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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Oct 01. 2021

가부장도 사랑을 하나요

가부장도 사랑을 하나요     

6.13



     

나의 할아버지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까지도 할아버지는 정정했다. 건강해 보였다. 늘 몸이 아프던 할머니보다는 확실히 괜찮으신 것 같았다. 친척들도 엄마도 아빠도 할아버지가 이렇게 돌아가실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나도 그랬다. 정말 갑자기, 순식간에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여느 때와 같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가 잠들었고, 깨어나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한참 동안 일어나지 않자 할머니가 아빠를 불렀다. 할아버지는 병원으로 실려 갔다. 나는 갑작스러운 소식을 듣고 엄마와 함께 병원으로 갔다. 명절에나 다 같이 만나던 친척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할아버지는 중환자실에 누워있었다. 잠들어있는 것 같았다. 고모가 할아버지 손을 잡아보라고 했다. 만져도 괜찮다고 했다. 나는 할아버지의 손만 잠깐 잡았다가 물러났다. 따듯했다. 고모는 혈액순환을 도우려는 건지 팔과 손을 꽉꽉 주물렀다. 내가 물러나는 걸 본 고모가 싫으냐고 물었다. 

그게 아니었다. 나는 무서웠다. 내가 할아버지를 잘못 건드렸다가 할아버지한테 문제가 생길까 봐 무서웠다. 고모가 힘주어 주무르는 팔이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너무나 연약해 보였다. 살짝만 건드려도 산산이 조각날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병원에 실려 가고 일주일 후 돌아가셨다. 어안이 벙벙했다. 할아버지는 정정했다. 늘 그렇듯 냉장고 옆면에 기대어 텔레비전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마다 툴툴대고, 가사노동은 일체 손도 대지 않았으며 내가 오면 텔레비전 리모컨을 넘겨주던 할아버지. 내가 언제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의 눈을 마주 보았던가. 기억이 안 났다.

중환자실의 부서질 것 같던 모습이 살아있던 할아버지의 마지막이었다. 할아버지는 잠든 채로 다시 눈뜨지 못했다. 나는 장례식장 지하의 영안실에서 할아버지를 봤다. 할아버지는 입을 벌리고 있었다. 몸이 쪼그라든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은 마치 모르는 사람 같았다. 홀쭉한 볼, 치솟은 광대. 할아버지가 좀 줄어든 것 같았다. 사람이 죽으면 다 이렇게 쪼그라들거나 비틀어지면서 못 알아볼 만큼 변하는 걸까. 

아빠가 손을 잡아보라고, 만져봐도 괜찮다고 했다. 중환자실에서 봤던 할아버지는 그냥 자는 것처럼 보였는데 영안실에 누워있는 할아버지는 정말 다른 사람 같았다. 나는 왠지 모르게 조금 무서웠다. 아빠가 다시 말했다. 손잡아봐, 아직 따듯해. 

망설이다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새겨져 있는 주먹 쥔 손을 잠깐 잡았다가 내려놓았다. 아직 따듯했다. 아직 살아있는 것 같았다. 친척들이 돌아가면서 한 번씩 할아버지의 손을 잡거나 말을 걸었다. 모두가 할아버지와 작별 인사를 한 후 밖으로 나가서 할아버지가 비단 강보에 둘둘 말리는 걸 지켜봤다. 장례식장 직원은 빠르게 천을 휘휘 돌려 할아버지를 천으로 감쌌다. 순식간에 할아버지는 갓 만든 미라처럼, 애벌레 고치처럼 돌돌 말렸다. 사촌들이 눈물을 흘렸다. 나는 집중해서 할아버지를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눈물이 찔끔 나왔다. 

사촌들과 나는 장례식장을 찾아오는 손님이 없을 때 뒷방에 들어가 놀았다. 우리가 이곳이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이라는 것도 잊고 너무 크게 웃자 아빠가 들어와 우리가 왜 모였는지를 상기시켜 줬다. 민망해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는 내가 웃을 수 있다는 것, 즐겁게 놀 수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지는 않았는데, 죽음이란 것이 정말 하나도 실감 나지 않았고 슬프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진실을 이해하는 건 쉽지 않았다. 죽음을 나와 아무 관련 없는, 괴담 같은 것처럼 여겼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어른들은 할아버지를 화장시키기로 했다. 제일 가까운 화장장에 도착했을 때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관이 커다란 가마 같은 것에 들어가는 모습을 시시티브이 카메라로 볼 수 있었다. 관이 완전히 들어가고 카메라가 꺼지자 고모가 울었다. 너무도 서럽게 오열했다. 나와 사촌들은 화장장에서 발견한 낯선 브랜드의 편의점으로 슬그머니 들어갔다. 테이블에는 우리 말고 아무도 없었다. 내가 밀린 웹툰을 다 보고 서바이벌 살인 게임 열판을 할 때까지도 우는 소리가 들렸다.

장례식을 모두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왜 그렇게 아무 감정이 들지 않고 실감도 안 나는지 나도 내가 이상했다. 정말 이대로 20분만 걸어서 주공아파트로 가면 멀쩡히 텔레비전을 보다가 바닥을 손으로 쓸어 머리카락을 줍고는 툴툴대고 있을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훤했다. 

할아버지는 머리카락이나 먼지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걸 싫어했다. 늘 손으로 바닥을 쓸어서 머리카락과 먼지를 주워냈는데, 내가 머리를 많이 길렀을 적에는 긴 머리카락이 보이면 주워서 내 머리카락이라며 핀잔을 줬다. 투정과 다름없이 느껴져서 툴툴대는 할아버지가 조금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어릴 때는 방학 중에 일주일 정도 할머니 집에 놀러 가곤 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살던 아파트는 작고 어두웠다. 부엌과 붙어있는 작은 거실 옆으로 좁은 방이 두 개 있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따로 지냈다. 할머니가 지내던 방에서는 늘 안티푸라민 로션의 싸한 냄새가 났다. 할머니는 늘 천천히 걸었고 어딘가 아팠다. 아빠는 할머니가 옛날에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아픈 거라고 했다. 왜 그렇게 고생을 많이 했는지, 가난과 더해 어떤 고난이 할머니를 고통스럽게 했는지 나는 어림짐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너무 흔해서 더 끔찍한 이야기였으니까. 

할아버지는 거실에 이불을 깔아두고 냉장고 옆면에 등을 기댄 채 텔레비전을 봤는데 잠도 그 이불에서 잤다. 흰 바탕에 검은색으로 꼬불꼬불한 무늬가 그려진 이불에서 할아버지는 온종일 앉아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옛날부터 할아버지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할아버지는 엄마·아빠가 질색하는 채널의 뉴스들을 즐겨보곤 했다. 그런 채널에서는 늘 늙은 남자들이 양복을 입고 나와 빨갱이니, 종북이니 목에 핏대를 세우며 떠들어댔다. 한참 그런 채널을 보다가도 내가 오면 리모컨을 건네주며 너 보고 싶은 것을 보라고 했다. 나는 투니버스 채널을 틀고 이불에서 굴러다녔다. 명탐정 코난같이 무서운 프로그램을 볼 때면(그때는 코난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나오는 BGM이 진짜 무서웠다) 할아버지 냄새가 나는 그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만 빼꼼히 내놓았다. 밤이면 할아버지 옆에 누워서 텔레비전의 재미없는 뉴스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

할아버지는 자전거를 자주 주워왔다. 자전거 도시 상주답게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며칠이나 방치된 건지 알수없는 자전거도 많았다. 할아버지의 말로는 버려진 것이었고 겉보기에도 낡은 것 같았지만 분명히 남의 물건이었다. 아빠는 그런 자전거를 좋아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에도 할아버지의 자전거는 그 작은 아파트 밑의 자전거 보관소에 묶여있었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낡은 자전거들이 녹슨 철 바구니를 달고 한 줄로 서 있었다. 

그렇게 주워온 자전거에 가끔 나를 태우고 밭으로 가곤 했다. 자전거에 앉아 할아버지 허리를 붙잡고 장난을 치다가 혼나기도 했다. 낡은 자전거가 내는 지르르르 소리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할아버지가 가서 살펴보던 밭은 할머니의 것이었다. 할머니는 농사를 지었다. 배추, 무, 토마토, 시금치를 키워서 칠일장에 내다 팔았다. 할아버지는 밭에 자주 들렀지만, 할아버지의 노동력이 그 밭에 많은 도움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정말 밭을 살펴보는 정도만 했다.

할머니는 그렇게 번 돈으로 내게 용돈을 주셨다. 할머니는 늘 내게 용돈을 주고 싶어 하셨지만, 할아버지가 좋아하지 않는다며, 할아버지가 텔레비전에 집중하고 있을 때 몰래 용돈을 주곤 하셨다. 할머니가 기른 토마토는 정말 맛있었다. 물맛 나는 슈퍼마켓의 토마토들과 달랐다. 할머니는 농사를 계속 짓고 싶어 하셨지만 몸이 점점 더 안 좋아지면서 농사를 그만두셨고, 할머니의 밭이 있던 자리는 차도가 되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일 년 뒤, 우리 집으로 친척들이 모였다.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나는 그제야 할머니의 몸을 아프게 만든 ‘고생’에 포함된, 어쩌면 가난과 노동보다 고통스러웠을 폭력 이야기를 들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때렸다. 아빠도 때렸고, 고모들도 때렸다. 큰고모가 말하길,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때릴 때면 큰고모는 동생들을 데리고 옆 동네에 있는 친척의 집에 갔다. 밤길을 걸으며 동생들을 달래려고 노래를 불렀다.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에 집으로 돌아오면 하얀 창호지에 점점이 튄 새빨간 핏자국이 고모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식구들을 굶겨 죽이지 않기 위한 어떤 경제활동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끝까지 도망가지 않고, 굳은 일 험한 일 가리지 않고 일해 고모와 아빠와 삼촌을 키웠다. 

할아버지는 술도 많이 마셨다. 친구들과 등교하는 길에 취해 잠든 할아버지를 고모는 필사적으로 모른 척했다. 고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섬유공장에 들어갔다. 고모의 첫 월급은 그대로 할아버지 손에 들어갔다. 할아버지는 그 돈으로 멋들어진 트렌치코트를 사 입고 돌아왔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 내내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잊고 있던 할아버지의 폭력적인 이면이 떠올랐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할머니 집에서 잠깐 지낸 적이 있다. 엄마의 공시를 위해 아빠와 잠시 와 있었던 것 같다. 어느 늦은 저녁, 어두침침한 형광등 밑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아빠와 고모가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 싸움의 이유를 그때의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른들이 싸우는 소리를 들으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흐느끼던 것만 생생하다. 할아버지가 우산으로 내가 웅크리고 있는 방문을 마구 두드리는 소리, 고함과 무언가가 박살 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 싸움의 원인이 왜인지 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아는 모든 신들의 이름을 부르며 중얼거렸다. 제발 저 싸움을 멈춰달라고. 내가 잘못했다고. 

나중에 아빠에게 그 일을 물었더니,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함부로 대하는 걸 막았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화를 냈다고 했다. 그래서 아빠에게 간섭하지 말고 돌아가라고 했고, 그래서 내가 들어가 있던 방문을 그토록 두드려댔던 것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빠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내가 든 방문을 두드리긴 했지만, 할아버지는 나를 예뻐했다. 사촌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나를 더 반겼다. 큰고모가 말하길, 사촌들이 어릴 때 길에서 할아버지와 마주치면 할아버지는 절대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린 사촌들이 ‘할아버지!’ 하며 반갑게 인사하면 ‘어.’ 짧게 대답하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할아버지는 사촌들에게 용돈도 거의 주지 않았다. 내가 어릴 때 한 번씩 손에 천 원짜리를 쥐여준 것 말고는 할아버지의 주머니에서 돈이 나오는 걸 본 적이 없다.

우리 가족이 대구에 살던 적, 가끔 찾아올 때마다 할아버지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우리를 기다렸다. 돌아갈 때도 베란다로 나와서 우리가 길모퉁이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곤 했다. 엄마가 말하길 할아버지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었지만, 엄마에게 할아버지의 피붙이들을 대한 것처럼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엄마가 아빠와 결혼할 때 친정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내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그 부분에 대해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고, 나를 낳았을 때도 딸이라고 타박하거나 섭섭한 말을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원래도 내게 말을 많이 걸지 않았지만 내가 자랄수록 할아버지와 대화라고 할 만한 대화를 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사실 할아버지는 누구와도 거의 대화하지 않았다. 일 년에 두 번씩 제사를 지낼 때 고모부들이 할아버지와 술을 마시거나 새해를 맞아 할아버지의 집에 먼 친척들까지 모두 모여 근황을 나눌 때 빼고 할아버지가 대화다운 대화를 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늘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할머니나 고모나 엄마가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툴툴댔다. 그건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저건 저렇게 해야 하고…. 그들은 할아버지의 핀잔에 익숙했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그 미묘한 분위기를 느꼈다. 아빠가 할아버지를 볼 때 느껴지는, 무언가 끓어오르는 것 같은 울렁임. 고모들과 사촌들이 할아버지를 대할 때 보이는 미묘한 거리감. 할아버지가 모두에게 시도 때도 없이 핀잔을 줄 때 모두의 얼굴에 나타나는 지긋지긋함과 엇비슷한 미소.

나는 내게 무뚝뚝한 애정을 주던 할아버지와 무책임하고 끔찍한 가정폭력을 행사했던 할아버지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할아버지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도, 전처럼 애정을 가지고 할아버지를 기억해야 할지는 고민이 많이 됐다. 나는 할아버지가 좋았다. 할아버지는 내게 어떤 식으로 애정을 주어야 하는지는 잘 몰랐던 것 같지만, 무뚝뚝한 말과 행동에서 나를 아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왜 나를 예뻐했을까? 그토록 가부장적인 사람이었으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다 머지않아 이유를 깨달았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두 고모의 자식들은 쳐다도 보지 않았으면서 나는 봐주었던 이유. 고모의 아들들이 조금만 잘못해도 핀잔을 줬지만 내가 날뛰는 건 가만두었던 이유. 

그건 내가 아빠의 딸이기 때문이었다. (역시 가부장적인 사람..) 어릴 때부터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내게만 관심을 두는 이유, 할머니가 나를 더 챙겨주는 것 같은 느낌, 이 집안 사촌 중 가장 귀염받고 있다는 확신. 내가 아빠의 딸이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장남인 우리 아빠의 외동딸인 나이기 때문에. 딸이지만 아들의 딸이라, 딸의 아들보다 귀염받을 수 있었다. 모두 정장 입은 남자 어른뿐이었던 제사상 앞에서 나 혼자만 어린 여자애였다. 그게 불편하게 느껴진 순간 자진해서 뒷방으로 도망갔다. 

모두 우스갯소리로 삼촌이 아들을 낳으면 나의 시대는 끝이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그 농담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할아버지가 사촌들을 대하듯 무관심하게 나를 쳐다도 보지 않는다고 상상하면 불안했다. 할머니가 나 말고 더 아끼는 손주가 생긴다면 너무 속상할 것 같았다. 그래서 삼촌이 결혼하지 않기를 바랐다. 결혼하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기를 바랐다. 애정을, 관심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고모들과 사촌들은 내가 밉지 않았을까? 그들은 내게 늘 잘해주었다. 나를 예뻐해 주었다. 어쩌면 그들은 진작에 할아버지에게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들에게는 내 하나뿐인 할아버지 말고도 할아버지가 하나 더 있었으니까. 사촌의 다른 할아버지를 한번 뵌 적이 있는데, 사촌은 우리 할아버지를 볼 때와 전혀 다른 표정으로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의 팔을 꼭 붙잡아 부축했다. 그때 사촌의 할아버지는 우리 할아버지가 아니라 그 할아버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쨌든 간에 그런 과거들이 있는 줄도 모르고 집에서도 명절날에도 예쁨만 받고 자란 나는 우쭐해서 공주가 된 것 같았다. 마치...노쇠해 큰아들에게 권력을 빼앗겼지만, 가부장제 아래 굳건한 늙은 왕의 하나뿐인 귀염둥이랄까? 나는 할머니보다 할아버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가사노동을 여자만 하는 집안에서 권력의 줄기가 어디로 이어지는지 자연스럽게 배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겉으로는 웃고 있으나 어딘가 아슬아슬 해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 또한 굳건하다고 느끼지는 못했지만, 특별하다고 느낄 수는 있었다. 그 특별함은 내가 우월한 인간이라고 착각하게 했다.(이후 안락한 내 가정에서 떨어진 나는 내가 특별하지도 우월하지도 않다는 것을 처절하게 배워야 했다.)     

할아버지는 나를 사랑했을까? 할아버지가 사랑이란 게 무엇인지는 알았을까. 자식을 부양하지 않고 술만 마시며 폭력을 휘두르던 할아버지가 사랑을 이해했을까. 할아버지 허리춤을 붙잡고 자전거 위에서 여름의 바람을 느끼던 그 어릴 때의 나는 엄마의 핏자국으로 얼룩진 창호지를 마주쳤던 큰고모와 엇비슷한 나이였을 텐데. 

아빠는 내가 어렸을 적 조금씩 취할 때마다 할아버지 같은 아버지는 절대 되지 않기로 결심하고 나를 낳았다고 말했다. 할아버지와는 최대한 다른 사람이 되겠다고 굳게 결심했다고. 그 결심이 효과를 봤는지 나는 아빠가 나를 몹시 사랑한다는 것을 잘 느낄 수 있었고, 아빠의 그림자에서 할아버지를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건 다행인 걸까? 

할아버지는 아빠를 사랑했을까. 할머니와 고모들과 삼촌을, 가족을 사랑했을까. 내가 아빠의 딸이라서 받은 애정도 사랑이라고 볼 수 있는 걸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부터, 나는 길거리에서 할아버지를 보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모르는 할아버지가 우리 할아버지인 줄 알고 고개를 획 돌려 다시 본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자전거를 타는 할아버지로부터, 흰 러닝을 입고 셔츠 앞섬을 풀어헤친 할아버지로부터, 하얗게 센 머리에 네모난 안경을 쓴 할아버지로부터, 고집 센 입을 앙다물고 있는 할아버지로부터 우리 할아버지를 봤다. 할아버지일 리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지만 돌아보는 것을 멈출 수 없다. 남겨진 사람에게 죽음이란 그런 것 아닐까. 찾을 수 없는 곳에서 끊임없이 찾게 되는 유사점, 흔적들.     


할아버지가 마음속으로라도 후회 비슷한 것을 했는지 나는 영원히 모른다. 할아버지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이제는 절대 알 수 없다. 물어볼 수 있는 기회는 이미 떠난 지 오래니까. 

우리 집에서 큰고모가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그 날, 큰고모는 이런 이야기도 했다. 중환자실에서 죽은 듯 숨만 쉬고 있던 할아버지 옆에 앉아 고모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고모가 내게 들려주었던 이야기, 할아버지와 눈을 마주치고는 하지 못했던 그동안의 이야기를 했다. 한참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 할아버지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있었다.

그 눈물이 참회의 것이었는지 자기연민의 것이었는지 둘 다 아니고 그저 생리적 반응이었는지, 나는 결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건, 나는 할아버지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우리 가족을 지켜보던 그때를 잊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한여름의 어느 날 할아버지의 자전거 뒤에 타서 바람을 느끼던 그때 나는 행복했으며,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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