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나이

by 아천

얼마 전 오랜 친구와 전화로 안부를 묻는 중에, 인생에 있어서 가장 좋은 나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김태길(서울대) 교수, 김형석(연세대) 교수, 안병욱(숭실대) 교수의 3인은 「철학 삼총사」로 알려진 분들입니다. 그들은 1920년생으로 동갑이라고 합니다. 김형석 교수는 지금도 외부 특강을 하는 등 열정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은 「언제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가?」, 「인생의 시계를 언제로 돌리고 싶은가?」를 화제에 올린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때 모두 「60세∼75세」를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좋은 시절이라고 의견을 모았다고 합니다. 그때가 「인간적, 학문적으로 가장 성숙하고, 인생과 행복이 뭔지 알면서 발전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http://www.kwangju.co.kr/read.php3?)

인생과 행복이 뭔지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분들은 철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우리와는 다른 특별한 인생관이나 행복관이 있는 것일까요? 철학은 학문분야일 뿐 실제의 삶에서의 철학은 보통의 사람들과 마찬가지일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본인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아마도 학문으로서의 철학과 세상을 살아가는 범인(凡人)으로서의 삶에서의 철학은 다르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대철학자들도 나이 60세가 넘어서야 인생이 뭔지 알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나이가 주는(엄밀하게는 세상살이의 경험이 주는) 교훈은 많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내려갈 때 보았네/올라갈 때 보지 못한/그 꽃(고은, 그 꽃)」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갑니다. 목표지점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목표지점에 결국 이르는 경우도 있지만, 모두들 그 목표만 이루면 행복해질 거라는 기대로 자기의 삶을 걸다시피 합니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사람은 좌절감에 괴로워하고, 목표를 달성한 사람은 정작 그 목표가 주는 의미를 알지 못해 허탈해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목표의 달성이 내 인생에서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갖는지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목표를 달성한다고 하더라도, 또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경우에라도 그것이 그 동안의 각자의 삶에 주는 의미를 알지 못하게 됩니다. 정상을 향하여 산을 올라갈 때 정상에 도달하는 것에만 전념하기 때문에 정상에 서는 순간에 얻는 성취감 외에는 특별한 의미를 찾지 못합니다. 등산에서는 올라갈 때도 내려갈 때도 다르게 보이는 세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등반 자체가 목표가 되면 등산이 앞사람의 뒤통수만 보고 걷는 것과 인내심을 발휘하는 것에만 한정되어버립니다. 그래도 고은 시인은 내려갈 때라도 올라갈 때 보지 못하였던 그 꽃을 발견하였으니 우리보다는 다른 수준의 삶을 사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3개의 눈(眼)이 있다고 합니다. 몸의 눈(肉眼), 마음의 눈(心眼), 영적인 눈(靈眼)은 세상을 바라보는 3가지의 장치입니다. 어릴 때는 육안으로만 세상을 봅니다. 예쁜 것, 좋은 것, 싫은 것, 미운 것처럼 자기의 욕구에 따라 호오(好惡)를 구분하게 됩니다. 마음의 눈은 자기의 욕구와는 다른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입니다. 사전적으로는 사물을 살펴 분별하는 능력 또는 그런 작용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물이 갖는 본질적인 가치 또는 의미를 볼 수 있는 능력이라 할 수 있겠지요. 영적인 눈은 영적으로 살펴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는데, 종교적인 의미가 있기때문에 종교에 따라 영안을 조금씩 다르게 정의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든 보는 자가 흔들림 없는 마음의 상태가 되어서 사물을 보는, 나의 존재를 뛰어넘는 초월적인 눈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영안을 가지기 위해서는 나를 비우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기독교에서는 나를 비우고 내 안을 하나님으로 채우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러한 상태로 되면 그 세상이 바로 천국이 되겠지요. 그런데 어떻게 하면 완벽하게 나를 비울 수 있을까요? 사소한 일에서도 자신을 앞세우고 내 생각만을 주장하고 있는 나를 매일 발견하고는 좌절의 연속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불가능한 염원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철이 든다는 것은 육안에 의존하던 의식의 세계로부터 심안의 의식세계로 넘어간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사리를 분별할 수 있게 되려면(철이 들려면) 내 몸의 눈을 감고 마음의 눈을 열어야 합니다. 마음의 눈을 열고 세상을 둘러보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내가 어떻게 세상에 도움 되는 도구가 되어야 할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몸의 눈은 힘이 매우 강해서 마음의 눈에 자리를 쉽게 내어놓지 않습니다.


다행히 나이가 들어가면서 마음의 눈이 아주 조금씩 열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논리적인 주장이긴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우리의 눈이 노안(老眼)으로 되는 것은 육안으로 보기를 덜하고 대신 심안으로 보기에 힘쓰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엊그제 밤사이에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날씨가 그다지 춥지 않기 때문에 길가에 내린 눈은 다 녹고 나뭇가지에 내린 눈은 그대로 남아서 정말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은 눈일까 나무일까 물어봅니다. 푸른 잎이 달려있는 소나무도 이파리 한 장 없이 가지만 남은 나무도 다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나뭇가지에 걸려있던 눈이 다 녹은 뒤의 나무는 다시 미워진 것일까요?


홍콩의 야경은 참 멋집니다. 상해 푸동(浦東)지구를 황포강 건너에서 바라보는 야경도 홍콩 못지않게 황홀합니다. 그런데 조명을 끈 아침에 바라보는 경치는 홍콩의 빌딩이든 푸동의 빌딩이든 간밤의 황홀함은 사라져버립니다. 어제 밤에 보면서 열광했던 것은 홍콩인가요 아니면 불빛인가요? 홍콩이나 푸동의 빌딩에 비친 불빛이 우리를 감동하게 했지만, 그 감동은 불빛이 켜져 있는 동안에만 지속될 뿐입니다.

우리가 보는 많은 것은 잠시 동안의 불꽃놀이에서 띄워 올린 불빛의 환영(幻影)입니다. 나는 불꽃놀이를 싫어하지는 않지만, 불꽃놀이가 끝난 후의 허무가 너무 커서 찾아가서 보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것을 잠시 즐기는 것은 좋을 것입니다. 심심한 음식을 먹다가 매운 음식이나 간간한 음식을 가끔씩 먹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매운 음식도 간간한 음식도 그 정도가 과해지면 결국에는 내 몸을 다치게 만들지 모릅니다.


나이가 들면서 얻을 수 있는 좋은 점도 많이 있습니다. 젊었을 때 집착했던, 지금 보면 부질없었던 것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게 되어서 좋고, 나의 이익을 통해서만 보던 세상을 조금은 다르게 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 그만큼 여유가 생긴 것입니다. 집착했기 때문에 해결되지 않던 일이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서 쉽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게도 됩니다.

원로 철학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60대의 나이에서 세상을 보면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힘들어진 부담보다 세상을 여유롭게 볼 수 있는 너그러움이 생겨서 얻는 마음의 여유로 60대의 삶도 나쁘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어떤 목사님의 기도 중에 눈에 관한 기도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하나님 내가 오늘 누군가를 바라볼 때 주님의 눈으로 누군가를 보게 해주십시오. 누군가와 나의 눈이 마주쳤을 때 그 사람이 나를 통해 순수한 삶을 꿈꾸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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