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는 전쟁, 분쟁 또는 일체의 갈등이 없이 평온하고 화목한 상태를 말합니다. 다툼이 없는 상태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툼으로 가득합니다. 일부 이슬람교 세력은 기독교를 비롯한 그들과 다른 세상과 싸우고 있고, 일부 기업가들은 노동자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일부 권력자들은 그 권력에 굴종하지 않는 자들과 싸우고, 일부 이익을 선점한 자들은 그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도전자들과 싸웁니다. 퇴폐적인 삶에 익숙한 사람들은 건강한 삶의 권위에 밀리지 않기 위해서 저항합니다. 미신(迷信)에 익숙한 사람들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이 이끄는 조화로움에 합류하지 않기 위해서 도망칩니다. 이와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다툼의 핵심적인 원인은 이기심입니다.
평화는 사랑, 관용, 용서, 대화, 타협 등과 같은 말과 어울리는 말입니다. 평화의 드러나는 특징적인 모습은 평온(平穩)입니다. 평온을 유지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절대적인 권위에 모든 사람이 굴복하여 이루는 평온도 있고, 강한 권력(힘)으로 이루는 평온도 있습니다. 사랑의 힘으로 스스로 평온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고, 갈등의 끝에 대화와 타협을 통하여 만들어내는 평온도 있습니다.
로마제국은 유럽을 힘으로 장악하여 평온한 상태를 유지한 나라입니다. 식민지들은 그들의 자주권과 산출물을 로마에 바침으로 군사적 평화와 종교적 자유를 보장받았습니다. 강요된 조건적 평화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를 향하도록 설계되었고, 물길도 로마를 향하도록 건설되었습니다. 오직 로마의 황제와 로마시민들을 위한 체제가 로마제국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황제는 신이었고, 통치자이었으며 평화의 사도이었으며, 자유는 그로부터 나왔습니다. 로마 이외의 사람들은 모두 로마황제의 통치 대상이었고, 식민지의 국민들은 로마의 황제로부터 허락받은 삶을 살았습니다.
영원한 권력은 없습니다. 권력, 부, 명예는 그것을 소유하려고 하는 자들에 의해 스스로 붕괴합니다. 로마제국이 그러했고 나머지 모든 제국도 멸망하였습니다. 어떠한 정치적 힘이나 군사적 힘도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지는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윗(David)은 그의 시(詩)(시편 17편 14절과 15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
이 세상에서 받을 몫을 다 받고 사는 자들에게서
나를 구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몸소 구해 주십시오.
그들은 주님께서 쌓아 두신 재물로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남은 것을 자녀에게 물려주고
그래도 남아서 자식의 자식들에게까지 물려줍니다.
나는 떳떳하게 주님의 얼굴을 뵙겠습니다.
깨어나서 주님의 모습 뵈올 때에
주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내게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이 시는 다윗이 왕이 되기 전 사울 왕에게 쫓기고 있을 때 쓴 시라고 합니다. 권력과 부를 독점하고 있는 왕에 대한 불공평함을 고발하고, 자기는 나눔과 베풂을 통해서 떳떳하게 주님을 만날 것임을, 그것이 진정 기쁜 일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옛날부터 시작된 세상의 불공평함은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경쟁이란 그 목적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때 의미가 있습니다. 경쟁의 결과가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지금의 경쟁은 당사자의 이익을 획득하는 것에 끝나지 않고 상대방의 몰락을 보고 나서야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쟁에서 졌다고 하더라도 2등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고 3등도 그만큼의 성과를 낸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승자독식의 경쟁형태는 또 다른 승자독식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반복되면서 세상은 점점 황폐해져가고 있습니다. 모두가 경쟁에서 1등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생물계에서 생존경쟁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생존경쟁이란 생물이 생장과 생식 등에서 보다 좋은 조건을 얻기 위해서 하는 다툼을 말합니다. 다윈의 진화론의 중심 개념인 생존경쟁은 생물의 증식 능력이 높아지는 반면, 필요한 먹이나 생활공간 따위가 부족하여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생물이 갖는 본능적인 선택이고 노력이지요. 인간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생존경쟁이 일어납니다. 인간의 소유욕구는 점점 커지는 반면, 필요한 재화나 영토 따위가 부족하여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물계와 인간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생물계(물론 인간도 생물계의 일부이긴 합니다만)에서는 대부분 그들의 생존에 필요한 만큼의 먹이나 공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생존에 필요한 양보다 훨씬 더 많은 먹이나 공간을 탐합니다. 필요 이상의 경쟁을 하는 것이지요. 생존을 위하여 먹기 위해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탐욕과 불의한 방법에 의해 채운 곳간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군전쟁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11세기 이후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에서의 생애를 보냈던 지역을 방문하는 성지 순례를 해왔다고 합니다. 이슬람의 통치자들이 종교적인 목적의 성지순례를 용인했음에도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를 시작으로 동로마 제국이 점차 쇠퇴하자 서유럽은 교황 우르바노 2세를 중심으로 성지 회복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안티오키아(안타키아), 예루살렘 등 기독교 성지에 대한 군사적 원정을 단행하게 됩니다. 이때 이미 셀주크 투르크의 지배하에 있던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던 이슬람교인들을 학살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지 회복은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구실에 지나지 않았고 실제로는 동방 정교회를 로마 가톨릭 관할권 아래 흡수․통합시키고 교황권을 확대하려는 의도가 바탕에 있었다고 합니다. 더구나 당시 서유럽 내 영주의 장남 이외의 아들들은 상속권을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에 소아시아의 비옥한 땅에 대한 욕구가 강했던 면도 작용했고요. 또한 도시 상인들의 시장 개척에 대한 요구 등 종교적인 측면과 경제적인 측면에서 십자군 원정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 밖에 서유럽 각계각층의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서 십자군 원정을 단행하게 된 것입니다. 종교를 앞세웠지만 결국 정치적․경제적 목적으로 계획되고 진행된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IS나 알 카에다의 극단적 만행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종교적 명분을 내세우지만, 극단적인 무슬림과 사회에 대한 불만 세력을 동원한 정치적 탐욕에 분명해 보입니다. 이슬람만이 존중받아야 할 종교가 아니며, 그들만의 세상을 꿈꾸어서도 아니 될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도발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더 무섭고 안타까운 일은 이러한 상황을 더욱 부채질하는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극한적인 대립을 부추기고 거기에서 그들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입지를 강화하려고 하는 세력입니다. 이슬람교와 기독교 사이를 이간질하고, 여당과 야당 사이의 극한 대립을 부추기고, 강자와 약자 사이에 화해와 관용을 권유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조장하고, 보수와 진보 사이의 갈등을 끊임없이 조장하는 세력입니다. 갈등과 다툼을 먹이로 삼아 사는 괴물 같은 존재입니다. 이것을 종교적 용어로 표현하면 사탄이라고 합니다. 사탄이 득세하면 평화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개인」으로 이루어지지만 「우리」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우리」가 더불어 행복해지지 않으면 「개인」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모든 「개인」이 행복해질 때 「우리」도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세상 my world」이 아니라 「우리가 더불어 사는 세상 our world」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공동체의 회복은 무엇보다 절실하고 시급한 과제입니다.
우리 모두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게 되는 날이 내가 살아있는 동안 오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합니다. 내가 믿고 의지하는 신은 이러한 나의 염원을 지지할 것임을 믿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