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형기는 그의 시 <낙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떠날 때, 가야할 때를 분명히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떠날 때가 언제인가는 때때로 자기 자신보다 타인의 입장에서 보아야 더 잘 알 수 있기도 합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만큼 수련하고 대비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자기가 처해있는 역사적 입장이나 상황을 정확하게 알기 어려우며, 우리 중의 많은 사람들은 이에 대비할 만큼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체로 사람은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기적인 입장으로 되기 쉽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므로 그것이 주변에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지만, 이기적으로 되지 않기 위해서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늘 점검하고 수련하는 마음으로 자기를 갈무리하지 않으면 이기적인 그저 그런 한사람에 지나지 않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소설가 박완서는 한국일보에 기고한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2002. 6. 5)라는 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늙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산천이나 초목처럼 저절로 우아하게 늙고 싶지만 내리막길을 저절로 품위 있게 내려올 수 없는 것처럼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나는 이 나이가 좋다.
마음 놓고 고무줄 바지를 입을 수 있는 것처럼 나 편한대로 헐렁하게 살 수 있어서 좋고 안하고 싶은 건 안할 수 있어서 좋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도 않다. 안하고 싶은 걸 안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좋은데 젊음과 바꾸겠는가. 다시 태어나고 싶지도 않다.
볼꼴 못 볼꼴 충분히 봤다. 한번 본 거 두 번 보고 싶지 않다. 한 겹 두 겹 책임을 벗고 점점 가벼워지는 느낌을 음미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소설도 써지면 쓰겠지만 안 써져도 그만이다.
마음속에 나를 억압하는 찌꺼기가 없어져서 못 쓰는 거라면 그 또한 얼마나 좋은 일인가. 결국은 가벼워지기 위해 썼다는 게 가장 맞는 말이 될 것이다.」
박완서는 하고 싶지 않을 걸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자유롭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자유는 하고 싶지 않다고 말 할 수 있어서 얻어진 자유를 말하기보다는, 하고 싶지 않다고 선언할 수 있을 만큼 사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내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으면 다른 걸 새롭게 쥘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진정한 자유는 새로운 걸 손에 쥐어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아서 그 사물로부터 자유로워진다고 말하는 편이 더욱 설득력이 있습니다. 마음속에 나를 억압하는 찌꺼기가 없어져서 좋다고 함은 마음속에 남아있던 여러 형상의 미련과 구속이 다 사라졌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깨끗하게 정리하고 닦아내면 반들거리고 윤이 나겠지요. 「볼꼴 못 볼꼴 충분히 봤을」만큼 지나간 세월의 흔적에는 세월의 길이만큼 상처가 많음을 말해줍니다. 참척(慘慽)의 아픔조차도 정리하고 피안의 세계로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의 담담함이 느껴집니다. 소설가 박완서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가 가진 깊은 사유와 내면의 아름다움이 한 자락 드러나 보이는 듯합니다.
<토지>를 쓴 소설가 박경리는 그의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에 실린 시 <옛날의 그 집>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나를 지켜주는 것은/오로지 적막뿐이었다/그랬지 그랬었지/대문 밖에서는/늘/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다/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모진 세월 가고/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늙어서 편안하다고 합니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해졌다고 합니다. 내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고, 이제 남은 것은 버리고 가도 될 만큼의 것들만 남아있다는 말이겠지요. 남겨져 있는 모든 것이 이제 버려도 될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일 수도 있겠고요. 삶은 짐승들과의 전쟁처럼 처절하고 치열하였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자신을 지탱해주고 사마천(사마천은 궁형宮刑을 당한 후 환관이 되었으나, 사기史記를 완성하였지요. 토지를 쓴 박경리는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사기를 완성한 사마천으로부터 큰 격려를 받았을 것으로 보입니다)이 자신을 지켜주었다고 말합니다.
이 글은 이제는 편안해진 삶의 막바지에 와 있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세상과 추하지 않게 작별할 준비가 된, 모진 세월을 겪어낸 노인의 독백입니다. 이 시는 읽을수록 감동이 전율(戰慄)로 다가옵니다. 거듭 읽고 읽으면 마음이 흐트러져서 무너지게 됩니다.
그렇게 나이가 많이 들지는 않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아집니다. 나이가 들면 떠나야 하는 시기에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일에서 떠날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부터 어떻게 떠날 것인가를 생각하고 결정해야 할 시점이 된 것입니다. 시인 이형기는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뒷모습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나이가 들면 추해지거나, 추해 보이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나이가 들수록 지금까지의 입장과 위치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을 바꾸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삶의 양식에 고정되어 있으면서 그것을 표준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대부분은 이런 삶의 방식으로부터 크게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공정한 입장에 있는지, 얼마나 편협한 입장을 고집하고 있는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그대로 살아가더라도 그렇게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웬 만큼의 바람으로는 일렁이지 않는 큰 호수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요. 물속에 잠겨있을 뿐이지요. 그런 모습은 품위가 있거나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일지, 미운 뒷모습을 보일지는 자신의 선택에 따릅니다. 말끔하게 정리하여 깨끗하고 아름다운 뒷모습을 선택하고 싶다면, 떠나기에 충분할 만큼 고개를 숙이고 마음에 가득한 아집과 욕심을 버리는 노력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죽기 전에 완벽하게 정직한 삶을 한 번 살아보고 싶다(<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산문집)고 말한 박완서처럼 정갈한 삶의 기간을 가져보고 싶습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