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다섯, 다시 무기력에 맞서다.
상담선생님과 상담을 진행하면서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살고자 하는 인생은 분명하고 방향도 확고해요. 그리고 회사일에 매몰되어 매일 불안감 느끼고 자책하며 사는 건 제 인생을 위한 일이 아니에요."
상담선생님은 나의 확신에 찬 말에 대답했다.
"맞아요, 지금까지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들어왔던 가치관과 심경의 변화들, 그리고 해왔던 노력을 보면 저도 그 길이 맞다고 생각하고 응원해요. 그런데..."
언제나 그랬듯이 상담선생님은 항상 내 사고의 범위를 넓혀주려 하셨다.
"지금 같이 좌절과 불안만이 있는 상황에도, 내 가치관에 부합하고 나에게 만족감을 주는 순간들이 갑자기 펼쳐질 수 있죠. 그게 나에겐 효용감과 재미를 주게 될 수도 있어요. 그때는... 그때는 어떤 느낌이 들 것 같으세요?"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그럴 일이 있을까요? 그렇다고 해도 제가 정한 방향으로 빠르게 달려가야죠."
이것이 정답이라고, 곧 진리와도 같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22년 10월, 회사에서 대규모 조직개편이 진행됐다. 내가 속한 조직은 1명의 임원(상무), 산하 3개 영업팀, 3명의 팀장과 27명의 팀원, 그리고 임원과 구성원 중간에 관리자 '주무'로 구성되어 있다. 내 R&R이 바로 '주무'였다. 주요 역할은 담당과 각 팀의 목표 수립 및 실적 관리, 리더와 구성원들 사이에서 소통 창구 역할, 대외 유관 부서의 협업이었다.
이번 조직개편으로 임원과 2명의 팀장이 교체되었다. 조직에는 대혼란이 찾아왔다. 예고도 없이 75%의 리더십이 교체되었기 때문이다. 추락한 자존감에 출근도 안 하고 이직을 준비하는 팀장님들을 보며 나는 또다시 생각했다. '아.. 역시 한순간이구나.' 탈출에 대한 조급함은 더 커졌다.
새로 온 임원은 부임하자마자 나를 찾았다. 내 역할에는 임원의 비서업무도 있었기 때문에, 업무 관련 체크를 하려나보다 했다. 그런데 그분은 대뜸 나에게 물었다.
"이 부서 주무 업무가 특히 힘들다고 들었어요, 고생 많았겠네." 그리고 이어 말했다.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면서요? 여전히... 생각에 변함없어요? 원하시면 보내드릴게요."
이상했다. 그토록 원하던 현장 복귀 제안을 받았는데, 즉시 대답하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동안 보냈던 세월 때문인지, 조직의 혼란과 남은 구성원들이 걱정됐다.
고민했다. 이 느낌이 무엇인지. 빠져나갈 수 있는 기회인데, 왜 망설이는지.
충동적으로 결정했다. 갑자기 생긴 손톱만 한 책임감과 이 변화가 바꿀지도 모르는 무엇인가에 대한 기대에 사로잡혀.
"일 년만 더해보겠습니다."
임원은 옅은 한숨을 내뱉으며 대답했다.
"후.. 한시름 덜었네, 고마워요. 잘해봅시다."
새로운 임원은 이전 임원과는 다르게, 나에게 중간관리자가 지녀야 하는 덕목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본인이 가고자 하는 방향에 대해 적어도 나는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리더와 구성원 사이의 소통 창구로써 나의 생각을 구성원들에게 부드럽게 전달하고, 구성원들의 애로사항은 거짓 없이 나에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인 부리듯 강압적으로 지시하던 이전 임원과는 사뭇 달랐다.
조직의 실적을 점검한 뒤, 나에게 자신의 체크 포인트에 대해 말했다. 그 첫 번째가 구성원 사기 증진이었다. 강압적인 아침 미팅은 사라졌다. 그 회의를 준비하던 내 시간은 30명의 모닝커피를 사러 가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가끔은 들리던 고함소리도 사라졌다. 골프공이나 오래된 책으로 쌓여있던 이전 상무님의 선반은 구성원들을 위한 다과로 가득 찼다.
점점 나에게 많은 결정권을 주었다. 영업 조직의 본질에 맞게, 페이퍼워크는 최소화하고 구성원들이 현업에 집중하게끔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용기 내어 상무님에게 제안했다.
"외부 대응 자료는 최대한 취합 없이 제가 대응하겠습니다. 그리고 내부 팀별 보고자료를 좀.. 간소화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심스럽게 꺼낸 나의 질문에,
"그러자, 자질구레한 줄글, 그래프 다 빼. 주요 지표 관련 숫자와 간단한 진행 사항만 작성하게 양식 바꾸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항은 네가 판단해서 나한테 따로 보고해 줘."라고 흔쾌히 결정했다.
변화하는 환경을 체감하며 구성원들은 점점 나에게 의견을 제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각자의 의견이 수용되는 경험을 하면서 더 많은 것을 공유하기 시작했고, 업무적인 요청이나 고민도 더욱 쉽게 공유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나는 중간관리자로서 의사결정을 대신 받아주거나, 유관부서와 문제를 풀어주는 형태의 도움을 줄 수 있었고, 구성원들은 내가 부족한 실무적인 부분에서 큰 도움을 주었다.
나아가 구성원들은 나에게 개인적인 고민도 다 털어놓았다. 그들이 회사에서 느끼는 불안감, 실망감, 미래에 대한 고민 등을 들을 때마다 너무 내 이야기 같고 때로는 참 슬펐다. 가끔은 내 가치관을 공유하며 과감하게 조언하고 싶었지만, 모두가 나처럼 퇴사를 꿈꾸지는 않았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들어주는 것뿐이었다. 그게 또 좋은 선배, 동료 이미지를 만들어주었는지, 나의 저녁 약속은 계속 많아져 갔다.
어느새 우리 조직은 소통이 잘되는 조직으로 소문이 나 있었고, 신기하게도 실적 또한 점점 좋아졌다. 게다가 상무님은 항상 이런 결과를 구성원들의 공으로 돌렸다. 누군가는 가식이라고 이야기하겠지만, 가식으로도 그게 쉬운 일인가? 항상 자리 보존이 최우선인 임원인데. 이런 선순환이 만들어낸 모든 변화가 나는 그저 신기했다. 그런 변화를 즐기며 나는 내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고, 그렇게 다사다난 했던 '22년도 마무리했다.
새 해의 한 달을 보내고 '23년 2월의 첫날, 여느 때와 같이 출근 직후 인사를 드리러 임원실에 갔을 때, 상무님이 갑자기 나에게 말했다.
'너, 발탁 승진 대상자다.'
이게 나에게 무슨 변화를 주었냐고? 살면서 처음으로 좋은 관계에서 오는 행복감을 경험했다.
평생을 독고다이, 아웃사이더를 자처하며 나만 잘하면 된다고 믿고 살았다. 주변 동료들과 조금 덜 친하더라도, 억지로 싹싹하게 하지 않더라도 내 실력만 있으면 남들에게 욕먹는 일은 없다고 믿었다. (솔직히 이건 아직도 조금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항상 남들보다 뛰어나야만 했고, 무엇이든 잘해야만 했다. 어쩌면 그래서 실수에 민감하고 늘 욕먹을까 봐 불안해하며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내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 여러모로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고, 그것에 사람들이 고마워하고 보답해주려는 경험을 또한 선물 같았다. 아이러니했다. 나 혼자 잘해보려고 발버둥치던 시절보다 오히려 조직은 더 좋은 성과를 냈고 나는 더 큰 인정을 받았다. 아마도 회사 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내 인생을 통틀어 다시 하기 힘든 경험일 것이다. 그래서 더 특별함과 행복감을 느꼈을 것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회사 생활의 만족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만큼 마음 속의 갈등은 점점 커져갔다.
나의 모든 가치관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여전히 나의 목표는 퇴사였다. 주말은 늘 공유오피스에서 부업을 했고, 회식으로 술에 만취해 늦게 귀가해도 발주는 넣고 잠에 들었다. 조금씩 성장하는 매출에 나는 희망을 품었고, 내 인생의 방향은 확고했다. 그러나 상담선생님의 말씀처럼 예상치 못하게 나에게 만족감을 주는 상황이 펼쳐졌고, 나는 확고하게 대답했던 것처럼 내가 정한 방향으로 빠르게 나아가고 있지 못했다.
혼란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