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선 Oct 29. 2024

29살, '희망'퇴직하다

자원한 희망퇴직

ㅁㅁ팀과 ㅇㅇ팀은 차례대로 면담 일정을 조율해 주세요.


직원 모두가 희망퇴사의 대상자가 아닌, 몇 팀이 희망퇴사의 대상자로 불려졌다. 대상자로 불린 팀들은 차례대로 인사팀과 면담을 나누러 갔고 나는 그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 팀은 희망퇴사 대상자로 선정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뚜껑이 열린 사실에 그동안과 다른 감정들을 뿜어져 나왔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은 막연한 불안함이 주된 감정이었다면 이번엔 대상자가 아니라는 안도감, 내가 느끼지 않아도 될 미안한 감정이 먼저 들었다. 동시에 아쉬움과 약간의 부러움이 들고, 이런 감정을 갖는 게 대상자들에겐 기만일까? 하는 꼬리를 무는 감정들을 처리하느라 머릿속이 제법 바쁘기까지 했다.


찬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계속 일을 해야 했다. 업무시간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모두 평소와 같이 일을 했지만 대화가 자유로운 점심시간이나 퇴근 이후의 만남에서는 팀원들의 고민을 함께 나눴다. 주어진 기간은 3주라고 했다. 각자 자신의 상황에서 월급을 위해 남을지, 회사에서 챙겨주는 목돈을 가지고 떠날지, 더 나은 선택은 무얼까 고민하는 걸 지켜보며 어쩌면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건 우리 쪽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점점 커져갔다. 나눠가는 대화 속에서 안도감은 휘발되고 아쉬움과 약간의 부러움이 진득하게 자리 잡았다.


사실 지목당한다는 건 참 비참한 일이다. 이후의 일이지만 알바를 잘리면서 내가 그만두는 것과 누군가에 의해 일을 종료해야 한다는 건 마음적으로 상당히 다치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당시에는 지목당하지 않는 사람의 입장이었기에 희망퇴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편협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당시 나의 편협한 생각은 이러했다.


1. 한번 빼든 칼, 계속 다니는 이상 희망퇴직이 훗날 나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다.


2. 떠나는 팀의 남은 업무를 우리가 인수인계받아야 한다.


3. 마주해야 할 새로운 사업의 방향성이 미지수다.


그래도 기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해보자!라는 다짐을 매일 출근길에 했지만, 설왕설래하는 상황 속에서 그 맥은 쉽게 풀려버렸다. 금 간 유리창 위에 서 있는 마냥 불안한 환경은 모두를 무기력하게 하는 듯했다. 팀 2개가 날아간 상황에서 연봉을 한 단계 상승시켜야 하는 3년 차의 연봉 동결이 훤히 그려졌고, 무에서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방향이 막막할 뿐이었다.


아쉬움과 부러움. 두 감정이 짙어지자 감정이 이끄는 상황을 그려보기로 한다. 학창 시절 배웠던 if구절을 이용해서 말이다.


만약 회사에 나간다면...

만약 회사에 남는다면...


아쉬움과 부러움은 그저 표면적이었던 것일 뿐. 그 뒷면에는 더 깊은 문제가 있었다. 끄적여본 두 문장을 쉽게 이을 수 없었다. 어떤 상황이든 두려움에 부정적인 말들이 이어졌는데, 차마 그런 형식으로 빈칸을 채우고 싶진 않았다.


한편 그런 방면으로밖에 채울 수 없는 나를 보며 회사 밖에 삶을 그려보지 않았던 게 티가 났다. '기회'가 없다고, 나가는 선택지를 염두하는 듯했으면서 구체적으로 회사 외의 그려보지 않은 데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나름 능동적으로 삶을 꾸려왔다고 생각했던 내가. 누구보다 수동적이었음을 인정한 예문이었다.


그래도 이미 세운 공식. 채워는 봐야겠다 싶어 제약을 걸어봤다. 두 예문이 이끄는 상황 중 어떤 상황이 두려운가?


회사에 남아 있는 일,

회사 밖에서 새로운 일에 적응하는 일.


이번엔 좀 명확했다. 분명하게 회사 밖에서의 상황이 더 두려웠다. 사람 스트레스 없는 이곳의 팀원들과 팀워크. 손때 묻은 내 일. 이젠 어떤 상황이 와도 처리할 수 있는 능숙함까지 갖춘 이곳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어떤 일을 겪게 될지 모르는 바깥 상황이 정글 같이 느껴졌다. 이상한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여기보다 더 힘든 일을 하고, 연봉이 낮아질 수 있다는 상상.


하지만 두근거리는 쪽도 후자였다. 상상만 하며 언제나 두려움을 회피만 하던 내가 이제는 두려운 쪽에 호기심이 인다. 물론 이 역시 수동적이었지만, 갑갑했던 갑옷을 누군가 깨뜨려주니 깨진 금 사이로 내가 직접 부숴야겠단 용기가 삐져나갔다. 상황을 돌파해 내 생존력을 기르고 싶다는 마음이 드디어 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마음의 결단이 내려지고, 혹시나 이 불씨 같은 마음이 뒤집어질까 회사에 문의를 했다. 대상자가 아닌 사람의 희망퇴직 여부를 묻자, 본사의 회의를 거쳐야 한다는 답변을 듣고 마침 정원이 한 명 남아 원한다면 해주겠다는 답변.


그렇게 나의 자원한 희망퇴직, 인생 첫 사표가 수리 됐다.

작가의 이전글 29살, 희망퇴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