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정표 May 10. 2023

아빠와 새빨간 립스틱

바람, 바람, 바람(上)

녹음이 짙게 무르익는 여름의 계절. 바닷가를 고속도로 위를 한 대의 자동차가 시원하게 내달렸다. 어릴 적 머물렀던 [동해]로 오랜만에 향하는 길이었다.


해수면에 비친 햇빛이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반짝이는 광경이 눈에 비쳤다. 겉보기에 무척이나 아름다워 그 사이를 가로막은 차창을 단숨에 열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다 이 문 너머 습하고 끈적이는 열기에 곧 잡아먹힐 것 같아, 새끼손가락만 간신히 들어갈 틈 정도만 소심하게 만들었다.


자동차 내부를 잠식한 차가운 에어컨 바람과 열기가 서린 바닷바람이 부딪혀 만들어진 따뜻한 기운이 이마 끝에 닿았다.


온기는 따뜻했지만 오랫동안 열을 머금은 반쪽짜리 바닷바람답게 습하고, 끈적였다.


조금은 축축하기도 했는데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좋지 않았다. 불유쾌한 기억 하나가, 끈적하고 축축했던 새빨간 입술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언짢아오는 기분에 고개를 돌려 앞자리에서 운전하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운전하는 그의 표정은 지금 어떠할까. 그때는 무슨 표정이었더라. 놀랐었나, 당황했었던가?


[동해]라고 쓰여있는 표지판이 점점 크기를 부풀리며 가까워졌고, 점점 커져가는 글자를 눈에 담을 것처럼 부릅 떴다. 괜스레 지고 싶지 않아서.


크게 뜨여진 눈이 시려올 때쯤 자동차는 표지판을 지나쳐 동해에 더 가까워져만 갔다. 동시에 그동안 묵혀두었던 기억들이 봉인 해제된 것마냥 마구 쏟아져 나왔다.


주워 담기 힘들 정도록 가득히.






16년 전, 남자의 퇴근시간이 날이 갈수록 늦어진 것도 여름 이맘때쯤이었다. 다 같이 저녁식사를 하는 게 당연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한 자리가 비는 게 익숙해져 갔다. 어린 나는 엄하고 무서웠던 가 늦게 온다고 하니 마냥 안심했었던 것 같다. 자그마한 실수에 혼나지 않아도 되고, 욕먹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반대로 엄마의 표정은 어두워져만 갔다. 이따금씩 보이는 모습은 초조해 보이기도, 답답해 보이기도 했다.


이상했다. 우리 못지않게 남자의 부재를 편안히 여기는 그녀였기에 저렇게 안달 난 모습이 뜻밖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내가 모르는 어른들의 문제가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 해 여름은 이상하게 날이 어두워질수록 매미 울음소리가 커졌다. 덕분에 이른 밤잠에 들어야 할 나라의 어린이였던 나는 저녁 내내 설쳐야만 했다. 안 그래도 잠귀가 밝은 편이었는데 매미소리까지 겹쳐지니까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칭얼거리는 나를 달래주기 위해 엄마는 손에 천 원을 쥐어주었다. 용돈을 받고 신난 나는 잠 대신 과자를 먹을 생각에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조그마한 동네 마트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무얼 먹어야 하나


잠들지 못해 칭얼거리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설레는 마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하던 찰나, 인기척이 느껴졌다. 급히 뒤를 돌았다. 아빠였다.


맘 때쯤 남자는 퇴근이 늦어지다 못해 오지 않은 날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니 예상치 못한 만남은 나뿐만 아니라 그에게도 당황스러웠을 것이었다.


생각도 잠시, 이 밤에 무슨 과자를 먹냐고 혼날까 두려워 몸이 자연스레 굳었다. 그러나 남자는 별다른 말 없이 그저 놀랐다는 듯 내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그럴만했다. 그의 손에는 담배 한 갑이 들려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긴 생머리에 새빨간 립스틱이 짙게 칠해져 있던 어떤 여자의 허리가 들려있었으므로.






남자와 나 모두 굳어있었지만 그 여자는 당당했고 자연스러웠다. 우리 둘을 번갈아보더니 곧 "당신 딸이구나"라는 대사를 내뱉으며 웃는 낯짝으로 내 앞에 와 섰다. 분명히 멋모를 나이 었을 텐데도 귀엽다는 듯이 얼굴을 쓸어내리는 손이 불쾌했다.


인상을 찡그리며 얼굴을 팍 드는데 그 순간 이마에 뭐가 닿았다. 뜨겁고 축축한 무언가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이마를 더듬어보니 손끝에 빨간색이 묻어 나왔고 그제야 이마에 닿았던 것이 입술이었다는 걸 알아챘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있자 남자는 흔치 않은 다정한 목소리로 "엄마한테는 비밀이야"라고 나를 살살 달랬다.


어렸던 주제에 촉은 좋았던 것인지 금방 이상한 분위기를 알아챘고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벗어나듯 돌아온 집에서, 웃으며 맞이해 주는 엄마를 보니 숨이 턱 막혔으나 어떤 얘기도 할 수 없었다. 누군가와의 약속 때문이 아니라 더 어두워질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지 않아서, 나는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과연 그때 그 선택이 옳았을까? 바로 얘기해 주었더라면, 가 달라졌을까? 어떤 선택을 했어야만 했을까.


아무리 무시하고 싶어도 불편하게 피어오르는 이 죄책감을 피할 길이 없었. 비록 그녀를 위한다는 마음이었을지라도 결국은 남자의 일탈을 묵인했기 때문에, 필시 이 부채감은 그것에서 기인하는 것이 분명했다.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졌다. 손에 들린 과자봉지를 식탁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왜 먹지 않느냐는 걱정 어린 말을 뒤로하고 다시 잠자리에 누웠다. 매미소리는 여전히 컸지만 더 이상 시끄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한없이 복잡해지는 생각과, 마음과, 상황을 아무도 모르게  큰 소음으로 덮어줄 것만 같아 사그라들지 않았음 했다.


그냥 빨리 이 기분 나쁜 상황이 지나가기를, 모든 것이 해결되기를, 엄마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방충망을 타고 우리 집에 들어온 것은 매미소리뿐만이 아니었는지 잔머리가 가벼이 살랑거렸다. 어지러이 내려앉은 머리카락이 눈꺼풀을 간지럽혔다.

바람이었다.


바람이 찾아들었다.

.

.

.

이전 03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