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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둘 다 있다

베짱이

by 서람


어릴 때 읽었던 동화는 오랜 시간 동안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그 안에 담겨있는 삶의 방식은 세상을 살면서 보이지 않는 기준이었다. 누구나 다 아는 이솝 우화 ‘개미와 베짱이’에도 뚜렷한 메시지가 있다. ‘부지런하면 잘 살고 게으르면 못산다.’이다. 그렇게 개미는 '잘사는 존재', 베짱이는 '못사는 존재'가 되었다.


소유를 위한 활동이 곧 삶이었던 산업화 시대에는 '잘사는 사람'은 부자를 가리켰다. 반면에 '못사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다. 오로지 경제력만이 잘 살고 못 살고를 구분했다. 이 단순한 분석이 현실에서도 유효할까?

정보화시대로 넘어오면서 '잘산다'라는 말은 다양한 해석이 따라다닌다. 더 이상 소득이나 재산만의 문제가 아니다. 또한 사회적 잣대보다 개인적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가치관이나 인간관계, 정서적 안정감 등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현대인은 ‘얼마나 가지고 있나?’ 보다는 ‘어떻게 살고 있나?’를 스스로 점검하는 게 잘사는 삶이다.


동화 ‘개미와 베짱이’의 뒷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원래는 베짱이가 아니라 여름철에 많이 우는 매미였다고 한다. 개미와 비교하며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대립 구조로 만들다 보니 게으르지 않은 베짱이가 억울하게도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이번에는 현대적 감각으로 내가 이야기를 꾸며보았다. 개미와 베짱이는 한 사람의 두 가지 삶의 모습이다. 현대인은 때로는 개미처럼, 때로는 베짱이처럼 살아간다. 새벽부터 하루를 시작하는 부지런함과, 해가 중천인데도 이불 속에 있는 게으른 사람 모두 한 인간의 생활이다.

일만 하면서 사는 게 아니고 게으른 휴식만을 고집하는 것도 아니다. 일 속에서 휴식을 찾고, 휴식에서 일을 위한 계획을 세운다. 게으름에서 얻은 생각이 부지런함을 만나 일을 위한 계획이 된다는 말이다. 둘 중 하나만 있으면 삶은 균형을 잃는다.


옛 선인들은 인간의 덕이 ‘중용(中庸)’에 있다고 했다. 내가 알고 있는 중용은 ‘적당히 부지런하게, 적당히 게으르게.’이다. 그러므로 현대인의 잘 사는 모습은 둘 사이를 자연스레 오가는 것이다. 게으름은 부지런함을 쉬게 해주고, 부지런함은 게으름을 질투한다. 한 사람의 내면에서 같이 호흡한다. 게으름으로 오늘의 나를 충분히 사랑하면 내일을 준비하는 부지런함의 에너지가 된다.

한 사람, 두 가지 삶의 모습을 꾸며낸 이 이야기에서 베짱이의 마지막 말이다.


“인생은 살아가는 것과, 살아 있는 것을 느끼는 것, 모두 중요한 일이야.”


베짱이는 메뚜기목(目) 여치과(科)로 흔히 알려진 곤충 여치와 가깝다. 여치는 몸집과 다리가 뚱뚱하고 날개가 짧고, 주행성이다. 베짱이는 날씬하고 날개는 몸보다 길다. 등에 줄무늬가 있고, 낮에는 쉬고 해가 지면 활동한다.

베짱이는 이름이 독특하다. 동화책 그림에 배가 불룩하고, 일 안 하고 배짱 있게 산다는 선입견으로 그렇게 불린다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수컷이 '쓰윽잭 쓰윽잭' 하는 울음소리를 낸다. 마치 베틀에서 베를 짜는 소리같이 들려 '베짱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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