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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표 Oct 22. 2023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나의 친애하는 우울(下)

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해왔다. 하지만 그런 나를 늘 낭떠러지에 미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아빠였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조용히 살아도 그가 나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그는 나를 감정 쓰레기통쯤으로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나는 아빠에게 늘 이기적인 년이었음과 동시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년이었다. 싸가지 없다느니, 싹수가 없다느니 등의 이야기들은 또 개소리를 하는구나 하며 넘어갈 정도로 이골이 나 있었지만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듯한 그의 말은 불안한 미래와 불안정한 가족관계로 힘들었던 사춘기의 소녀에게는 또 다른 상처였다.


"너 같은 년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엄마와 싸운 뒤 화풀이를 하듯이 아빠는 나에게 찾아와 폭언을 퍼부었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행태에 마음에 금이 갔는지 눈물이 토독하고 흘렀다.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을 말. 그는 참 다양하게도 나의 마음을 도륙 냈다.


"울어? 네가 뭘 잘했다고 울어! 눈물 그쳐!"


대답하면 대꾸한다고 혼나고, 울면 운다고 혼나고, 가만히 있으면 무시한다고 혼나고. 내 마음대로 눈물 하나 흘리지 못하는 그곳은 나를 옥죄어만 올뿐이었다.


"지 애미 닮아서는"

"너도 똑같아"

"남편 잡아먹을 팔자야 네 년은"


처음으로 아빠를 밀쳤다. 엄마를 들먹이며 나의 삶을 멋대로 깎아내리는 그 말을 참을 수 없었다. 반항을 해도 결국에는 순종적이던 내가 악에 바쳐 고함을 지르니 아빠는 열이 더 올랐는지 머리채를 미친 듯이 잡고 죽일 듯이 흔들었다. 악력에 아파하던 내가 바닥에 떨어지면 그 무쇠 같은 발로 얼굴을, 몸을, 다리를, 쥐 잡듯이 찍어 내렸다. 엄마와 동생 모두 잘못했다며 제발 그러지 말라고 빌어도 멈추지 않던 그는 옆 집에서 이 새벽에 조용히 좀 해달라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멈추었다.


그날 밤, 온몸이 빨갛게 퉁퉁 부어올랐고, 그간 누적되어 온 스트레스에 과로까지 겹쳐 고열에 시달렸다. 안 그래도 무리하던 차에 화병까지 겹치니 몸이 견디질 못한 것 같았다.


침대에 누워 뒤척일 때면 멍든 자국이 자극을 받아 아려왔다. 너무 짜증 났고, 답답했고, 암담했지만 조금이나마 아빠를 당황하게 하고 약 올렸다는 것에 미묘한 통쾌함이 몰려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빠가 퇴근하는 시간이 다가오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어제의 일을 다시 들먹이며 나무라면 어떻게 하지? 그러나 도저히 생각해 봐도 나는 그저 그의 화풀이를 받아들이고만 있었을 뿐, 내가 그 어떤 잘못을 한 것은 없었는데.


다행히 그도 본인의 잘못을 인지했는지 그날 나를 찾아오지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같은 집 아래 공존하지만 서로가 없다는 듯 철저히 무시했다.








티비에 단란한 가족의 모습이 보일 때면 나도 모르게 채널을 돌리게 되었다. 나는 영원히 가져보지 못할 따뜻함이었기에 보고만 있으면 내 처지가 비참해지는 것 같았다.


리모컨으로 이리저리 숫자를 눌러보지만 연휴라 그런지 죄다 가족 예능에, 영화에, 드라마밖에 없었다. 이게 뭐가 그렇게 웃기다고. 별로 재미도 없구만.


방음이 잘 되지 않는 건지 사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기분이 퍽 가라앉았다가 이내 되돌아왔다. 못돼 지려고 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저 사람들은 그냥 연휴를 즐기는 것밖에 더 되지 않나. 이런 날에 본가에 내려가지도 않고 혼자 있는 나야말로 바보 같지. 하...


수건을 가볍게 걸치고 도망치듯 나와 밤거리를 달렸다. 그러고는 목적지 없는 이 거리 끝 어딘가에서 목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토하듯 내뱉었다.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골목에서 아슬하게 달린 가로등 불빛은 곧 사라지고 싶은 내 심정을 대변하듯 존재를 점점 희미하게 지우고 있었다.


밭은 숨을 쉬느라 깊게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응시했다. 서울의 밤하늘은 생각보다 많은 별빛을 벗 삼고 있었다. 방황하던 발걸음을 꽤 오래 묶어둘 만큼 말이다. 손을 들어 가까운 가장 밝아 보이는 별부터 하나씩 헤아려보았다. 밝은 별 하나, 둘, 셋....열. 어디까지 세었는지 헷갈릴 때면 처음부터 다시.


그렇게 한참을 의미 없는 행위를 반복했다. 잠시라도 현실을 망각하고 싶다는 발악이었다. 그럼에도 현실은 숫자 사이를 불쑥 비집고 들어온다. 세던 손가락을 어정쩡하게 접어 주먹으로 급히 가슴을 거세게 쳤다. 아무래도 가슴에 돌이 얹힌 것 같다. 아니면 이렇게 답답할 수가 없다. 한없이 무겁게 가라앉는 기분을 느끼며 뒤돌아 왔던 거리를 다시 거슬러 올라갔다.


뛰쳐나왔지만 이마저 어설픈 방황이었다. 착잡한 심정에 발걸음을 질질 끌었다. 그러나 결국 돌아갈 곳도 한 곳밖에 없었기에 다른 선택지는 없다.


집에 돌아와 소파에 무너지듯 털썩 앉아 밤을 지새웠다. 티비도 켜지 않은 방은 어두웠고, 간간히 어린아이와 어른들의 웃음만이 빈 공간을 가로질렀다.


"아이구, 잘하네 우리 딸"

"누구 닮아서 이렇게 예쁠까-"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닌걸 알았음에도 따스했다. 더 듣고 싶어졌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아빠의 따뜻한 칭찬과 격려. 마치 내가 딸이라도 된 듯한 기분에 벽 쪽으로 천천히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너를 위한 말이 아니라는 듯이 더 이상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다.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그 공백을 누군가의 말이 대신 채웠다. 애써 괜찮은 척하려 했지만 사실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얼굴을 거칠게 쓸어 올렸지만 터져 나오는 울음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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