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을 찾아 부산으로
옛날에 한 스님이 길을 가던 중 마귀에게 잡아먹히기 직전의 병아리를 보게 되었다. 스님은 마귀에게 내 살을 줄 테니 병아리를 살려달라 했다. 마귀는 저울을 가져와 병아리의 무게와 스님이 잘라낸 살의 무게가 같다면 병아리를 살려주겠다 했다. 스님은 허벅지살을 잘라 올렸지만 저울은 병아리 쪽으로 기울었다. 그래서 다른 쪽 허벅지 살도 잘라 올렸으나 여전히 저울은 병아리에 기울어졌다. 스님은 팔을 잘라 올렸다. 병아리편의 저울은 더 내려갔다. 다른 팔도 잘랐다. 그러나 여전히 저울은 그대로였다.
마귀가 병아리도, 스님도 잡아먹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스님은 깨달았다. 한낱 병아리라 해서 감히 내 몸 일부의 무게로 그 목숨의 값을 치를 수 없음을. 스님은 스스로 다른 쪽 저울에 올랐고 그제야 저울은 수평을 찾았다. 그리고 스님은 부처가 되었다.
무엇에 홀린 듯이 인스타그램의 랜덤 피드들을 넘기다 보면 주옥같은 이야기들을 만난다. 부처가 된 스님의 저울 이야기는 이야기 자체로도, 그 이야기에 달린 댓글로도 (각각 다른 방향으로) 큰 감동을 주었다.
짧은 내용으로 큰 가르침을 전한 이 이야기는 불교 경전의 한 내용으로 <중경찬잡비유경>의 "시비왕본생도"의 내용을 어린이용 불교 동화로 각색한 것이다.
처음 이 이야기를 접했을 때는 이야기 자체보다도 댓글이 워낙 강력해서 친한 사람들에게 전하고 다닐 정도였다. 여전히 그 댓글의 "감동"은 남아있다.
나는 반응이 느린 사람이다. 큰 일일수록 반응이 느리다. 그래서 그 여파가 아주 강하고 느리며 오래 남는다. 이 이야기를 본 게 1년이 조금 넘은 것 같은데, (약간 다른 맥락이지만) 이 경우도 비슷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댓글의 인상은 희미해지고 저울의 수평이 생각났다.
길을 가던 스님은 (사실은 시비왕이라는 인도 어느 왕국의 왕) 어떻게 깨달았으며 그 깨달음 안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계속 궁금할 것 같긴 하지만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깨달음이 쉬우면 모두가 부처가 됐겠지.
그래서 나는 부처님의 저울까지는 몰라도 내 저울의 수평만 생각하기로 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수평까지는 알 수도 없고 안다 해도 그 수평을 나는 맞출 수 없고 책임질 수 없지만, 내 마음 하나는 내 삶 하나는 수평을 맞춰볼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홈트레이닝용 운동기구 중에 수평 맞추는 기구, 그게 그렇게 수평 맞춰 서 있기가 힘들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그 기구를 잘 다루는 사람일수록 코어힘이 좋다고 한다. 나는 기구는커녕 플랭크도 30초를 못하는 사람이라 기구를 들여놓을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확대해석하면 “지 몸 하나의 수평도 못 맞추는 게 무슨 니 삶의 수평이냐”라고 할 수도 있다. 그래도 해 볼만하다. 플랭크도, 운동기구도 하면 할수록 신체는 적응하고 개선된다. 신체도 그러하니 정신도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수평에 닿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나. 신체의 수평은 식이조절과 적당한 운동을 적절하게 조절하여 달성 가능하다. 정신의 수평은 신체보다 필요조건이 더 많다. 그중에서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해가 아니다. 인정이다.
또는 나부터 제대로 인정하는 것.
유콜잇러브의 소피 마르소가 눈물 콧물 흘려가며 대차게 얘기한 대로 “상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 너무 어렵지만 그래야만 한다고 한 그것이다. 사랑은 이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것.
병아리의 목숨을 스스로의 목숨과 바꾼 스님 또한 병아리를 동등한 하나의 존재로서 있는 그대로를 바라본 것처럼 말이다.
몇 주전에 미국 사람과 회의 중에 인도인 동료들이 우리 인도는 ADAS(차량주행보조장치)를 지원하는 게 너무나 중요하다며 열변을 토하는 것을 들었다. 미국 사람은 물었다 - 인도에 그게 왜 필요한데? - 회의 중이라 별말 안 했지만 나도 같은 생각을 했다.
수년 전 인도 푸네로 출장 다녀온 같은 팀 김 모 대리는 흥분하며 인도 체험기를 들려줬다 - 아니, 인도는 2차선 도로에서 차 4대가 한 번에 달린다니까요, 차선이 필요가 없어요.
올해가 시작되면서부터 내 머리 안에는 차 4대가 한꺼번에 달리는 푸네의 2차선 도로처럼 모든 생각들이 한꺼번에 질주하고 있었다. 계속 과부하 상태였던 것 같은데, 이번 주가 돼서야 "어딘가 잘못된 머리 안"을 인지했다.
부처님의 저울까지 생각이 닿은 이유다. 푸네는 인도니까. 2차선에서 세 대든 네 대든 함께 달려서 행복한 인도인들. 그들은 마음의 수평을 얻어 부처가 되었나.
+ 병아리와 저울 이야기의 베스트 댓글은 “부산 자갈치 시장 저울은 스님 두 명 올라가도 병아리 못 구함”이었다.
+ 나의 아저씨의 이지안은 그칠 지에 평안할 안을 쓰는 이름이다. 나의 아저씨 박동훈은 마지막에 이지안의 뒷모습을 보며 ‘평안에 이르렀는가’ 묻는다. 박동훈 본인에게 하는 얘기였을 것이다. 시청자들에게 하는 얘기였을 것이고.
고 이선균은 평안에 이르렀을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