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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기만 Feb 16. 2021

서울 둘레길 8코스-2

서울 둘레길은 8코스로 나누어 관리되고 있다. 그중에 8코스는 북한산 둘레길과 중첩되어 있다. 그래서 길다. 북한산 둘레길은 이코스를 재미나게 이름을 붙여 놓았는데 서울 둘레길은 아니다. 그냥 이정표만 불여 놓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도봉산역 입구에서 시작하여 구파발역까지를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다양하게 묘사하고 이를 관리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사실 나는  여러 번 이곳을 지났다.

북한산 둘레길을 걸었고 친구들과 걸었으며 친목모임에서 걸었다. 우이령을 이용하여 북한산 둘레길을 걸을 때는 더욱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우이령에서 시작하여 정릉까지 걸어보면 더욱 좋다. 산길과 도심 4.19 묘지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의 묘를 참배하기도 한다.


도봉산역에서 출발하여 정릉까지 걸어 본다. 도봉산역에서 도봉산 입구로 걷는다. 도봉산 입구의 도봉탐방지원센터를 지나자마자 북한산 국립공원 안내판에서 갈림길이다. 정면은 도봉산 정상으로 정면으로 가다가 오른쪽은 회룡역으로 가는 북한산 둘레길 왼쪽은 북한산 둘레길로 18구간 도봉옛길 19구간 방학동길 20구간 왕실 묘역 구간이다.


도봉옛길이다. 사찰로 능원사와 도봉사가 있는데 나는 도봉사를 들려보았다. 가람 뒤편에서 바라다보는 도봉산 정상이 아름답다. 어디에서 볼 수 없는 뷰 포인터라고 할 수 있다. 포대화상이 사찰 앞을 지키고 있다.

보문능선을 올라가는 길에서 이제 무수골로 가는 길과 보문능선을 올라가는 갈림길이다. 이제 평안하게 걸어보자 하고 걷는다. 가을에는 이 길이 단풍길이다. 한 번쯤 걸어 보는 것이 낭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냥 걸어도 단풍놀이가 되는 구간이 도봉탐방지원센터 입구에서부터 무수골까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무수천()은 무수골이라는 골짜기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세종의 아홉째 아들 영해군()의 묘가 이 골짜기에 있는데, 세종이 생전에 아들의 묘에 왔다가 원터 약수를 마시고 물맛이 좋고 경치 좋은 곳이 아무런 근심 없는 곳이라 하여 무수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는 원래 이 마을에 대장간이 많고 대장장이가 많이 살아 무쇠골 또는 수철동()으로 불렸는데, 무쇠골이 와전되어 무수골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단풍터널이 계속되는 구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길이 정리정돈이 잘되어 있다.

북한산 둘레길 도봉 옛길을 넘어 방학동길 구간에 세워진 쌍둥이 전망대에 올랐다. 전망대 올라서 주변을 볼 수 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올라가서 본다. 멀리 도봉산을 찾아본다.

한 번쯤 북한산 둘레길 또는 서울 둘레길을 걸으면서 전망대에 올라 멀리 바라보는 것도 하나의 추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의공주 묘다. 세종의 둘째이며,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한글 창제에 깊이 여된 것으로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죽산안씨대동보(竹山安氏大同譜)』에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는 사실이다.


“世宗憫方言不能以文字相通 始製訓民正音 而變音吐着 猶未畢究 使諸大君解之 皆未能 遂下于公主 公主卽解究以進 世宗大加稱賞 特賜奴婢數百口” 즉 세종이 우리말과 한자가 서로 통하지 못함을 딱하게 여겨 훈민정음을 만들었으나, 변음과 토착을 다 끝내지 못하여서 여러 대군에게 풀게 하였으나 모두 풀지 못하였다. 드디어 공주에게 내려 보내자 공주는 곧 풀어 바쳤다. 세종이 크게 칭찬하고 상으로 특별히 노비 수백을 하사하였다고 되어 있다.

어쩌면 야사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정의공주가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매일경제 자료에 따르면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는 철저하게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대다수 백성들은 어려운 한문 때문에 글을 읽을 수도 쓸 수도 없었다. 세종실록을 깊이 들여다보면 세종의 의도는 익히기 쉬운 훈민정음을 통해 백성들이 쉽게 글을 배워 억울한 송사(訟事)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창제 막바지에 변화하는 소리인 변음(變音)과 입안에서 나왔다 들어가는 소리인 토착(吐着)을 글자로 만들지 못했다. 그래서 세종은 천하 영재로 소문난 자기 왕자들과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들에게 해결 방안을 찾게 했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해결하지 못했다. 그래서 세종은 정의공주에게 부탁했고 그녀가 이를 해결해 훈민정음을 완성할 수 있었다.(출처 : 매일경제, 13.10.8일자)


다음은 우리에게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묘다. 조선시대 왕이었으나 군으로 강등된 왕이 셋이다. 현재는 단종이지만 숙종조 전까지는 노산군과 반정에 의하여 몰락한 연산군과 광해군이다. 광해군에 대하여 우리는 인조의 무리한 반정이라는 설이 현재는 주류 학설이 되고 있지만 연산군은 지금까지 폭군으로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연산군이 사람을 많이 죽인 것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연산군은 왕과 신하의 전쟁에서 패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대로 폭군이 되어 버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숙종이나 영조 등의 시대에도 수많은 양반들이 환국 정치에 희생되어 죽었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도 폭군이라고 하지 않는다. 연산군은 신하와 임금의 전쟁에서 패했다. 기본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신하들을 어떤 이슈를 이용하여 몰락을 시킨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연산군이 폭군이었다면 이복동생인 중종을 그대로 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다만, 정치에서 패하고 모든 것이 끝이 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연산군 묘는 왕자의 묘에 준하는 크기이다.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축출되어 폐주가 되었고, 군(왕자)의 신분으로 강등되어 강화 교동도으로 귀양을 가서 2개월 후인 그 해 11월 사망하게 되면서 그곳에 묻혔다가 1513년 연산군의 아내 신 씨의 청이 받아들여져 경기도 양주군 해동면 원당리에 대군 신분의 예우로 안장되었다고 한다. 그곳이 지금의 도봉구의 연산군묘다. 대군의 예우로 묘를 조성하였기 때문에 통상적인 능침의 형태보다 소략한 것이 특징으로, 봉분과 담장, 묘비 각 1쌍, 혼유석과 망주석 각 1쌍, 장명등 1쌍, 향로석 1좌, 재실은 갖추어져 있으나, 능에 세우는 석호, 석양, 석마, 사초지, 무인석 등은 없다.

연산군 묘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유네스코문화유산에 등재되지 조선왕릉은 북한지역에 있는 왕릉인 정종과 정종의 왕비 무덤인 후릉, 연산군묘, 광해군묘 등이다.

연산군묘 앞에는 유서 깊은 우물이 있다. 원당샘 공원이다. 원당샘은 600여 년 전 파평윤씨 일가가 자연부락인 원당마을에 정착하면서 이용하였다고 하며, 마을 이름을 따서 원당샘으로 불리고 수백 년 동안 생활용수로 공급되었다. 그러나 2009년부터 물이 흐르지 않아 2011년 지하수를 연결하여 원당샘이 마르지 않고 흐를 수 있도록 복원하였으며, 북한산 둘레길과 인접되어 있어 주민과 등산객의 왕래가 빈번한 곳으로써 원당샘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하게 되어 연산군묘 및 은행나무와 함께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지는 새로운 도봉구의 문화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이제 우이동으로 이동한다. 우이동은 북한산과 도봉산 올라가는 길목이다. 그만큼 산객들이 많다. 예전에 불암사, 수락산,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을 1박 2일에 걸쳐서 걷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 대열에 동참을 하지 않았지만, 북한산 도봉산을 하루에 걸어 본 기억이 있다. 북한산을 내려와서 우이동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올라간 기억이 있다. 지금의 우이동은 리조트도 들어서고 영봉을 올라가는 길도 있고 우이령을 가는 길도 있다. 아울러, 우이 경전철이 신설되고 나서 요즈음은 산행이 쉽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손병희선생묘역을 시작으로 소나무 숲길이다. 손병희 선생은 1919년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3.1운동을 주도했다.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병보석으로 출옥한 후 1922년 5월 가족들이 보는 가운데 별세하였다고 한다. 민족대표 33인 중 변절자도 있었지만 손병희 선생은 일찍 세상을 떠 그러한 추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당시 천도교 대표로 참여하였던 최린이 변절을 하였다. 기독교 대표였던 박희도가 변절을 하였다.


자수 박물관을 지나 덕성여대 입구에 있는 솔밭공원이다. 자생하는 소나무 숲을 강북구청에서 사들여서 조성했다. 서울특별시에서 평지에 있는 소나무 군락지로는 유일한 곳으로 2004년 1월 28일 개원했다. 솔밭공원 역이 있다.

4.19 묘역이다. 4·19 민주묘지는 1960년 3·15 부정선거에 맞서 일어섰던 우리들의 선배들을 모신 묘역이다. 4·19 혁명 때 희생된 분들의 합동분묘로서, 이들을 기리는 기념탑이 세워져 있고, 전시공간인 4.19 혁명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을 지나면서 숙연해진다고 할 수 있다. 예전에 4.19일이 되면 많은 학교에서 기념 마라톤을 하였다. 이곳까지 왕복하기도 하였다.  근처에 있는 고대의 4.19 기념 마라톤은 유명하였다고 할 수 있다. 4.19 묘지를 둘레길에서 볼 수 있어서 더욱 좋다.

그분들을 위하여 묵념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광복군 합동 묘소이다. 광복군 합동묘소는 1943년~1945년 중국 각지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였지만,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못한 광복군 선열 중 신원과 생사가 확인된 17위 합동묘소로 1967년 한국광복군 동지회가 조성하였고, 1985년 국가보훈처에서 단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 곳이다. 이낙연 전 총리가 이곳에 참배하여 일반인들에 많이 알려졌다.


이웃한 곳에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 선생 묘역도 있다.

이제 이준 열사 묘역이다. 이준은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서 을사조약의 부당함과 일제의 압력을 호소하기 위해 이위종, 이상설과 함께 헤이그밀사로 파견되었으나, 일본과 그 당시 일본과 동맹관계였던 영국의 방해로 회의장에 들어서지도 못하고 기자회견을 하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고 한다.


이준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헤이그에서 지병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죽음에는 이견이 많은데, 일설에는 일제에 의해 독살당했다고 한다. 옛날 위인전에는 1907년 7월 18일 자 대한매일신보에서 "의사가 자결"이라는 제목으로 이준의 자결을 호외 보도한 것을 근거로 할복자살이라 써진 경우가 많았으며, 심지어 회의장 앞에서 배를 갈라서 내장을 던졌다는 흉흉한 내용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 사실이 아니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지병이 악화되어 죽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순국 사흘 후 헤이그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3년, 헤이그에 안치되어 있던 유해가 55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 10월 4일 국민장을 치른 후 서울 수유리 순국선열 묘역으로 이장되었다고 설명이 되어 있다.


이준 열사 묘역은 관리가 잘되고 있다. 이준 열사가 대한제국 황체로부터 받은 칙서를 그대로 옮겨 놓은 조형물도 있다.

통일교육원을 지나고 만나는 사찰이 화계사이다. 화계사다. 서울 둘레길을 걸으면서 만나는 가장 큰 사찰이라 해야 할 것 같다. 둘레길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찰들 중에 그래도 이름이 난 사찰이 조금 있지만 버스에 화계사 입구라고 표시되어 있는 사찰은 화계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직할교구에 속해 있으며, 서울 시내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도심 사찰이면서 산수가 수려하고 산기슭의 울창한 숲에 감싸여 있어 시내의 번잡함을 잊게 하는 고요함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서울 도심에 있는 사찰 중에 템플스테이를 하는 몇몇 안 되는 사찰 중에 하나라고 보면 될 것이다. 특히, 화계사 국제선원과 계룡산 무상사와 영주 현정사 등 한국 불교를 배우고자 하는 외국 수행자들이 모여 수행정진을 하고 있는 참선수행과 국제포교의 중심 사찰이라고 한다.

이제 화계사를 지나 빨래골로 간다. 빨래골 직전에 흰구름 전망대를 올라간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북한산의 모습이 이채롭다. 사람이 누워있는 모습과도 같다.

이제 빨래골이다. 대궐의 무수리들이 빨래터와 휴식처로 이용하면서 ‘빨래골’이라 불렸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아브라함 링컨의 명언이 있어 옮긴다.

"나는 천천히 걷지만 절대로 뒷걸음질 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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