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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네 Choi Jul 13. 2024

몸속의 똥을 비우면 채워지는 것

인생의 전환점을 만드는 갈래길에서


몸속의 똥을 비워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면 일상에 큰 변화가 함께 찾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아기를 출산하기 전, 그리고 대장 내시경을 하기 전에도 약물의 도움을 받아 몸속을 비웁니다. 검진이나 수술을 앞두고는 금식을 해야 하죠. 쉬지 않고 일하던 똥 만드는 기계가 비로소 잠시 멈추게 됩니다. 아이가 태어난다든가 몸에서 뭐라도 문제가 발견되면 일상은 요동칩니다. 그래서 몸속의 똥을 비워내야 할 때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것들이 보이게 됩니다. 변화의 시작입니다.


한국에 돌아온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던 2021년 여름, 이제 적응도 다 되었으니 숨을 크게 들어마시고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려던 찰나였습니다.


"암입니다. 당장 수술을 해야 합니다."


의도치 않았고, 의도할 수도 없는 반전이었죠. 진료실을 걸어 나오면서 아내와 아이들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올랐습니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간 술 담배도 안 하고 건강한 식생활을 유지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30대 나이에 벌써 암이라니 허탈했습니다.


'왜 하필 나한테...'


젊은 사람들도 많이들 진단받는다는 갑상선암은 그나마 착한 암이라 불리기도 하고 이제는 암도 아닌 취급을 받습니다. 그러나 암은 암이죠. 며칠 동안 인터넷에서 검색을 하며 이런저런 안타까운 사례들을 읽다 보니 마음이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몸속에 암세포가 자라고 있다는 생각을 하다 보면 삶과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의지와 상관없이 불쑥 찾아온 건강의 변화는 이제껏 삶을 채우고 있던 여러 가지 의미들을 새롭게 정의할 것을 요구합니다. 사실, 삶에 충실하다 보면 역설적이게도 삶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여력이 많지 않습니다. 우리의 하루는 그때 그때 처리해야 할 수많은 일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죠. 


오히려 죽음이라는 낯선 단어가 성큼 다가온 것처럼 느껴질 때,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가치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죽음은 삶의 의미를 일순간에 앗아 갑니다. 사르트르가 말했듯이, 나라는 존재가 영원할 거라는 환상이 깨지는 순간 삶의 의미는 사라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필연적인 죽음에 맞설 의미들을 열심히 만들어냅니다. 스스로 존재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자존감이나 문화와 같이 육체가 사라지더라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살아남을 수 있는 정신을 남기려 애씁니다.


며칠간 이어오던 암 관련 정보 검색하기를 멈추었습니다. 그 대신, 한 번뿐인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은지, 가장 중요한 가치들은 무엇인지 다시금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솔직히 겁이 나기도 했지만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니 감사한 마음이 들더군요. 제가 어떤 쓸모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제 존재의 이유를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한 많은 노력들 중 하나일 것입니다.


2주 뒤로 수술 날짜를 잡아 놓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른 병원에 가 보았습니다. CT촬영을 위해 금식을 하고 의사를 만났습니다. 두 번째 의사는 같은 진단을 내렸지만 수술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언젠가는 수술을 해야 하겠지만 지금은 일단 지켜보자고요. 저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아직 마음의 여유가 있었기에, 추적 관찰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3년 간 감사하게도 암세포의 변화는 없습니다. 그때 검사를 하지 않았다면  아무 증상도 없는 이 암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모르고 살고 있었을 테지요. 확실히 변한 것이 있다면 제 삶에 대한 태도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아이들은 훌륭한 인내심 측정기이죠. 그럴 때면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맞다, 우린 모두 나그네 인생이지. 이렇게 서로 만나서 참 감사하다, 소중한 너희들과 다시 오지 않을 이 순간을 보낼 수 있어 그것으로 충분하다.'


앞서 2화에서도 얘기했듯이, 의미를 담는 항아리에는 큰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의미가 빠져나가고 나면 새로운 의미들로 다시 채우면 그만입니다. 의미를 채우는 과정에서 의미와 일상을 연결 짓게 되죠. 의미가 일상과 연결되면 하루하루가 풍요로워집니다. 결국 우리가 삶의 어려움이라고 부르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삶의 전환점을 만들어주고 진정 무엇을 하며 살고 싶은지 더 알 수 있게 해주는 삶의 필수 장치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되돌아보면, 저는 줄곧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학부생 시절, 심리학이 좋아서 공부를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고, 지금은 새로운 일들에 도전하며 '여전히 꿈이 있어 행복하다' 느낍니다. 어릴 적부터 유독 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꿈 많은 요셉(성경에 나오는 인물) 같다는 얘기를 해주시곤 했습니다. 꿈을 나누고 응원해 주는 일을 할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낍니다. 그래서 현재 직장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스무 살 언저리의 대학생들이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들의 꿈을 이야기할 때 그 눈을 마주 볼 수 있어 감사합니다. 코칭도 재미있지요. 고객이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하고 고객의 자기실현을 도와줄 때 저도 덩달아 힘이 솟습니다.


물론 더 큰 어려움들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해야 하는 때도 옵니다. 그러나 인생은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내 삶을 더 잘 살기 위한 연습, 내일을 살아가기 위한 준비의 연속입니다. 우리 인생은 어려운 것이 기본값입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을 이겨낼 만큼 강인한 것 또한 우리의 기본값입니다. 


당신의 삶에서 어려움을 만났다면 그건 변화를 위한 강력한 신호입니다.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까지 더 잘 볼 수 있도록 삶이 당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는 것입니다. 설령 잠시 의미를 잃어 힘들더라도 당신의 항아리가 깨지지 않는 한, 다시 새로운 의미들로 채워나갈 수 있습니다. 시간을 갖고 가장 소중한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세요.


당신에게도 또 한 번의 변화와 성장이 있기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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