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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팬톤이 할 수 없는 것

상상과 회상을 보호색 삼은 엉망진창 마지막 글짓기

by 마나스타나스 Feb 12. 2025

글 써보는 팀에서 해 보는 마지막 글짓기- 우연이 골라준 색을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 글짓기라는 말을 오랜만에 생각해 봤는데 예쁜 말이다.


아주 엉망인 글을 짓게 되었지만 이것도 기억이니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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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의 집합을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청록, 진초록을 좋아한다. 초록만으로도 좋은데 진하기까지 더해져 깊어진 초록을 글감 삼아 잊어버렸던 기억들을 떠올려 본다.

 

"1982년에 무라이 슌스케 설계사무소에 입사한 23살의 내가 삼십 년이 지나, 1982년 여름의 아사미산 근처 여름별장에서의 기억을 바탕으로 건축과 음식, 사랑 근처의 감정이라든가, 계절의 기억들을 큰 일렁임 없이 회상하는 내용"

 

수년 전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읽고 남겨 놨던 짧은 메모다. 진초록이란 단어가 잘 어울리는 소설로, 인물들 사이에 오가는 일련의 감정들이 심심하게 흘러간다. 친한 친구들에게 여러 번 선물할 만큼 이 소설을 좋아해서 1년에 한 번씩은 읽는 것 같다.

 

한여름의 짙어진 녹음을 바라볼 때는 기분 좋지만 녹음을 향한 발걸음은 더디고 지친다. 수 번을 읽은 소설 또한 청신한 여름 풍경 아래 나름대로들 힘겨웠을 그 순간 가장 젊은 날을 얘기한다. 나 또한 활력 넘치는 것처럼 보였던 녹음에 홀려 지쳐 주저앉을 때까지 걷고 걸었던 날들이 있었다. 힘들었다고 해서 불행했던 기억으로만 남는 것은 아님을 이 소설을 읽으며 상기하곤 한다.

 

"봄이 오면 연둣빛 고운 숲 속으로 어리고 단비 마시러 봄 맞으러 가야지"

 

김윤아의 <봄이 오면>의 한 자락은 봄 그 자체이다. 상상해 봅시다- 꾸준히 길어진 햇빛 아래서 새순을 내기 위해 물을 머금은 가로수들과 연초록의 여린 잎들을 이미 틔운 한강변의 꽃나무들. 봄이 오긴 온다.

 

"어두운 날들이여 안녕, 외로운 눈물이여 안녕, 이제는 행복해질 시간이라고 생각해" - 김윤아는 1997년 이렇게 노래했다. 언제 끝나나 싶던 춥고 외롭고 슬펐던 겨울은 이제 안녕이다.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한 친구는 관념적인 가사와 서정적인 가락으로 채워진, 2004년 3월에 발매된 김윤아의 솔로 앨범을 좋아했다(<봄이 오면>도 이 앨범에 수록되어 있다). 그녀의 가사를 해석하여 그만의 글로 남겨놓았던 친구 덕에 나도 김윤아의 노래를 많이 듣게 되었다. 그렇게 친구와 알고 지낸 지도 20년이 넘었다.

 

옅은 초록의 봄이 사라져 갈 때쯤 매년 한국에 돌아와서 부모님 곁에 머물렀던 친구는 아마도 더 이상 한국에 들어오지 않을 것 같다. 매번 올 때마다 부모님께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했지만, 친구는 여전히 부모님을 몹시 그리워한다.

나도 매년 봄이 되면 친구가 몹시 그리울 것이다.

 

"신록에 있어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역시 이즈음과 같은 그의 청춘시대 - 움 가운데 숨어 있던 잎의 하나하나가 모두 형태를 갖추어 완전한 잎이 되는 동시에 처음 태양의 세례를 받아 청신하고 발랄한 담록을 띠는 시절이라 하겠다."

 

짙은 초록빛을 드리우기 시작하는 초여름의 풍경은 팬톤컬러칩으로는 재현이 불가능하다.

 

이양하 선생의 신록예찬은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배웠던 것 같다. 한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면 누구나 한 번은 읽어봤을 유명한 수필이다. 문장마다 한 순간을 지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읽을 수 있다. 꽃이 진 나무에 잎사귀가 무성해지는 초여름이 되면 거의 매년 신록예찬의 녹음을 떠올리며 책임질 게 없어서 행복했던 학창 시절을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1980년대 현재의 부지로 이사 오며 싼 값에 넓은 땅을 차지했다고 한다. 분수, 농구장을 겸용한 체육관, 주말 대관용 기념관 등 작은 대학교 캠퍼스 수준의 시설을 갖추고 있던 학교는 곳곳에 사철나무들과 꽃나무들로 채워져 있었다. 덕분에 개나리, 목련, 진달래로 시작해서 늦봄의 모란과 은방울꽃까지 봄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예쁨을 즐기며 3년을 보낼 수 있었다.

 

5월이 되면 찬란하다 못해 뜨거운 햇빛 아래 모란꽃이 피었다. 문학 선생님의 큰 그림에 따라 “마침” 5월에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를 읊으며 구경했던 빨갛고 하얗게 큰 꽃잎을 피워낸 모란은 서울 촌놈들에게 꽤 신기하고 낯선 꽃이었다.

 

 

하나의 단어로 된 색에서 떠오른 잊어버리고 싶은 일, 슬펐던 일, 그리운 일들을 기록하고, 고치고 또 고치는 이 순간에 아이러니하게도 영하의 날씨가 고맙다고 생각한다.

 

결국 “진초록”이 주는 상상 속의 설렘과 회상 속의 기쁘고 슬펐던 순간들은 현재가 있기에 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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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한계가 드러나는 글이라서 엉망진창인데, 고치다 보면 나아지겠지.


++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일본스러운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소리 없이 끓는 감정을 계절 속에 숨겨놨다. 내가 이 소설에서 힘겨운 감정을 찾아낸 이유는 이 책을 처음 읽을 당시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근데 지금도 딱히 마음에 들진 않는데 이걸 어쩐다……


+++ “마침” 5월에 읊은 모란이 피기까지는, 은 어쩌면 5월에 배운 게 아닐 수도 있다. 그러면 좀 어떤가, 이나저나 그맘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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