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러던어느날 Oct 06. 2024

서른넷의 나 (4) _ 행복을 즐길 줄도 모르는 놈

서른다섯, 다시 무기력에 맞서다.

'23년 봄의 어느 날, 상담선생님과의 상담시간에 나는 말했다.


"혼란스러워요. 제 목표는 확고한데, 방향은 변함없는데..., 자꾸 예전처럼 회사에 더 시간을 쏟게 돼요."


선생님은 되물었다.


"그게 왜요?? 방향이 변함없는 것과 회사에 더 시간을 쏟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나요?"


나는 울컥했다.


"머리로는 빨리 퇴사를 위해 부업에 더 시간을 쏟아야한다는 걸 알고 있는데..., 살면서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라서... 자꾸만 즐기고 싶어 져요."


"어떤 경험을 처음 한 것 같아요?"


"... 사람들이 먼저 제 자리로 찾아와요. 선배들, 후배들, 상무님, 팀장님들 전부... 와서 일 얘기도 아니고 수다를 떨다가 가거든요? 근데 있잖아요... 그게... 그게 너무 좋아요."


나는 이어 말했다.


"솔직히 살면서 인정받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근데 전 제가 똑똑하지 않다는 걸 너무 잘 알거든요? 그래서... 그래서 시간을 태웠어요. 남들보다 조금 더, 쉬는 날도 없이, 그렇게 내 시간을 갈아 넣어서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선생님은 말없이 나를 보았다. 나는 속사포처럼 이어서 쏟아냈다.


"그래서 힘들다고, 못하겠다고 나한테 푸념하듯 말하는 사람을 참을 수 없었죠. 나도 하는데... 왜 너희들은 못해?라는 생각만 했어요. 적어도 나도 하는 걸 못 버티고 그만두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죠. 그저 의지 차이라고 생각했어요. 차라리 내가 남들보다 확실히 능력이 뛰어나고 그걸 제가 알고 있었다면, 그들을 동정이라도 했을 거예요. 근데 너나 나나 별 차이 없다는 걸 잘 아는데, 푸념하고 실수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하려 하기보단 화가 먼저 났어요."


"지난 상담을 돌이켜보면... 확실히 그랬었죠." 선생님은 흐름을 끊지 않고 짧게 대답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것을 피했던 것 같아요. 조직에 스며들기보단 그저 남들보다 더 잘 해내서 터치받고 싶지 않았어요. 로봇처럼 일만 하는 나를 좋게 봐준 선배나 상사들과만 친분이 있었지, 동료들, 후배들과는 사적인 대화도 거의 하지 않았어요."


"회사 들어가기 전 영어 강사를 할 때도, 학생들과는 아직도 연락할 정도로 정말 친하게 지냈죠. 근데 매니저, 원장님이랑은 대화를 거의 안 했어요. 제 일만 열심히 잘해서 학생들이 제 수업에 만족하면, 굳이 그들과 가깝게 지내지 않아도 괜찮았거든요. 그래서 그때 저는 알았어요, 혼자 일하는 게 적성에 맞는구나. 저만 열심히 하면 됐거든요."


"근데 회사에 들어와 보니... 저만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어요. 내가 선임일 때는 구성원들을 챙겨야 하고, 내가 구성원일 때는 동료들과 상사가 늘 있죠. 그들과의 관계에서 스트레스받지 않으려면 저는 더 잘해야만 했고, 더 많은 시간을 쏟아부어야만 했어요.. 그게 제 인생을 피폐하게 만들었다는 걸 깨달은 것도 얼마 전이죠. 근데요..."


나는 한숨을 쉬며 이어갔다.


"솔직히 요새 좀 즐거워요. 누군가 저한테 먼저 찾아와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재밌고, 심각한 고민거리를 털어놓는 것도,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는 것도 너무 좋네요. 업무 할 때도 제 판단을 믿어주고 지지해 주는 상무님을 만난 것도 행운 같고... 좋은 동료들, 선배들, 팀장님을 만나 성과도 더 좋고, 오히려 더 인정도 받았어요. 매주 서너 번씩 있는 저녁 약속이 진짜로 믿기지가 않아요. 저는 대학교 때부터 엠티 한 번 안가고 공부, 아르바이트만 했던 아웃사이더였는데... 제 평생 한 번도 없던 일이 지금 일어나는 게 너무 신기해요."


선생님은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그럼 너무 좋은 일인 거 같은데, 뭐가 그렇게 마음을 힘들게 할까요?"


"제 자신과 약속하고, 그것이 흔들릴까 봐 주변 친구들에게도 말했죠. 회사에는 답이 없다. 그래서 나는 부업을 본업으로 만들고 퇴사하겠다고, 그리고 그게 올해가 되게 만들 것이라고요. 근데 제가 몇 년을 노력해 온 이 길이, 가뜩이나 남들보다 더디고 뒤처지는 느낌만 들던 찰나에 포기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요."


"그리고...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서 불안하기도 해요. 퇴근은 여전히 늦고, 저녁 자리가 너무 즐거워서 우선 먹고 또 올라와서 일할 때도 많아요. 주말에도 빈번하게 출근하죠. 그런데... 재미있어요. 그게 가끔 너무 불안해요. 여전히 빨리 돈 많이 벌어서 결혼도 하고, 집도 사고 싶고 그래요. 근데 회사에 시간을 더 쏟고, 일을 더 열심히 하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아지고, 저녁 약속이 즐거워지는 제 자신을 보면... 실패한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요."


가만히 듣던 선생님은 덤덤하게 말했다.


"저희 2년 넘게 봤죠? 저는 많이 들어서 알잖아요. 왜 청년이 회사에 자신을 갈아 넣었고, 얼마나 힘들게 인정을 받았는지. 그리고 왜 무너졌는지. 또 바로 옆에서 긴 시간 동안 지켜봤죠, 인생 최악의 시간을 꾸역꾸역 극복해 내는 걸. 그리고 또다시 계획하고 실행해서 지금까지 어떤 결과를 냈는지. 지켜보고 알기 때문에 응원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나는 청년의 방향이 애초부터 바뀐 적이 없다고 생각해요. 회사에 몰두했던 이유도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였고, 아팠던 것도 그 목표로 갈 수 없는 방향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우리 처음 만난 날, 청년은 다 죽어가던 사람과 다를 바 없었어요. 말도 안 통하는 벽 같았죠. 근데 지금 봐요, 또 계획을 세우고 계속 무언가를 하잖아요? 다른 사람보다 느리다고 느끼는 건, 어쩌면 잘된 소수만을 봤기 때문일지도 모르죠. 나는요, 내 주변에 청년처럼 회사 다니면서 매출 내는 사람 본 적이 없어요."


나는 말없이 듣기만 했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조금씩 커져갔다.


"얼마 전에 특진했죠? 그거 아무나 하나요? 좋은 상사를 만났다고 했죠? 좋은 상사 만나면 다 그렇게 하나요? 너무 좋은 구성원들을 만나서 좋은 관계에 대해 경험하고 있다고 했죠? 구성원들만 좋으면 다 그렇게 되나 보죠?"


선생님은 단호하게 말했다.


"본인에게 엄격한 것도, 남들에게 관대한 것도 정도가 있어요. 다 본인이 잘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 뭐 큰일이라도 나나요?"


처음 봤다. 선생님의 화난 듯한 목소리.


"자신을 보듬어주세요. 힘들어서 무너져도 다시 일어서 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자신, 어떤 상황에서도 결국 인정받는 자신, 아마 다시 무너져도 다시 일어날 본인이... 기특하고 대단하다는 생각은 해보셨어요?"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 바닥부터 다 본 사람이라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평생 처음 겪어보는 행복감에서 나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면 가치관이 더 넓어질 수도 있죠. '내가 이럴 때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구나.'라는 걸 발견하는 건 엄청난 경험이에요. 물론, 상담사로서 무조건적으로 내담자의 편을 들 수도 있겠죠. '거창한 목표를 세워서 퇴사하신다더니, 점점 손에서 놓고 계시는 것 같은 느낌인데요, 좀 더 박차를 가해 보시죠.' 하면서요. 그런데요, 나는 상담사라 그런지, 행복함을 느끼는 청년이 참 보기 좋네요."


"청년이 전에 말했던 것처럼, 타인은 남에게 별로 관심이 없어요. 과거에 퇴사를 천명한 모습보다, 오히려 지금 더 인정받고 잘하고 있는 청년만 눈에 보이겠지. 부업을 포기한 게 아니라 지금도 하고는 있잖아요? 언제라도 다시 속도를 내면 될 문제라고 생각해 보는 건 어때요? 아마 이 순간도 영원하지 않을 거예요, 다시 무기력이 찾아올 수 있겠죠. 그때는, 또다시 일어날 본인을 믿어봐요."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긴 나를 보며,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애매하게 고민하면서 나에게 찾아온 행복을 반도 못 즐기는 거, 그것도 너무 아깝지 않아요?"

이전 07화 서른넷의 나 (3) _ 행복과 혼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