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에게는 어버이가 있습니다. 부모에게 자식들이 있는 것처럼 자식들에게는 반드시 부모가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는 세상을 각종 물질들이 무질서하게 존재하는 흑암의 세계로 만들지 않고, 유기적인 관계가 성립하도록 하여 사회를 살만한 공간으로 만드는 기본 질서입니다.
짐승들 중에서 사회성을 가진 대표적인 종이 늑대입니다. 늑대는 포유류 중 유일하게 일부일처제를 유지하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늑대의 무리를 구성하는 원리에 있는데, 늑대는 엄마 아빠 늑대가 우두머리가 되고 그 자식들이 부하 늑대가 되어 무리를 유지하고 사냥을 합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우두머리 늑대 둘만 짝짓기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우두머리 둘 중 하나의 형제가 부하로 있는 수도 있습니다. 본능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지만, 만약 우두머리가 아닌데 짝짓기를 하면 우두머리 부부가 태어난 새끼를 죽이기도 합니다. 가족끼리 결혼을 하는 근친혼이 일어나서 유전적으로 퇴행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무리가 너무 커졌다 싶으면 자식들을 분가시켜 새로운 무리를 만들고, 무리를 짓지 못하고 혼자 떠도는 늑대가 있으면 무리의 막내로 받아주기도 합니다. 우두머리 부부가 새끼를 낳으면 부하늑대들이 자신의 동생들을 보살펴 주고 어미가 늙으면 자식 늑대들이 부모를 부양합니다.
근친혼으로 인한 퇴행을 막고 조직을 합리적으로 운용하는 지혜를 본능으로 터득한 종이 늑대입니다. 만약 배우자가 죽으면 그때는 재혼을 합니다. 재혼 상대가 되는 늑대는 각각 수컷과 암컷 중 가장 억세고 강한 늑대가 됩니다.
늑대가 효심이 있어서 늙은 부모를 부양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그 무리를 이끌어나가는데 필요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터득한 생존방식이겠지요. 그래서 늑대는 영리한 동물로 분류됩니다.
사회란 부모가 그들의 자식을 낳아서 기르고, 장성한 그 자식은 늙은 부모를 부양하며, 또한 그들이 이웃과의 협력을 도모하여 평화를 유지하는 조직체계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세상이 혼란스럽고 다툼이 일어나는 이유는 이러한 사회의 조직체계의 혼란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조직의 연결고리는 가족입니다. 가족의 확장은 이웃이고, 이웃의 확장은 세상입니다. 당연히 범위가 커질수록 연결고리의 결합력은 느슨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늑대의 사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늑대는 개과(科) 동물인데, 늑대보다 못한 인간은 개보다 못한 인간이 됩니다.
우리 집의 강아지 <봄이>는 그렇게 똑똑한 종류의 개는 아닙니다. 그러나 30~40개의 어휘를 이해하고 있고, 감정의 기복을 느끼며, 주인이 외출하는지 출근하는지를 구분합니다. 출근할 때는 함께 가자고 매달리지 않습니다. 아마도 개를 키우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느끼겠지만, 외출하고 돌아올 때 주인을 반갑게 맞이하는 그 절절함은 아주 감동적입니다. 하루도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오랜 기간 동안 길들여진 짐승의 본능적인 행동일 것이겠지만, 그래도 나는 매일 반갑게 맞이해 주는 봄이로부터 감동을 받습니다. 주인이 개를 버리는 경우는 있지만, 개는 주인을 버리지 않습니다. 여전히 봄이와 나와의 소통이 완전하지는 않지만(완전해질 수도 없겠지만) 눈을 통하여 무언가를 주고받는 듯한 교감이 이루어집니다. 이 정도가 되면 봄이는 가족으로서의 존재로서 인정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됩니다. 짐승인 개를 사람의 자식처럼 생각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개를 집안에서 키워보지 않고서는 이러한 개와 사람과의 감정적 교류를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반려동물(伴侶動物)의 수가 많아지고 있음은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이웃과의 관계가 원만하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반증일지도 모릅니다. 가치지향(價値志向)의 사회로부터 목표지향(目標志向)의 사회로 지나치게 치우쳐있지 않은지 반성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사람을 그 사람이 가치고 있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능력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우리에겐 부족합니다.
보통 관계라고 하면 특정한 이해를 사이에 두고 연결되는 인연을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이해관계에 기반을 두는 관계는 세상을 매우 무질서하고 배타적으로 만들 뿐 아니라 목적으로 삼았던 이득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면 관계는 소멸되며, 그 후에는 때때로 적대관계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지속적인 관계는 인간으로서의 관계를 존중하는 마음이 있을 때 가능하며, 인간을 존중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관계는 지속하기 어렵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모두가 홀로 있는 자가 되며, 그런 만큼 외로워집니다. 외로움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고는 하지만, 많은 사람은 이 외로움을 고통으로 인식합니다.
이 외로움이라는 말만으로 반려동물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생각을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반려동물을 키우는 중요한 동기임에는 분명합니다. 외로움으로 인한 고통을 줄여주기 때문입니다.
반려동물보다 더 좋은 해결책은 가족입니다. 가족은 어버이와 자식을 구성원으로 하여 이루어집니다. 어버이는 자식의 존재를 조건으로 하여 성립하는 말입니다. 자식도 어버이의 존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어버이는 자식의 양육을 책임지며,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안은 끊임없이 자식의 행복을 책임지려고 노력합니다. 때때로 흔들릴 때도 있지만, 이타적인 사랑에 가장 가까운 사랑이 어버이의 자식에 대한 사랑입니다.
자식은 어버이가 되기 전에는 어버이의 마음을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버이를 서운하게 하거나 슬프게 만들기도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자식이 나이가 들어서 어버이가 되면 다시 그들의 어버이가 가졌던 어버이로서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대물림입니다. 우리의 유전자에는 이런 어버이로서의 덕목 같은 것이 기록되어 대물림되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은 이런 대물림으로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어버이의 부활(復活)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대물림을 통하여 후세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할 책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올바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버이는 이 세상에 대한 무한책임을 지고 있는 셈입니다. 자식은 다음 세대의 어버이로서, 그 다음의 자식은 또 그 다음 세대의 어버이로서 대를 물려가며 책임을 져야 합니다.
어버이날은 자식이 어버이를 그리워하며 감사하는 뜻으로 만들어진 기념일이지만, 어버이로서의 책무를 스스로 확인하고 다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내가 더 이상 자식이 아니라 어버이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