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날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업무 처리를 위해 방문한 상가 빌딩 뒤편에 차를 주차했다. 일을 마치고 나가려는데 다른 차가 막고 있었다. 흔히 있는 일이지만 그날은 달랐다. 차를 밀어 봐도 꼼짝하지 않고 연락하려 했으나 전화번호도 보이지 않았다. 막연히 차주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무더위에 인내력을 소진해 가며 30분 이상 시간이 흘렀다. 차주인 듯 한 젊은 여성이 나타났다. 멀뚱히 서서 상기된 표정으로 쳐다보는 내게 그녀가 먼저 말했다.
“이 차 때문인가요. 빼달라고 연락하지 그랬어요?”
“전화번호가 없잖아요”
“어~ 여기 쓰여있는데….”
그녀의 손끝이 차의 안쪽 메모판을 가리켰다. 백지상태였던 메모지를 자세히 보니 노란색으로 흐릿하게 뭔가가 보였다. 핸드폰 앞번호 ‘010’ 없이 뒷자리 ‘00000000’ 8자리 숫자가 흘림체로 쓰여 있었다. 좀 전에 찾을 때는 분명 보이지 않았다. 더위를 먹어 주의력이 떨어졌던가?
말문이 막혔다. 상황이 반전되어 분위기가 갑자기 내 잘못처럼 되어 버렸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차를 물렸고,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간은 내가 허비했는데 어느 순간 상대를 불필요하게 압박한 몰지각(沒知覺)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평정심을 찾기 위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라는 주문을 반복하며 돌아서는데 차창 밖으로 그녀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남들은 잘만 보고 전화하더구먼”
이 말을 듣고 마음이 더 섭섭했다.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미안하다’란 말은 끝내 없었다. ‘내 탓이오’라고 위로하며 전화번호를 그렇게 적어 둘 수밖에 없는 그녀를 애써 이해해 보았다.
‘세상이 험하고 불편한 일이 생기니, 번호 노출을 방지하려는 의도였겠지’ ‘개인정보 유출로 곤란한 일을 겪은 적이 있었나 보다’라고 돌려 생각하니 마음이 다소 누그러졌다. 전후 사정은 알 수 없다. 단지 내 마음이 편해지기 위한 수단이었다.
우리 집은 어떤가? 아내 차에도 사실은 내 전화번호가 적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