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곡을 처음 읽은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인데, 당시에는 이해하기 어렵고 재미없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최근에 이 신곡을 다시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신곡은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e)가 1307년경부터 쓰기 시작하여 그가 죽은 1321년에 완성한 시입니다. 신곡은 지옥편(地獄篇 inferno), 연옥편(煉獄篇 purgatorio), 천국편(天國篇 paradiso)의 세 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목에 희극(喜劇 commedia)이라는 말이 들어있는 것은 지옥편을 제외한 연옥편과 천국편에서는 희망적이고 즐거운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행복한 결말(happy ending)이기 때문에 희극이라고 한 것이지요.
신곡은 이런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문득 눈을 떠보니 반평생이 흘렀네
사방에는 끝도 없이 펼쳐진 어두운 숲
길다운 길 하나 없는 절망의 심연
아, 나는 거기 있었네」
단테가 33살 되던 해 어느 날 어두운 숲속을 헤매다가 빛이 비치는 언덕 위로 다가가려 했으나 세 마리의 야수(표범, 사자, 늑대)가 길을 가로막았으나, 로마 최고의 시인이었던 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 Maro)가 나타나 그를 구하고 길을 안내합니다. 그는 먼저 단테를 지옥으로, 다음에는 연옥의 산(山)으로 안내하며, 산의 꼭대기에서 단테와 작별하고 요절한 단테의 연인 베아트리체(Beatrice)에게 그의 앞길을 맡깁니다. 베아트리체에게 인도된 단테는 지고천(至高天), 즉 천국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이 신곡의 줄거리입니다.
신곡에 서술되어 있는 여러 가지 체험은 단테의 파란만장한 인생체험을 통한 영혼의 성장과정을 나타낸 것이며, 정치적 망명 이후 심각한 정치적·윤리적· 종교적 문제로 계속 고민했던 그가 자신의 양심과 지성 속에서 그 해결방법을 찾아내기까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옥의 첫 번째 영역은 세례를 받지 않은 자들의 영역입니다. 호메로스(Homeros), 호라티우스(Horatius), 오비디우스(Ovidius)와 같은 위대한 시인과, 소크라테스(Socrates), 플라톤(Platon), 유클리드(Euclid),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us),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등의 위대한 현자(賢者)들로서, 생전에 나쁜 일을 저지르지도 않았고 덕망도 높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이전의 시대에 세례를 받지 않은 자들의 영혼이 있는 곳입니다.
실제 지옥의 고통은 두 번째 영역에서 미노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크레타 섬의 왕)가 나타나면서 시작됩니다. 애욕의 죄를 범한 영혼들이 쉬지 않고 불에 데는 지옥의 폭풍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세 번째 영역에서는 탐식한 자들이 고통을 당하고, 네 번째 영역에서는 낭비한 자와 인색한 자들이 벌을 받고 있으며, 다섯 번째 영역에서는 분노한 자들이 스틱스 강의 흙탕물에 잠겨서 벌을 받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무절제한 삶을 산 사람들의 영혼이 받는 벌에 대한 것입니다.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플레기아스에 인도되어 세 명의 푸리에가 지키고 있는 여섯째 영역에 이르게 됩니다. 디스(여신들의 총칭)의 시가 곧 여기입니다. 중세기의 커다란 성이 성벽에 둘러싸인 채 거대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여기엔 이교도들이 불에 그을린 관속에 누워 있는 곳입니다. 이 영역은 스틱스와 플레제톤 강 사이에 있는 완충 지대입니다. 일곱째 영역은 폭력을 사용하여 죄를 지은 영혼들이 미노타우로스에 의해 감시를 받으며 벌을 받고 있는데, 폭력은 세 가지 형태로 구분됩니다. 즉, 이웃에 대한 폭력과 자신에 대한 폭력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폭력입니다.
여덟째 영역과 아홉째 영역에서는 사기와 기만의 죄를 범한 영혼들이 지옥의 가장 낮은 곳에서 두 부류로 나누어 벌을 받고 있습니다. 여덟째 영역에서는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자를 기만한 죄인들 즉, 아첨꾼, 고성죄인, 점성술사와 마술사들, 탐관오리들, 사기꾼, 화폐위조자, 위선자들, 도둑들, 사기꾼, 집정관들, 모략가들, 불화의 분열의 씨를 뿌리는 자들, 연금술사들이 그들의 분수에 맞는 벌을 받고 있습니다. 아홉째 영역에서는 자신을 신뢰하는 자를 사기한 배반자들 즉, 친족을 배반한 영혼들, 조국과 자기 당파를 배반한 자들, 손님을 배반한 자들, 배은망덕한 영혼들 등으로 나누어 벌을 받고 있습니다.
지구의 중심 가까이(열째 영역)에 이르면 악마 루시퍼가 땅의 한가운데에 있는 영원히 얼어붙은 얼음에 꼼짝 않고 앉아서 세 명의 대역죄인인 카시우스(Cassius), 브루투스(Brutus), 유다(Judas)의 머리통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지옥에서 3일 동안 머문 후,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땅의 내부로부터 다른 쪽으로 땅의 표면까지 뚫린 긴 통로를 따라 올라가서 연옥의 해변에 이르게 됩니다. 지옥을 벗어나서 정화(淨化)의 산인 연옥(purgatorio)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단테는 이제 정화의 산의 아홉 단계를 오릅니다. 각 단계에서 인간이 저지르는 일곱 가지 큰 죄(교만, 질투, 분노, 태만, 탐욕, 탐식, 음욕)를 씻어내게 됩니다. 연옥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구원을 받으려는 영혼들의 뜨거운 열망으로 가득한 곳입니다. 아홉 단계의 연옥에서 마지막으로 불꽃의 장막을 넘으면 연옥을 벗어나게 되고, 단테의 아름다운 연인인 베아트리체(Beatrice)를 만나게 됩니다.
베아트리체는 지상낙원에서 단테를 맞이합니다. 그곳은 미풍이 산들거리고 꽃들이 만발하며 새들이 지저귀는 멋진 곳입니다. 베르길리우스는 이제 단테와 헤어지고, 단테는 베아트리체의 안내를 받으며 마지막 여정을 계속합니다.
단테의 몸은 연옥을 거쳐 천국으로 올라갈수록 변해갑니다. 천국의 빛은 단테의 눈으로 감당하기에 너무나 강렬합니다.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면서 단테의 몸은 해체되고 마침내 빛과 하나로 됩니다. 필멸의 존재로부터 불멸의 존재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단테는 말합니다.
천국의 하늘은 아홉 권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로 겹치거나 서로를 가리지 않습니다. 나뉘어 있으면서 동시에 하나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은 비물질적이며 따라서 모든 장소에서 동시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사랑하는 존재로서의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모순을 초월한 존재라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전능한 존재라서가 아니라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빛을 가려서 그림자를 만들며, 한 면이 빛을 받으면 다른 면은 빛에서 가려집니다. 인간은 따라서 모순에 처할 수밖에 없는 존재, 즉 구원을 받는 동시에 구원을 외면하는 모순의 존재입니다.
단테는 이 글을 통해 독자들에게 구원의 가르침을 주고자 한 것으로 보입니다. 단테가 살던 시대에는 황제와 교황의 이질적인 두 권력이 충돌하고 있던 시기이었다고 합니다. 단테는 이 두 권력의 조화를 꾀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결국 활동의 주된 지역이었던 이탈리아의 피렌체(Firenze)로부터 추방당하여 죽을 때까지 돌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단테는 구원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고, 베아트리체는 그의 연인이자 구원에 이르는 길잡이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곡에서는 배타적인 기독교 중심주의도 발견됩니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를 사람들을 이간질하여 분리한 죄로 영겁의 화형을 받고 있는 존재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당시는 가톨릭교회가 시대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 중심적일 수밖에 없었고,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인 성향을 보입니다. 또 가톨릭의 영향으로 연옥을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신곡에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애욕, 탐식, 낭비, 인색, 분노, 이교도, 폭력, 사기, 기만, 교만, 질투, 태만, 탐욕 등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고,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이런 조건에 적합한 사람은 없습니다. 연옥은 죄지은 자들을 위해 가톨릭이 마련한 교활한 장치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신곡을 읽고 나면 연옥이 본질적으로 완전할 수 없는 인간이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하고 절실한 통로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교활하지만 획기적인 발명품입니다. 이러한 상상은 단테가 처해있던 당시 사회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초월자에게 의지하여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종교적인 과정입니다. 단테는 기독교 신자로서 종교적인 해결을 구하고자 했으나, 그는 현세를 무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현실에서 준비되고 이루어집니다(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구원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에게 향하는 동시에 현실사회의 윤리와 결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결과로써 종교는 삶의 윤리가 됩니다. 이성과 영성은 서로 대치되는 것이 아니며, 영성이 충만하면 삶에 필요한 윤리적 이성도 그것으로부터 나오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