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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아현 Aug 18. 2023

대원의 소원 3-2

2023년 아르코창작기금 선정작

   정작 주영은 심드렁했다. 방에 있는 티브이에 있을 거라고 했다. 그대로 곧장 몸을 돌려 리모컨을 들고 검색을 시작했다. 평소라면 주영에게 영화를 켜는 것까지 해 달라며 귀찮게 했을 테지만 이번에는 조심스러웠다. 영화의 첫 장면이 무엇일지 몰라서였다. 환갑이 다 되어가는 아저씨가 영화를 보고 싶다며 골라 틀었는데 예상치 못한 장면이 갑자기 나온다면 어느 집 딸이라도 당황할 테다. 무엇보다 관자놀이에서 느껴지던 두근거림이 가라앉기는커녕 귓바퀴와 뒤통수까지 얼얼하게 퍼져 있었다. 이리저리 버튼을 눌러대며 어렵게 영화를 찾았다. 핸드폰은 충분히 익숙해졌는데 티브이 리모컨은 방식이 달라 그런지 익숙해지지를 않는다. 핸드폰보다 오래 쓴 것인데도 그렇다. 아무래도 평소에는 자주 쓰지 않는 기능이라 그런 것이겠지. 영화를 찾아낸 대원은 망설임 없이 결제 버튼을 눌렀다. 결제 비밀번호는 0000. 실은 바꾸는 방법을 몰라 계속 이렇게 쓰고 있다. 누가 집에 들어와 티브이로 영화를 볼 것도 아니라서 상관없었다. 그나저나 가만. 〈홍연〉의 가사 속 붉은 실은 〈왕의 남자〉 누구와 누구의 것이더라? 대원은 영화를 본 지 너무 오래되어 가사의 주인공들 얼굴을 떠올리기 어려웠다. 오늘은 일단 이 영화를 보고, 다른 날에 〈왕의 남자〉를 한 번 더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내내 긴장감에 휩싸여 영화를 봤다. 마른침이 꿀떡꿀떡 넘어갔다. 〈파아란〉을 몰랐다면 이 영화를 어떻게 봤을까. 조금 지루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초반에는 가사의 주인공들이 누구인지 생각하느라 통 집중하지 못했다. 영화의 후반부에 가서야 가사 생각은 잊고 온전히 영화에 몰입했다. 우연히 봤다면 흔해 빠진 누아르 영화라고 생각했을 테다. 역시 아는 것만큼 보이는 것이다. 대원은 그 말을 오랜만에 체감했다. 영화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파아란〉의 가사를 떠올렸다. 가사와 함께 영화의 몇 장면이 대원의 머릿속에서 다시 재생됐다. 이 영화를 보고 그렇게 아름답고 애틋한 노래를 만들어 내다니. 아무래도 예은 님은 천재임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이런 경험 자체가 대원에게는 너무나 신선한 일이었다. 그저 노래를 듣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노래가 만들어진 배경을 이해하고 공유하는 일은 처음 겪어 보는 즐거움이었다. 곧장 다시 핸드폰을 들어 아까 보려던 게시물들을 하나씩 눌러 보기 시작했다. 대원은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노래와 영화를 연관 지어 보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의 감상을 공유하고 거기에서 비롯된 또 다른 창작물을 음미하는 일이 이렇게나 재미있다니. 요즘 사람들이 핸드폰에 고개를 파묻고 왜 그렇게 바쁜가 했더니 그 안에 너무나도 크고 재미있는 세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 안에는 이런 영화도 있고, 노래도 있고, 사람도 많으니까. 예전에 어디선가 인터넷을 보고 정보의 바다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여기는 바다다. 관심사만 있다면 온갖 것을 찾아내고 즐길 수 있는 무제한의 바다. 대원은 자신의 방이 한 평만큼 더 넓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여운이 가시지 않은 대원은 두 사람이 나눈 감정을 무어라 부르면 좋을지 한참 생각했다. 멍하니 머릿속에서 단어를 고르던 대원은 마음에 드는 말을 골랐다. 우애. 그래, 그건 우애다. 그렇다면 가사는 아무래도 주인공인 재호와 현수의 것이겠지. 세대를 뛰어넘은 두 남자 사이의 끈끈함이 대원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런데 어쩐지 대원에게는 다른 인물인 병갑의 혼잣말로도 들렸다. 대원은 잠들기 전까지 한참이나 병갑이 안쓰럽고 불쌍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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