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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표 Jun 15. 2023

태풍이 지나간 자리

바람, 바람, 바람 (中)

다행히 날이 갈수록 기승을 부리던 더위가 점점 가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몸을 타고 땀이 끈적하게 흘러내릴 만큼 습한 온도는 그대로였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뜨거운 공기는 그 존재를 뚜렷이 드러내 여러 사람을 괴롭혔다. 때문에 그 해 여름이 슬슬 물러날 준비를 하는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했다. 나 또한 얼른 이 여름이 지나 가을이 다가왔으면 하고 간절히 바랬으니까.


그러나 이런 우리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름은 마지막까지 순순히 물러나려고 하지 않았다.






이른 오전, 티비에서는 며칠 후면 태풍이 북상해 밤부터 점차 영향권에 들어 전국적으로 비가 오니 교통안전에 각별히 유의해달라는 아나운서의 일기예보가 차분한 목소리로 흘러나왔다.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불길하리만큼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보였다. 마치 폭풍전야 같았다.


마트에서 마주친 이후로 남자는 기별조차 없었다. 마음이 완전히 떠난 것일까. 아니면 우연히 마주한 자식의 얼굴에 한 조각 남은 양심이 움직인 것일까. 무슨 연유로 연락조차 하지 않는 것인지 알 길이 없으나 확실한 것은 낯선 여자와 있는 남자의 모습은 어린 나에게 만만치 않은 충격이었다. 무지한 어린 시절의 아이조차 이상함을 감지하고 이토록 심란해하는데, 잠시 지나가는 바람에도 휘청거리는 그녀가 이 태풍같은 진실을 이겨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기상청에서 예고했던 대로 맑았던 날씨는 점차 우중충하게 바뀌기 시작하더니 바람을 동반한 빗줄기가 강하게 내리기 시작했다. 거실 창문에는 물에 젖은 신문지가 여기저기 붙여져 있다. 태풍에 대비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어디선가 흘러 들은 소리에 엄마와 나는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열심히 붙였으나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정도로는 곧 다가올 폭풍우를 이겨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만반의 태세를 갖춘 듯 보이지만 실상은 아주 보잘것없는 몸부림이라는 것을.


태풍이 서서히 가까워졌다. 강하게 내려치는 비바람은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당장이라도 문을 부수고 강력하게 들이닥쳐 모든 것을 쑥대밭으로 만들 것 같았다. 심장이 세차게 요동치던 그때,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예상치 못한 존재가 정말 강렬하게 들이닥쳤다.

.

.

.

그가 돌아왔다.


강한 태풍을 등에 지고.






꽤 거세진 빗줄기를 뚫고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모습을 드러냈다. 투명한 파란색 우비를 입고 들어선 남자는 현관문 앞에서 한참을 들어오지 않고 가만히 서있었다. 우비를 타고 흐르는 빗방울이 하나둘씩 바닥에 떨어져 작은 물웅덩이를 만들어냈다. 이런 날씨에 집에 돌아올 줄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터라 그녀도 나도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잠깐의 침묵을 가로지르고 남자가 입을 열었다.


"밥은?"


현관문이 진동할 만큼 쿵쾅거리는 바람. 역시 하늘도 노하신 걸까. 내가 신이라면 그럴지도. 저 뻔뻔하고 철없는 태도에 어처구니없는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그가 오기 전 한차례 저녁 상을 준비했던 그녀는 그 어떤 불평불만도 없이 기계적으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밥솥에서 밥을 푸는 그녀의 뒷모습이 처량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예상과 달리 그녀는 단순히 여리기만 한 여자가 아니었다. 밥그릇을 밥상에 내던지듯 갖다 놓으면서 그녀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비꼬는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에서 밥은 안 주나 봐? 하긴, 사랑이 밥 먹여주나"


다 큰 지금에야 그 의미를 단박에 알아챘을 테지만 그 당시에는 몰랐다. 그저 어리둥절하게 둘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랬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단지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이다. 긴 시간 많은 감정을 주고받았던 그들에게 사랑했던 시간만큼 상대방의 미세한 변화를 못 알아챘을 리가. 그때 그의 표정이 어땠더라. 적잖이 충격받은 것 같은 얼굴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신발을 벗다 말고 한참을 우뚝 서있었으니까. 놀랐지만 애써 숨기려 애쓰는 불쌍함은 덤이었다.


"다 내팽겨 칠만큼 좋디?"


점점 험악해지는 분위기였다. 어린아이 시선에서 표현하자면 마치 둘 사이의 노란 스파크가 무섭게 튀기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말을 듣자마자 그가 아주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흘깃거리며 아픈 말을 내뱉었기 때문이다.


"너 같은 년이 목석같이 구는데, 서방이 집구석에 잘도 붙어있겠다"


자신의 잘못을 떳떳하게 말하고, 심지어는 합리화하는 저 입이 얄미워 노려보고 있을 찰나, 그제야 옆에 내가 있다는 것을 인지한 건지 그녀가 급히 내 어깨를 밀며 잠시 방으로 들어가 있으라고 했다. 불편한 기운이 감도는 거실에 있는 게 나 역시도 어색했기 때문에 잰걸음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호기심을 누가 막을쏘냐. 어떻게 그녀가 알고 있던 것인지, 그는 어떤 방식으로 변명을 할 것인지 전혀 예상되지 않는 시나리오에 문에 기대듯 주저앉아 문 틈 사이로 귀를 바짝 붙이고 이야기를 엿들었다.


하지만 곧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며 웅크리고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랐다. 어린아이가 마주하기 힘든 어른들의 세계 속 언어들이 오고 갔기에 괜스레 겁이 났다. 겁쟁이처럼 염탐하길 바로 포기하고 말았다. 아마 내밀한 이야기들을 통해 받게 될 상처와 충격들이 무서워서 나도 모르게 방어기제를 취한 것일지도 모른다. 속으로 하나.. 둘... 셋... 숫자를 세며 혼자 시간을 견뎠다. 아무리 귀를 막아도 왜 아픈 말들은 그 틈을 기어코 비집고 들어오는지.


아무 잘못 없는 그녀의 결점을 끄집어내 깔아내리는 음성. 난생처음 듣는 비속어로 욕하기 바쁜 소름 끼치는 호통 소리. 사랑하는 사람들이 싸운다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나에겐 전쟁이었다. 불안해 끊임없이 뛰는 심장박동에 스스로가 벅차 끝내 울고 말았다. 그가 너무 밉지만 한편으론 이렇게 우리 가족이 갈라지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느라 무서웠다. 머리가 아파왔다.






한참을 울다 지쳐 잠들어버린 것인지 눈을 뜨니 사방이 고요했다. 물이 흐른 자국을 씻지 못해 볼이 너무 찝찝했다. 문에 기대어 잠든 나를 그녀가 잠자리로 옮긴 것인지 옷은 어느새 갈아입혀져 있었다. 옆자리를 든든하게 채워주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녀 볼에도 옅은 눈물 자욱이 나 있는 것만 같았던 건 나의 착각이었을까. 방충망을 타고 들어오는 달빛에 그녀의 볼이 빛났다. 나의 엄마. 그래, 하나뿐인 우리 엄마. 사랑하지만 결코 닮고 싶지는 않은 그녀. 나는 엄마처럼 상처받으며 살고 싶지 않았다. 그 생각이 지금 내 인생을 형성한 근간이 되는 감정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잠들어 오래전에 꺼진 배가 너무나도 고팠다. 사실 배가 고팠는지 마음이 고팠는지 잘 모르겠다. 얼마 살지 않은 짧은 인생이었지만 그간 지탱해 주던 단단한 울타리 같은 안정감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듯했다. 무언가 먹을 것이 없는지 거실로 나가 보니, 정성스레 차려졌었던 저녁상이 밥상보에 덮여 있었다. 새벽에 혼자 몰래 먹은 것을 알면 엄마는 안타까워하겠지만 상관없었다. 허기진 마음을 이렇게라도 채워야 조금이라도 괜찮아질 것 같았다.


식어버린 밥은 차가웠지만 그냥 입에 욱여넣었다. 고소하고 달았다. 한편으로는 짰다. 건강에 좋다며 열심히 만들던 나물 무침들도 먹었다. 맛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짰다. 말 그대로 눈물 젖은 밥은 너무 맛있었지만 슬펐고 소금기가 가득했다. 울음이 멈추질 않았다. 식탁을 등지고 누운 그녀의 등도 들썩였다. 심란한 밤이었다.






다음 날,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폐허였다. 한바탕 휩쓸고 간 물난리에 입주민들이 받은 피해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무리 치덕치덕 젖은 신문지를 발랐더래도 비바람은 기어코 문 틈을 타고 들이닥쳤다. 그녀의 마음에도 비바람이 할퀴고 간 생채기가 남아있었다. 빨갛게 퉁퉁 부은 눈이 그 증거였다. 평생 한 남자만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포기한 대가가 믿음에 대한 배반이라니. 그 누가 감히 그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까?


엄마는 가만히 서서 남자가 서 있던 현관문에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물웅덩이를 응시했다. 지난밤 들이닥친 불행이 허상이 아니라는 듯 점차 증발하는 와중에도 기어코 마른 흔적을 남기고 만다. 그의 흔적을 흐린 눈으로 보던 그녀는 애써 웃어보려 노력했지만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눈 그 뒤에 어떤 감정이 너울거리고 있을지 전혀 가늠할 수 없다.


침묵이 내려앉은 거실 안, 티비만이 고요히 텅 빈 공기를 채웠다.


"태풍에 대비해 유리창에 젖은 신문지를 붙이시는 분들이 많으셨을 텐데요..."

"사실 전혀 효과가 없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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