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파에 캔디 감성 한 스푼
낭만과 근대화의 도시, 군산에 다녀왔다. 요즘에는 군산이 젊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중이다. 특히 혼자 여행하는 이들에게 더욱 인기다. 근대화의 흔적이 거리, 건물 등 도시 곳곳에 묻어 있는 그곳은 인스타 인증샷의 메카다. 하지만 이렇게 낭만만 가득할 것 같은 군산이 나에게는 증오의 도시였다.
언제였더라, 아마 5학년 즈음이었던 것 같다. 군인이었던 아빠의 전근으로 나는 군산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아직 세상이 아름다울 시기였던 난 그곳에서 행복한 초등학교 생활을 보내고 순조롭게 중학생 언니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순진한 어린이의 망상이었다. 아직도 우리 엄마는 군산에서의 시절을 악몽이라 칭하곤 하니까 말이다.
원래도 엄마와 아빠는 자주 싸웠다. 엄마의 말을 빌리자면 내가 갓난아기였을 때도 그랬다고 한다. 나의 백일 사진을 보고 내 딸이 이렇게 예쁠 리 없다며 액자를 부순 적도 있댔다. 정말 웃기는 사람이다. 이렇듯 둘의 사이는 급격히 좋았다가도 최악으로 치닫고, 세간은 누구보다 넉넉했지만 모두의 마음은 너절해졌다. 그 사이에서 첫째 딸인 나는 괴롭고 무서웠고 슬펐다. 하지만 함부로 울지 않았다. 자존심도 셌지만 내가 울면 엄마가 힘들어해서 더 그랬다. 나도 무섭지만 4살 어린 동생을 재우고 씩씩하게 경찰에 전화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짠하고도 대견한 초등학생이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나는 그토록 원하는 중학생 언니가 되었다.
왼쪽 가슴에 파란 명찰을 달고, 귀 밑 7cm 단발을 고데기로 말아 넣고, 넥타이를 깜빡한 날은 먼저 도착한 친구한테 교실 창 밖으로 넥타이를 던져달라고 부탁하면서 즐겁고도 겁 많은 일학년을 보냈다. 하지만 가정의 평화는 전보다 더 자주,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중에는 학교 애들도 알았다. 사춘기가 시작된 중학생에게는 너무 쪽팔리고 가혹한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가 훨씬 힘들었고 창피했을 텐데 중2를 앞둔 나에게는 그런 건 생각도 안 났다.
그러다 어느 날 엄마를 붙잡고 말했다. "나 이렇게는 못살아. 엄마가 안 간다고 하면 나 혼자라도 갈 거야. 외할머니 집에." 그 말을 하는 딸을 보는 엄마의 표정은 어땠더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와 나는 경기도 어느 작은 시골로, 아빠와 동생은 낭만의 도시 군산에서 살아가게 됐다.
그게 올해로 꼭 십 년 째다. 강산이 변한다는 그 시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이제 막 교복을 입고 집합을 배웠던 그 중학교 언니는 이제 대학을 마치는 나이가 되었다. 중학생 딸내미와 혼자 살기를 시작한 우리 엄마의 앞자리가 바뀌었다.
그렇게 십 년이 지나 다시 군산에 왔다. 살았던 집과 동네, 엄마 아빠 동생 그리고 강아지와 함께 저녁마다 산책했던 공원, 매번 가서 꽃등심을 먹었던 작은 정육 식당, 주말이면 놀러 갔던 서해 바닷가 등이 차례로 떠올랐다. 그리고 실제로 보니 반가웠다. 분명 끝이 좋았던 곳이 아님에도 속도 없이 좋았다. 다시는 군산엔 오지 않으리라 하는 포부로 떠났었는데, 이래서 애증이라는 단어가 있는 거구나 하고 실감했다.
오랜만에 아빠도 만났다. 여전했다. 아무 생각 없이 말을 하고 술을 좀 먹으니 욕도 서슴이 없었다. 오랜만에 본 딸이어도 듣기 좋은 말 한마디를 안 했다. 그래도 10년의 시간 동안 아빠도 많이 늙어서, 아니라고 센 척해도 고생을 꽤 한 것이 티가 나서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혼자 호텔로 돌아와 잘 도착했다고, 아빠랑 저녁도 먹었다고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응. 아빠랑 회도 먹었어. 근데 아빠도 많이 늙었더라. 나보고 싹수가 없대 웃기지. 나 잘난 맛에 살지 말래." 하며 웃으니 엄마는 "미친. 지나 잘하라 그래." 했다. "술 먹으니까 욕도 하던데? 친구들이랑 매번 밤새서 술 먹는다고 하니까 미친년이래." 사실 일렀다.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오랜만에 본 아빠한테 욕을 들으니 썩 유쾌하지 않아서 투정을 부렸다.
그랬더니 엄마가, 우리 무뚝뚝한 선 씨가 "아니 걔가 미쳤나. 내가 무슨 마음으로 내 금쪽들을 거기에 두고 왔는데, 욕을 하긴 욕을 왜 해. 진짜 미쳤구나." 하는 것이었다. 순간 군산에 도착한 이후 쿨했던 나는 무너졌다. 그런데 여기서 우는 티가 나면 우리 엄마가 너무 속상해할까 봐 애써 티브이의 볼륨을 높였다. 그리고는 두 배는 높은 톤으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개 버릇 남 못주나 봐. 나 이제 씻고 코빅 볼 거야. 엄마도 운전하느라 고생했으니까 로제랑 얼른 자. 응. 그럼 나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출발할 거야. 응 내일 봐."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 화장대에 있는 거울을 봤다. 눈물 콧물 바람이었다. 그 꼴을 보니까 웃기기도 하고 날카로웠던 그 시절을 누구도 상처 내지 않고 지나온 내가 기특하고 예뻤다.
명불허전 애증의 도시다. 그럼에도 다음에는 더 괜찮을 거 같아서, 깜깜했던 그 시절을 덮을 만한 반짝거리는 추억과 낭만을 만들 수 있을 거 같아서 또 오고 싶어 졌다. 언제든 또 가야지. 기다려라 군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