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은 만능이 아니다.
투표란 기본적으로 유권자가 존재하고, 그들에게 적절한 투표 권한이 부여되는 과정이다. 이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유권자의 신원이 확인되고 정당한 자격이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블록체인을 활용한 익명 투표 시스템이 과연 현실적으로 구현 가능한가?
일반적으로 블록체인 기반 투표 시스템은 PKI(Public Key Infrastructure, 공개키 기반 구조) 방식을 활용하여 유권자에게 고유한 식별번호를 부여하고, 이를 통해 투표할 수 있도록 설계된다. 이 방식은 유권자의 신원을 드러내지 않고도 투표를 진행할 수 있으므로 익명성이 보장된다고 주장된다. 하지만 여기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존재한다.
고유번호가 부여되려면 먼저 유권자의 신원이 인증되어야 한다. 즉, 누군가에게 투표 권한을 부여하려면 그가 실제로 투표할 자격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유권자의 정보가 전산 시스템에 기록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블록체인이라는 기술이 적용된다고 해도, 결국 고유번호와 유권자의 연결 관계는 시스템 어딘가에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익명성이 보장된다고 보기 어렵다.
더 나아가, 특정 투표자가 어느 후보나 정책에 투표했는지를 확인하는 것도 가능하다.
결국, 블록체인 기반 익명 투표 시스템의 핵심 문제는 기술 자체가 아니라, ‘투표자 인증’이라는 근본적인 절차에서 비롯된다. 익명성을 유지하면서도 신뢰할 수 있는 투표를 진행하려면, 투표자의 신원을 검증하는 주체와 투표 내역을 관리하는 시스템이 분리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정이 전산화되는 순간, 블록체인의 도입 여부와 무관하게 익명성은 언제든지 위협받을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같은 신뢰할 수 있는 기관이 중간에서 정보를 관리하고 익명성을 보장하는 방식을 고려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 결국 기존의 전자투표 시스템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블록체인이 본질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투명성과 무결성이 투표 시스템에 적절히 적용될 수 있는지가 문제의 핵심이다.
결론적으로, 블록체인 기술이 익명 투표 시스템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주장은 단순한 기술적 환상에 가깝다. 투표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신원 인증 절차가 존재하는 한, 완전한 익명성을 보장하는 것은 어렵다. 블록체인은 신뢰성과 보안성을 높이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어도, 익명성이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만능열쇠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