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하철에서 공연을 하는 오케스트라
똑똑. 그 날도 어김없이 낯선 공간을 찾아 문을 두드렸다.
'역장님 계세요?' 누가봐도 앳된 대학생들이 쭈뼛 쭈뼛, 누군가를 찾으러 왔다는 듯 역무실을 둘러본다. 이곳은 지하철 역을 담당하는 직원들과 역장님이 계신 곳. 지하철역은 서울 시민들이 매일 같이 오가는 공간이지만 이들이 찾아온 역무실은 웬만한 시민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다.
"역장님은 지금 안 계신데, 어떤 일로...?"
'아, 저희는 청소년과 대학생이 함께하는 오케스트라인데요!' 첫 문장을 가쁜 호흡으로 뱉고 나서 눈빛을 살핀다. ‘일단 말씀해보시라’는 눈빛을 확인하면 마저 말을 이어간다. '시민관객을 대상으로 찾아가는 문화봉사 공연을 하는 단체인데, 적당한 공연 장소를 찾으러 왔습니다.' 본론을 말하고 나면 크게 몇 가지 반응으로 나뉜다.
'몇 명인데요?' 이건 같이 한 번 둘러보자는 시그널이다. 이 정도면 문 턱에 발 걸치기는 성공이다. 만약 '오케스트라? 우리는 그런 거 해 본 적 없는데... 민원 들어와서 안 돼요.'라고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답변한다면 워닝사인이다. 그럴 땐 재빠르게 치고 들어가야 한다. '저희는 큰북을 울리거나 시끄러운 나팔을 불지는 않아요.(여기서 나팔이란 금관악기를 통칭한다.) 공간만 내어주시면 저희가 알아서 무대 세팅도 하고, 악기도 운반하고, 시민 대상으로 이벤트도 열고 뒷정리까지 깨끗하게 철수합니다!' 수차례 뱉어 본 문장들이라 언제든 장전해 둔 것처럼 말씀드렸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거절 당하는 일이 더 많았다.
"저희는 재량이 없어서요. 본사에 연락하세요."
지하철 역사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공간이다보니, 공연을 하겠노라 말 하면 흔쾌히 허락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충분히 이해한다. 본연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부가적인 활동을 함부로 허락했다간 누군가 민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땐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역장님들이 미웠다. 특히 단체를 운영하기 시작한 첫 해에는 정말 '맨 땅에 헤딩한다'는 표현에 걸맞게 공연 장소를 섭외하고 다녀서 자주 거절을 당했다. 공연을 해 본 이력도 부족하거니와 지하철 역이 운영되는 방식에 대해서도 모르다보니—사실 모르는게 당연하지만—그야 말로 '한 역, 한 역' 지하철 노선을 따라 승하차를 반복하며 역장님들을 찾아다녔다. (당시 제작한 다큐멘터리 나레이션의 한 구절에는 과장을 조금 보태서 '서울 시내 곳곳에 우리의 발걸음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고 서술할 정도였다.)
재밌는 사실은, 메리오케스트라를 시작한 첫 1년 동안 수많은 지하철 역을 오가며 노선 별 특징을 파악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1호선부터 4호선까지를 운영한 '서울메트로' 측은 섭외가 불가능 했다. 이유인즉슨 유동인구가 너무 많은 호선이라 공연을 허락하기 쉽지 않았을 뿐더러 당시 서울메트로는 별도의 '메트로 아티스트' 제도를 운영하고 있기에 사전허가제를 적용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다수의 인원이 움직이려면 몸집이 크기도 하고, 애초에 메트로 아티스트를 위해 마련해 둔 몇 군데의 지하철 역사 무대가 소규모 앙상블에 적합한 사이즈였다. 제도가 존재해도 우리는 부적합한 대상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왕 지하철 역사에서 공연을 기획해야 한다면 솔직한 마음으론, 더 많은 박수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호선에서 공연을 하고 싶었다. 청년대학생들의 학교가 많이 분포하고 있는 1호선부터 4호선에서 공연이 하고 싶었다. 그래서 더욱 서울메트로와의 협업을 위해 여러모로 애를 써봤지만 잘 풀지 못했다.
그런가 하면, 당시 5678호선을 관리하는 '도시철도공사'는 섭외가 수월했다. 우리가 첫 공연을 우연히 6호선 화랑대역에서 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5호선에서 8호선까지의 지하철 역장님들과는 묘하게도 소통이 잘 되었다. 협의가 술술 풀렸다. 역장님께서 우리 단체의 공연 사진과 영상을 보고 지하철 역사 내부에 유동인구가 적당히 많은 시간과 동선을 방해하지 않는 길목을 알려주셨다. 그렇게 하나씩 장애물을 헤쳐나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우리는 자본 없이 단체를 운영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지하철 역사에서 살다시피했던 어느 날.
"우리 본사가 답십리역에 있는데, 거기 직원이랑 연락해봐요."
역장님께서 본사 직원을 소개해주셨다. 그는 동그란 안경을 쓰고, 까무잡잡한 피부에 장난끼 가득한 눈빛의 오씨 성을 가진 대리님. 주변 지인 중 겹치는 이름이 없을 것 같은 이름에 '대리'라는 직함이 붙어 이름 석자에 직함까지 다섯 글자가 마치 고유명사인양 입에 착 붙었다. 한 역, 한 역, 섭외를 하기 위해 발로 뛰던 시절의 메리오케스트라 기획팀에게 한 줄기 빛처럼 다가온 기회였다.
"대표님, 안녕하세요."
대표라는 호칭은 ‘학생 대표'라는 의미에서 붙인 직책이었으나 비영리 단체를 이끄는 수장으로 한 해, 두 해를 거듭 활동하다보니 잘 모르고 붙인 직책인 것 치곤 적합한 수식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서울 및 경기 지역의 청소년과 청년 대학생을 모집하여 운영하는 형태는 사뭇 연합동아리와 유사하나 실질적으론 사회적협동조합이나 법인의 규모와 맞먹는 활동으로 커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스물 한, 두 살 먹은 나에게 ‘대표님'이란 호칭은 조금 부담스러웠다. 당시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나에게 ‘어른'으로 다가왔고, 아직도 나는 학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당시 나는 의젓한 어른인 척 해야만 했다. 멋쩍게 대표 행세를 하긴 했지만 알게 모르게 내가 너무나 어린 성인이라는 데에서 오는 자격지심을 감출 필요가 있었다.
그 날은 도시철도공사 홍보팀 소속인 오 대리님이 한 건 해냈다는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달리는 열차에서 공연 하실거죠? 가능할 것 같아요."
"정말요?"
"6호선에서 하는 거 어떠세요?"
그동안 도시철도공사 관할 역사에서 수월하게 섭외가 이뤄진 덕분에 무탈히 활동을 이어오던 참이었다. 특히 7호선 이수역의 경우에는 수 차례 대규모 오케스트라 공연을 기획했고, 감동적인 경험도 많이 이뤄냈다. 그렇게 공연 경험이 쌓여 갈 수록 지하철 역사에 그칠 게 아니라, 실제로 달리는 지하철 칸에서 공연을 하면 멋있을 것 같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마침 오 대리님과의 인연이 닿은 것이었다.
“그냥 공연을 할 순 없으니, 지하철과 연관된 주제를 정해서 공연을 하는 건 어때요?”
“너무 좋죠. 저희 공연 때마다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엑스배너(X자 거치대의 배너)야 늘 만드는 건데, 어떤 메시지를 담으면 될까요?"
“지하철 안전 캠페인 정도면 좋을 것 같아요.”
그렇게 메리오케스트라는 달리는 지하철 칸에서의 특별한 플래시몹을 기획하게 되었다.
자료 영상: 달리는 지하철 오케스트라 플래시몹(2016)
https://www.facebook.com/watch/?v=512075735656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