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군의 면적은 1,820.3㎢로 태백산맥의 크고 작은 지맥에 둘러싸인 중산간 지역이며, 홍천읍 시가지를 관통하는 북한강 지류인 홍천강이 태백산맥의 분수령으로부터 서쪽으로 흘러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에서 북한강과 합류하고 있어 그 유역에 작은 평야를 이루 있다. 고구려 시대에 벌력천현(伐力川縣)으로 칭하여 오다가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녹효(綠驍)로 고쳐 삭주(朔州 : 현재의 춘천)의 영현(領縣)이 되었으며 그 후 고려 제8대 현종 9년(1018년)에 홍천으로 고치고 제17대 인종 21년(1143년)에 감무(監務)를 두고 별호를 화산현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태종 13년(1413년)에 홍천현이 되어 현감을 두었다가 1895.5.26(고종 32년) 칙령 제98호로 춘천부 홍천현이 되었다.
홍천은 넓을 홍 내천을 쓴다.
현재 홍천은 동서는 동서 간 96.1㎞, 남북 간 39.4㎞이다. 그래서 고구마처럼 생겼다고 한다. 남한의 시·군 가운데 면적이 가장 넓기도 한 홍천은 군 전체의 87%가 산지로 형성되어 있다. 이렇게 많은 산지 중에서도 홍천군민의 노래 2절 첫머리에 ‘공작산 뿌리내려 수려한 고장 행복이 샘솟는 보리울에 살자…’라는 노랫말이 있을 정도로 공작산은 홍천을 대표하는 산이다. 여기에다 홍천에 주둔하는 군부대 인 수송 교육연대 군가에도 ‘공작산 정기 받아…’라는 노랫말이 들어가 있을 정도로 인지도가 꽤 높은 산이다.
홍천은 현재 고속도로가 서울-양양 간 고속도로와 중앙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예전에는 홍천을 경유하는 44번 국토를 많이 이용했지만 요즈음은 주로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44번 국도의 정체는 줄어들었다고 한다. 홍천은 전국 어느 지역보다 춥다. 그래서 일기예보시 홍천의 기온이 방송에 나오기도 한다.
겨울이 시작되면서 영하의 기본이 예보되어 있
어 추위가 이제는 성큼 다가온 날 아침, 친구와 나는 홍천의 공작산을 향해 간다. 코로나 시국에 사회적 거리두기를 최대한 확보하기 위하여 각자 출발하고 홍천에서 만나기로 하였다.홍천터미널에 도착하여 친구를 찾고 공작산 가는 농어촌버스에 탑승한 후 처음 얼굴을 본다.
홍천에 도착하니 춥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의 옷이 두껍고 깃을 여미고 다니고 있다. 공작산을 들어가기 전 내린 버스 정류장 부근은 서리가 내려 하얗다. 서리가 내린 산에 햇빛이 비취니 한결 따스해 보인다.
공작산에 대한 사전소개 글을 보면 해발 887m로 산 정상에서 바라본 홍천군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며, 산세가 공작이 날개를 펼친 모습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봄에는 철쭉,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다우며, 눈 덮인 겨울 산도 매우 아름답다고 홍천군 홈페이지에 소개되어 있다.
공작산은 정상에서 바라보면 홍천군 일원이 한눈에 들어오며, 풍치가 아름답고 깎아 세운 듯한 암벽이 장관을 이루는 곳이라는 소개도 되어있다. 이것은 정상에서 볼 수 있을 경우에만 가능하다. 여름에는 조망이 하나도 정상까지 가면서 볼 수없을 것이다. 초겨울 낙엽이 하나도 없음에도 시원한 조망은 정상에서만 가능했다.
공작산을 정상을 가기 위하여서는 여러 방향으로 갈 수 있다. 수타사에서 출발할 수도 있고 공작현에서도 출발할 수도 있고 공작골에서도 출발할 수도 있다.
홍천터미널에서 무조건 동면 방향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탑승하면 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서석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탑승하였다. 산객 3, 4명이 타고 있었고 지역주민도 이동 과정에서 탑승하고 내린다. 공작산 입구에서 내려서 걸어서 들어가야 한다. 저수지가 보인다. 저수지에 아침이라 공작산이 빠져 있지 않고 차가운 공기만 분다.
멀리 공작산이 보인다. 공작 벼슬처럼 공작산 정상이 보인다. 요즈음 카메라는 확대가 가능하여 당겨보니 재미있다. 나무가 새 모양을 하고 있다. 공작골 입구에서 휴양림으로 갈 것인지 공작현까지 고민하다가 능선 전체를 타보기로 하여 공작현까지 도로로 걸어간다.
공작현까지 가기도 전에 등산로가 보인다. 공작골 입구 등산로이다. 지나가는 차가 멈춘다. 왜 그런지 궁금해서 쳐다보니 차량을 운전하시는 분이 산불방지를 위하여 순찰을 하고 있다. 그분이 말하기를 불조심하여야 한다고 한다. 산불감시기간이고 이를 방지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 알겠다고 했는데 또 자동차가 멈춘다. 연세 드신 분이다. 산불감시기간에 또 주의를 준다.
산불감시기간은 산에 등산객이 들어가는 것을 멈춘다. 산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만 적절하게 관리될 수 있도록 등산객들도 요원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제 공작산을 들어간다. 안내판이 있다.
공작현이 아닌 공작골로 간다. 처음 접한 산에서 이정표를 따라가야 한다. 이정표가 있지만 회피하는 경우는 사람들이 많이 다님길이 있을 때다. 우리는 전체적으로 능선을 걷고 싶은데 갑자기 등산로가 아래로 흘러서 친구가 능선으로 가자고 제안을 한다. 지그재그 길이다. 힘들게 오르니 뾰족한 봉이다. 힘들지만 봉우리 정상에서부터 동작현에서 올라오는 등산로를 만나는 지점까지 능선길로 평탄하게 걸었다.
동작현에서 올라오는 등산로를 만나는 지점에서 정상을 바라보니 봉우리가 6개인가 7개인가를 지나야 한다. 거리는 1.7km 남짓이다. 하지만, 우습게 보면 안 된다. 봉을 넘고 넘어야 한다. 거의 1시간 20분이나 걸렸다.
봉우리 이름은 없는데 오를 때마다 해발은 높아진다. 정상을 가면서 새 모양의 나무는 잊어버렸다. 정상 부근의 바위산을 공작 벼슬의 하나로 우회하여 올라서 본다. 아무것도 없다.
정상을 향해 간다.
암릉과 밧줄이 이제 친구가 된다. 암릉과 밧줄이 수타사까지 가면서 지속적으로 친구가 되었다.
공작 벼슬에 올라가 있는데 박새가 찾아왔다. 산에 가면 먹을 것을 달라고 고양이가 오기도 하고 개도 오지만 새가 온 것은 처음이다. 산새가 먹을 것이 부족한지 우리 주변을 왔다갔다 한다. 친구가 우리가 먹으려고 가지고 간 견과류를 손바닥에 올려놓으니 새가 온다. 우리 손에 앉아서 쪼아 먹는다. 처음에는 물고 가서 먹다가 계속 손에 올려놓으니 계속 와서 쪼아 먹는다. 즐거운 경험을 하였다. 하지만, 계속 온다고 하여 계속하여 먹이를 줄 수 없어 야생상태가 유지되도록 경험만 하고 새와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공작 벼슬 위에서 새와 인간이 그냥 한 때를 즐겼다고 보면 될 것이다. 암릉을 올라가고 암릉을 내려올 때 밧줄이 기본이다.
이제는 수타사까지 가야 한다. 공작산이 힘들다고 하였는데 그렇게 힘들이지 않고 올라와서 왜 그런지 몰랐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진검승부다. 암릉과 밧줄이 지속적으로 있고 낙엽은 등산로를 가득 채워서 어디가 어딘지 모를 정도다. 수리봉까지 가면서 이곳이 힘든 이유를 솔직하게 경험하였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공작의 앞은 공작현이고 공작의 뒤는 수타산까지라고 보면 될 것이다. 가파르게 짧게 올라가는 곳이 공작산의 앞 쪽이라고 하면 길고 때때로 가파르게 오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홍천읍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은 어디나 마찬가지이므로 나는 수타사에서 공작산까지 올라가서 내려가는 것이 산을 타면서 오르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내려오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여기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7km 정도를 올라가고 2-3km를 내려가야 하는데 우리는 반대로 길을 잡았다. 친구는 올라오는 길이 이렇게 힘들었다면 못 올라왔을 것이라고 한다.
수리봉에 도착하니 친구가 말하기를 공작이 수리에 잡혀간 것 같다고 한다. 수리봉을 가파르게 내려간다.
수리봉에서 조금 내려가면 또 올라가고 거기에서 약수봉까지 가파르게 내려갔다가 다시 가파르게 올라가야 한다. 지도를 보니 등고선이 조밀하고 200m 이상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야 한다. 오늘 하루 산에서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했는데 처음으로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하는 시람을 만났다. 그저 반가울 뿐이다.
내가 생각하기로 가장 힘든 구간은 수리봉에서 내려와 약수봉을 올라가는 코스가 가장 힘들 구간이었다. 수타사에서 공작산 정상을 갈 때에도 약수봉이 558m이다 이곳에서 거의 300m를 내려간 후 수리봉이 820m이니 다시 올라가야 하니 힘들 수밖에 없다고 본다.
약수봉에 도착하니 이제 종료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이정표가 보인다.
수타사 방향으로 길을 잡고 걷는데 부부 산객을 만났다. 처음 뵙게 되어 반갑게 인사를 드린다. 그분들도 우리가 오늘 처음 보는 산객이라고 한다. 약수봉도 힘든 산행이니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수타사를 넘어가는 마지막 봉우리에서 또 한 명을 만났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면서 오늘 산행 중에 만난 사람은 4명이다. 그럭저럭 완벽하게 사회적 거리두기가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뒤를 돌아보니 공작산 정상과 수리봉이 보인다. 하지만, 새 모양의 나무를 확인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그 새가 박새가 되어서 우리에게 즐거운 추억을 준 것으로 생각하기로 한다.
수타산에서 출발하여 이곳 약수봉을 도는 길이 있다. 4코스까지 등산로가 안내되어 있다.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약수봉을 올라온 후에 능선을 따라 내려가는 길이 있다. 그리고 홍천 산소길을 만나서 돌아올 수 있다.
이곳도 해발이 500m 근처다 롯데타워가 얼마나 높은지 궁금하여 찾아보니 550m다. 우리는 롯데타워에서 전기 고장으로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서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한 형세가 수타사로 내려가는 형태다. 그런 만큼 가파르다고 할 수 있다. 내려가는 길도 지그재그다.
이제는 수타사가 보인다. 수타사에 대한 기억이 없는 데 용담을 보고 나서 아! 이곳을 한번 왔다 갔어 단지 용담을 확인하러 온 기억이 있다. 10년 전에 이곳에 와서 안전점검을 확인한 사실이 있다. 물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물놀이하다가 익사사고가 많이 나서 이곳에 안전시설을 하였는데 적절한지 여부를 확인한 적이 있다. 그것이 기억에 없었는데 용담의 안전시설을 보는 순간 기억에 되살아 난다. 그때는 사찰 옆에 물놀이 시설이 있다는 것이 그냥 신기할 뿐이었다. 이곳이 그렇게 유명한 공작산(887m)에서부터 내려오는 덕지천의 상류가 계곡을 이루고 있는데, 계곡 안에 수타사가 있어 수타사계곡이라 불린다고 한다. 수타사에서 동면 노천리까지 약 12km에 이르는 수타사계곡에는 넓은 암반과 큼직큼직한 소(沼)들 이 비경을 이루고 있어 휴식을 취하며 주변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수타사를 찾아 가본다. 수타사는 월인석보가 발견된 곳이라 한다. 수타사에 대하여 홈페이지에서 설명하기를 708년(성덕왕 7)에 창건되어 우적산(牛跡山) 일월사(日月寺)라 하였으며 영서지방의 명찰로 손꼽혀 오다가 1568년(선조 2)에 현 위치로 이건(移建)하면서 수타사(水墮寺)라 하였고, 그 뒤 임진왜란의 병화로 완전히 불타버린 뒤 1636년(인조 14)에 공잠(工岑)이 중건하였고, 1644년에 학준(學俊)이 당우(堂宇)를 확장하였다. 1647년에는 계철(戒哲)과 승가(僧伽)가 승당(僧堂)을 새로 건립하였고, 1650년(효종 1)에는 도전(道佺)이 정문(正門)을 세웠으며, 1658년에는 승해(勝海)와 정명(正明)이 흥회루(興懷樓)를 세웠다고 한다.
1670년(현종 11)에는 정지(正持)와 정상(正尙)과 천읍(天揖)이 대종(大鐘)을 주조하여 봉안하였고, 1674년에는 여담(汝湛) 등이 사천왕상을 조성하였고, 그 뒤에도 여민(汝敏)·지해(智海)·지행(智行)·성민(性敏)·찬징(贊澄)·선찰(善察)·성념(省念)·찬원(贊源)·상흘(尙吃) 등이 1683년(숙종 9)까지 계속하여 청련당(靑蓮堂)·향적전(香積殿)·백련당(白蓮堂)·송월당(送月堂) 등의 당우들을 차례로 중건하여 옛 모습을 재현하였다고 한다.
월인석보는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하여 세조 5년(1459)에 편찬한 불교대장경이다. 석보는 석가모니의 연보 즉 그의 일대기라는 뜻이다. 조선 세종 28년(1446)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들인 수양대군(후의 세조)이 불교서적을 참고하여 한글로 번역하여 편찬한 것이 곳 석보상절이다. 세종29년(1447) 세종은 석보상절을 읽고 각각 2구절에 따라 찬가를 지었는데 이것이 곧 월인천강지곡이다.
편찬동기는 죽은 부모와 일찍 죽은 아들을 위한다고 되어 있지만,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 죽이고 왕위에 올라 사육신 등 많은 신하를 죽인 끝에 당하는 정신적인 고통, 회한과 무상(無常)의 깊은 수렁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기 위하여 추진된 것으로 보인다고 자료들은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석보상절』로 미루어서 모두 24권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전하고 있는 것은 중간본까지 합쳐도 완질이 되지 못한다고 한다.
그중 권17과 권18이 수타사에 있는 것이다.
세조 때 처음 간행된 초간본으로, 2권 1책이다. 수타사 봉황문에 있는 사천왕상의 복장 부분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권17권은 전부가 완전하며, 권 18은 제87장 하부가 없어졌으나 보존상태는 양호하다고 하다고 하는데 박물관이 코로나19로 문을 닫고 있어 볼 수 없었다.
이곳 약수봉은 태봉이라는 안내판이 있다. 홍천 출신의 정희왕후의 태가 붙여 묻어다고 한다. 사실 그분이 왕비가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기태를 묻어서 왕후가 된 후 태봉이 된 것이다. 정희왕후는 왕자인 수양대군과 결혼을 하고서도 왕후가 된 것이 아니고 수양대군의 역성혁명에 의하여 왕후가 되었고 그 결과 태봉이 된 것이다. 정희왕후는 아들이 예종이 요절하고 그 손자인 성종이 즉위한 후 대왕대비가 되었다. 전국에 이러한 태가 붙은 지명이 있다. 그곳은 왕광 왕비의 태가 묻힌 곳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이제 수타사를 나와서 주차장에서 홍천 나가는 버스를 타면 된다. 하지만, 버스는 1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구세주가 나타났다. 거기에 홍천에서 오신 분이 돌아가면서 우리를 홍천까지 태워주신다고 한다. 그분의 성의에 의하여 홍천까지 빠르게 나왔다.
홍천터미널에서도 자동 발매기 앞에서 안내를 칼같이 한다. 홍천의 이미지가 새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