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밥상 위에 재현된 품위 있는 삶에 대한 취재기
본 책들을 또 보고 있다.
방 정리를 하며 이것도 있었지 하는 책들, 다시 생각난 책들, 내용이 기억이 안 나서 다시 봐야겠다 생각한 책들 - 기억에 남는 책들을 다시 보기하고 있다. 외울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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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초에 읽은 모던 키친. 미슐랭 3 스타 식탁을 둘러싼 미스터리 스릴러
... 가 아니다.
레시피에 대한 것인지, 미슐랭 스타 밥집들에 대한 것인지, 셰프들에 대한 전기인지 제목만 봐서는 알기 어렵다. 책의 앞/뒤 표지의 목차에서도 내용 짐작은 어렵다.
나는 책도, 영화도, 기타 콘텐츠도 그렇고 스포일러에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아서 내용을 미리 찾아보곤 한다. 이 책에 대한 내용은 찾아보지 않았던 것 같다. 가끔 그럴 때도 있다.
이 책은 말입니다 - 책으로 읽는 다큐멘터리. 논픽션이라는 장르가 존재하는 것을 압니다만, 입에도 손에도 아직 잘 안 붙는다.
모던키친은 책으로 읽는 다큐멘터리다. KBS1에 최불암의 한국인의 밥상이 있다면, 이를 책으로 옮겨놓았다-고 보면 설명이야 간편해지겠지만 크게 다르다. 전체적인 구성과 책에서 다루는 밥상의 재료와 식당과 인물들에 대한 얘기 등 많은 부분이 (당연히) 다르다. 활자로 제작할 수 있는 최대의 범위에서 최상의 내용을 구현하기 위한 노력이 있다.
활자화된 다큐멘터리, 모던 키친은 21세기도 30%가 흘러간 시점에 한국인의 밥상은 무엇으로 구성되며, 그 무엇은 어디서-누가-왜 만든 것이며, 그 무엇은 한국인의 밥상에 어떤 의미로 남기는 게 좋을 것인가를 5개의 범주로 나눠서 전달한다.
저자가 얘기한 대로, 그리고 세상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듯 식품의 세계, 밥상의 세계, 먹거리의 세계 또한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 공감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의 마지막 범주인 살아있는 주방을 좋아한다. 작년에 봤을 때도 그랬던 것 같다.
딸기, 포도, 미나리, 밤, 인도어팜, 당근, 귤, 문어, 와사비 - 이제 사시사철 밥상에서 볼 수 있는 원재료를 지켜내는 것이야 말로 내게는 프로의 세계이다. 스스로를 던져서 지켜내야만 하는 진짜의 세계.
지난 번에 읽을 때도 같은 부분에서 같은 것을 생각했다.특히 철원 비무장지대의 와사비에는 비장함이 있다.맑은 물과 환경을 찾아 민간인 통제구역까지 가게 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렇게 해서 얻는 것은 무엇일까. 누가 알아준다고 - 그의 노력은 저자가 알아봤다.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고 한 우물을 파다 보면 세상의 빛을 본다. 철원 박상운의 와사비는 서울의 고급 호텔에서도 조금씩 그 이름이 알려지고 있었다. 26년이 걸렸다.
각 에피소드의 구성이 비슷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지루할 수 있어서 저자는 여러 가지 구성을 시도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덕분에, 감동의 폭은 다를지라도, 이 활자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모든 인물들의 사연과 노력과 결실이 잘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저자 박찬용은 그의 글자 위에 차려 놓은 최종 상품으로써의 식품과 식재료,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한 인물들을 통해 삶의 품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렇게 품위 있는 삶의 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저자의 프로 정신과 그의 품위에 대한 잔상이 남는다. 저자의 글처럼.
디디에 세스테벤스는 정말 모든 걸 바꿨다. 자신의 터전과 이름을 바꾸고 임실에 새로운 산업을 심었다. 치즈 만들 돈이 모자라 본가에서 지원을 받고도 그는 때가 되자 임실치즈에서 손을 떼고 장애인 복지에 힘썼다. 임실치즈마을 2층 기념관에는 생전 그가 했다는 말이 쓰여 있다. "내가 아니라 그들이 했다고 하라."
임실을 떠나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전주로 향했다. 전주 치명자산 얕은 중턱에 성직자 묘지가 있다. 지정환 신부는 2019년 세상을 떠난 후 이곳에 안치됐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삶을 걸고 낯선 나라로 떠나와 뭔가를 만든 후 그곳에 묻혀 있다. 그는 생전의 어느 인터뷰에서 (포장도로가 없는 것보다) 힘들었던 건 "나무와 (클래식) 음악이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30대 중반 이상이라면 기억 속에 남아 있을 옛날 포도 맛이 그랬다. 껍질이 얇고 종종 터져 있기도 했는데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게 기억 속에 오래 남는 향이 있었다. 그걸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을 위해 그때 그 포도를 키우는 사람이 있다. 샤인 머스캣과 거봉의 시대에도 누군가는 나약하고 향기로운 무언가를 키우고, 또 그걸 알아보는 누군가가 그 향기를 누린다. 그렇게 어떤 것들이 꾸준히 계승된다. 포도 말고 다른 것들도 비슷한 것 같다.
그러거나 말거나 혁신이든 아니든 누가 뭐라 부르든 어떤가. 박상운은 자신이 한 일과 그 가치를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임무가 있는 인간은 지치지 않고, 그는 자기 삶의 꿈과 임무를 계 속 만들 줄 아는 사람 같았다. 취재가 끝나고 민통선 밖으로 나가 야 하는 시간. 우리는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는 떠나는 우리를 바라보며 아무도 없는 샘통농장에서 손을 흔들었다.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한국 최초이자 최대의 와사비 농가가 된 곳에서 손을 흔들었다.
현장에서 깨달았다. 내가 귀하게 여기던 그 개념들이 이곳에서는 말 그대로 살아 있었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원칙과 신념에 따라 그날 치의 음식을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최첨단 공장에서도 오래된 부엌에서도. 그 이유가 대단한 본질이나 상식 때문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하루의 일을 성실히 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진에 대해 꼭 말하고 싶은 게 하나 더 있다. 독자들이 보는 결과물을 넘어 사진가들이 현장에서 보여준 자세다. 이들이 마 주한 현장 중에는 촬영 난도가 쉽지 않은 곳이 많았다. 누군가에 게는 초라해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내내 현장에 대 한 깊은 존중과 배려를 보여주었다. 내가 현장에 있었기 때문인 지 내 눈에는 사진에서 이들의 미감뿐 아니라 현장에 대해 보여준 예의 역시 보인다. 그 예의 역시 이들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 의 일부라고 나는 확신한다. 독자 여러분들도 그 요소를 느껴 주신다면 감사하겠다.
+ 책 뒤편의 주석을 읽어보면 좋겠다. 어떤 책은 주석에서 더 많은 것을 발견하거나 더 감동하기도 한다.
+ 비할 데 없이 가난한 대한민국이 이처럼 발전하기까지 도움을 많이 받았다. 소명이란 단어로 설명이 부족한 벽안의 수도자들과 신부들의 도움이 그 일부이며 이 책에도 그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지 불가해한 그들의 노력에 설명이 안 되는 감동을 받는다.
+ 책을 읽으며 맛있음을 상상할 수 있다. 모르는 맛도 알 것 같다. 번패티번은 무역센터 현대에 있을 때 자주 갔었다. 그 때도 번이 진짜 맛있다 생각했다. 그리고 햄버거를 (하인즈) 케첩과 같이 먹으면 아주 감동적이다.
.. "현실은 리틀 포레스트처럼 예쁘지 않다"는 내용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나는 일본판 리틀 포레스트를 좋아한다. 사계절이 의미 없이 무한히 반복되는 것 같아도 그 안에서 위로 아래로 움직이며 삶의 범위를 넓혀가는 코모리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게 동화일 수 있다. 그러나 동화가 현실 그 자체의 반영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 나는 요기요와 쿠팡이츠를 이용해 본 적이 없다. 배민만 2번 이용해 봤다. 동네 중국집 사장님이 배달해 주시는 게 제일 마음이 편하다. 반기에 한 번씩 먹는 치킨과 피자는 배달비를 아끼기 위해 가지러 간다. 나 같은 사람만 있다면 요식업은 망할 것이다.
.. 오늘 다른 목적과 이유로 품위에 대한 짧은 노트를 다른 곳에 남겼다. 품위. 지식인은 넘쳐나지만 품위는 사라진 시대. 나도 품위의 부재에 보태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