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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루냐가 독립을 소망하는 날
라 디아다

by 마케터 아델

300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패배의 순간

9월 11일 라 디아다 La Diada를 맞아 카탈루냐 곳곳에서 크고 작은 시위들을 벌어졌다. 카탈루냐는 300년 전 패배한 날을 잊지 않기 위해 9월 11일을 공휴일로 지정했다. 이 날은 카탈루냐 주만 쉬는 공휴일이다.


1714년 9월 11일 카탈루냐의 군대는 바르셀로나 몬주익 성에서 프랑스 부르봉 왕가 펠리페 5세의 군대에 포위된 채 합스부르크 왕가 카를의 군대와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위트레흐트 조약이 맺어지면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군대는 철수하였고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승리로 전쟁은 마무리되었다.


이렇게 카탈루냐는 14년간 이어진 왕위 계승 전쟁에서 패하였고 500년간 지켜오던 카탈루냐의 아라곤 왕국도 사라지게 되었다. 스페인이 카탈루냐를 지배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다.


일부 카탈루냐 사람들은 이 날 이후부터 지금까지 스페인의 지배하에 식민지로서 취급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스페인은 합스부르크와 부르봉 왕가의 자손들에 의해서 통치되어왔다. 1700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로스 2세가 스페인을 35년간 통치한 후 자손이 없이 사망하자 스페인에서의 합스부르크 혈통은 끊어졌다.


그의 이복누나였던 마리 테레즈는 자신의 손자인 부르봉 왕가의 필리프에게 카를로스 2세의 모든 영토를 물려주었으며 이로 인해 부르봉 왕가의 필리프는 스페인의 펠리페 5세가 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스페인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면서 왕위 계승 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스페인 영토 확장을 막기 위해 잉글랜드,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도 합스부르크의 편에서 전쟁에 참여했다.


카탈루냐의 자치권을 박탈하려 했던 펠리페 5세와 달리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 대공은 카탈루냐에게 자치권을 약속하며 연합군과 함께 자신을 지지할 것을 요청했다.


10년간 전쟁이 이어지던 1711년 신성 로마제국 황제 요제프 1세가 사망함에 따라 그의 동생이었던 카를이 왕위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부르봉 왕가의 스페인 - 프랑스뿐만 아니라 합스부르크 왕가의 스페인 - 오스트리아 영토 확장도 막아야 했던 다른 유럽 국가들은 이 두 가문과 함께 합의를 하게 된다.






위트레흐트 조약

1713년에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에서 맺어진 이 조약에 의해 스페인의 왕위 계승 전쟁이 종료되었다. 부르봉 왕가의 필리프는 펠리페 5세로서 스페인의 왕으로의 즉위가 인정되었다. 하지만 그와 그의 후손들은 프랑스의 왕권 계승을 포기해야 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 대공은 스페인의 왕권 계승을 포기하고 나폴리, 사르데냐, 밀라노 공국을 받았다.


펠리페 5세를 지지한 바스크 지방과 달리 카를 대공을 지지했던 카탈루냐는 자치권을 완전히 상실한 채로 스페인의 한 지방이 되었다. 펠리페 5세는 카탈루냐를 통치하던 아라곤 왕국을 흡수하고 카탈루냐 지방을 다스리는 법, 정치, 통치에 관한 책까지 따로 발행하며 강하게 다스리기 시작했다.


12세기부터 500년간 독립적인 자치권을 갖고 있던 카탈루냐에는 펠리페 5세에게 주권을 완전히 빼앗겼다.






주권을 빼앗긴 그날
독립을 위한 그날

하지만 300년이 넘는 시간 내내 카탈루냐 사람들이 지금처럼 강하게 독립을 원했던 건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독립'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것조차 어색했었다고 한다. 이런 카탈루냐 사람들이 독립을 강하게 요구하게 된 건 카탈루냐 시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스페인 정부가 침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08년 스페인 경제 위기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 카탈루냐 사람들은 스페인 정부에게 개선을 요구했지만 스페인 정부는 듣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스페인의 적으로 몰아갔다.


매년 형식적으로 해오던 카탈루냐 독립 찬반 투표를 2014년 스페인 정부가 불법화하면서 카탈루냐 사람들의 화는 폭발했다. 가장 민주적 절차인 투표를 하루아침에 불법적인 행위로 만든 정부의 태도에 카탈루냐 사람들은 기본적인 주권조차 보호받지 못한다고 느꼈고 독립을 외치기 위해 9월 11일 그랑비아 Gran Via에 모였다.


이때부터 더욱 본격적으로 매년 9월 11일은 카탈루냐의 독립을 위해 사람들이 모이는 날이 되었다.






시위
평화로운 문화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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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에 처음 여행 왔을 때 참여했던 2014년 디아다를 시작으로 총 4번의 디아다에 함께 했다. 내가 직접 친구들과 참여했던 디아다는 평화로운 마음으로 같은 뜻을 하는 사람들과 모이는 것을 감사하며 치러내는 이벤트였다.


매번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지는 그런 시간이었다.


카탈루냐의 독립을 바라며 개최하는 이 날의 이벤트는 평화로운 문화 행사이다. 2019년 10월 카탈루냐 정치인들에게 10년이 넘는 실형을 선고했을 당시 극히 일부가 과격했을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축제에 온 것처럼 친구 혹은 가족과 함께 행사를 즐긴다.



인간 탑 쌓기, 전통춤인 사르데나와 같은 카탈루냐 전통문화를 함께하거나 카드 섹션, 파도타기와 같이 주최 측에서 준비한 활동에 참여한다.


수많은 사람들과 한마음으로 카탈루냐의 독립을 바라는 이 시간 자체가 소중하다는 친구 어머니의 말씀이 그들이 9월 11일을 대하는 태도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듯하다.






계속되는 희망

2020년 9월 11일 올해는 코로나 19로 인해 예전과 같은 행사는 하지 못했지만 카탈루냐 사람들은 희망을 잃지 않고 그들이 소망하는 것을 위해 거리로 나왔다.


철저히 마스크를 하고 사람들 사이에 거리를 두고 카탈루냐 국기를 몸에 두른 채 원하는 나라를 위해 목소리를 냈다.



그 모습을 뉴스로 보면서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날을 위해 그들은 계속해서 희망을 이어갈 것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 아델


한국 회사 생활을 정리한 후 3개월 동안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났다. 한 달을 보낸 바르셀로나는 꼭 살아보고 싶은 도시가 되었고 한국에 돌아온 지 6개월 만에 다시 떠나 5년이라는 시간을 바르셀로나에서 보냈다. 바르셀로나에서 카탈루냐 사람들은 나의 또 다른 가족이 되었고 다양한 국적의 유럽 사람들은 내 회사 동료 혹은 친구가 되었다. 바르셀로나 도시 자체를 너무 사랑했지만 이방인으로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는 그 도시를 사랑하는 마음만큼 미워하는 마음도 크기를 같이 하고 있다.




'나의 바르셀로나'는 이런 기억들을 조금씩 적어보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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