다.
"청소년이요? 우리 학교 근처에 고등학교가 있나?"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당시 '멘토링'이라는 게 또 유행이었다. 청소년과 함께하는 대학생 오케스트라라고 하니 한층 더 문화봉사라는 취지에 부합하는 듯 했다. 대학생 멘토가 청소년 멘티와 하나의 오케스트라가 되어 하모니를 이룬다. 벌써 다큐멘터리의 시놉시스가 그려졌다.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나는 그대로 동아리 내 서울 지역 고등학교를 나온 선배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다행히 회기동에 위치한 우리 학교와 근접한 고등학교를 추천 받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주영과 함께 '한국삼육고등학교' 오케스트라 담당 음악 선생님과 면담을 했다. 일사천리로 '청소년과 대학생이 함께하는 오케스트라'의 기획안이 짜여 PPT 장표에 담았고, 영상으로 피칭하는 모습을 녹화해 제출했다. 이래저래 판을 벌려 놨더니 다행스럽게도 '메리츠아츠봉사단' 2등으로 수상하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청소년과 함께하는 문화봉사단 '메리오케스트라'의 시작이었다.
'청소년과 함께하는 대학생 오케스트라'의 대표로서의 활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2015년, 당시 스물 한 살이었던 나는 직함에 대한 개념이 따로 없어서 그냥 어떤 단체를 대표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대표'라고 칭했다. (소위 말하는 '학생 대표'의 느낌이었다. 훗날 비영리 단체의 대표로 불리게 될 줄은 모르고 지었다.) 그리고 메리츠아츠봉사단의 발대식을 거쳐 2015년 6월 26일 부로 단체 활동을 시작했다. 이제는 매년 기념하는 우리 단체의 창단 일이기도 하다. 2015년 12월까지 5회의 문화봉사를 기획해야 했고, 이듬 해 활동 보고회에선 일련의 활동 과정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를 제출하기로 했다.
동아리 지원금을 받겠다는 명목이긴 했지만 활동에 임하는 나의 태도는 꽤나 진심이었다. '좋아서' 하는 일이여서 그런지 ‘일’이라기보다 재밌는 활동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청소년과 함께 합주를 할 대학생 단원을 모집 했고, 시간을 맞춰 고등학교 음악실을 방문했다. 처음 보는 사이였지만 같은 악보를 나눠 갖고 옆 자리에 앉아 합주를 했다. 이를 오케스트라에선 한 풀트(Pult)에 앉는다고 표현하는데, 풀트 메이트끼리 서로 인사를 하고 자기소개도 하며 어설픈 멘토링을 이어갔다. 대학생 단원들은 자신의 이름 석자와 함께 학과를 적은 이름표를 목에 걸었다. 나의 경우 기획자로서 촬영과 운영을 맡아야 했는데, 우리 프로젝트의 취지는 '시민을 대상으로 재능기부 공연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등학교를 방문하는 것 뿐 아니라 대학생 단원끼리의 합주도 진행했다. 메리츠아츠봉사단에서 예술가 멘토를 매칭해주었는데, 우리는 지휘자님과 함께하게 되었다. 주로 주영이 우리를 지휘하고 그의 지휘밥을 지도하는 시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여담이지만, 나는 작곡과면 다 지휘를 하는 줄 알았는데 당시 주영은 인생에서의 첫 지휘를 했다고 한다. 굉장히 터무니 없는 생각이라는 것을 첫 기수 활동을 마치고서야 깨달았는데, 비전공자인 내가 무턱대고 오케스트라를 만들어서 주영에게 지휘를 시킨 셈이었다. 아무튼 그 길로 지금까지 주영은 내 연락처에 '박마에'(마에스트로를 뜻하는 애칭)로 저장돼 있고 우리의 첫 다큐멘터리 영상에서 그가 얼맘나 긴장을 하며 첫 지휘를 했는지도 볼 수 있다.
우리와 함께한 첫 번째 청소년 단체, 한국삼육고등학교 오케스트라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다시 생각해도 너무나 감사한 인연인데 이광주 음악 선생님께서 정말 많은 도움을 주셨다. 학교 오케스트라에 이미 갖춰진 다양한 악기는 물론이거니와, 공연 할 레퍼토리 선정부터 공연 장소 섭외까지 큰 조언을 해주셨기 때문이다.
공연 장소를 정하는 것도 맨 땅에 헤딩하듯 이뤄졌는데, 당시 한국삼육고등학교 인근 호선인 5678 도시철도공사 관할 구역이던 몇 곳의 역장실 문을 두드렸고 그 중 화랑대역과의 빠른 섭외가 진행됐다. 덕분에 7월 한 달 바짝 연습을 해서 8월 11일에 첫 번째 거리 공연을 기획할 수 있었다. '메리오케스트라'의 핫 데뷔일이 정해진 것이다.
모든 우연이 겹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엘 시스테마에 관심이 많은 음악 비전공자로서 오케스트라 다큐멘터리 영상이 만들고 싶었고, 대뜸 문화봉사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주영은 청소년 단체를 지도하며 졸업을 앞둔 시점에 진로 고민을 하던 차에 나와 함께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지휘를 할 기회가 다가왔을 때 마다하지 않은 결과였다. '청소년'이라는 키워드도 운 좋게 잘 갖춰진 환경의 고교 오케스트라를 만나 가능했다. '지하철 역'은 또 어떤가? 야외인듯 실내 같은 도심 속 공공 장소이기에 날씨의 직접적인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고, 울림이 좋은 편이라 악기 연주를 하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여러 우연이 겹쳐 우리 단체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창립 멤버인 우리들은 첫 기수의 경험을 토대로 '청소년-대학생 오케스트라-지하철-시민관객'이라는 밸류 체인(value chain)을 통해 지속가능한 문화봉사의 선순환구조를 구축하겠다는 포부를 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