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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토니아에서 겨울나기

극야현상과 폭설 그리고 추위

by 알바트로스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러시아(북부), 미국(알래스카)... 이 나라들의 공통점은? 첫 번째는 10세기경 바이킹족들의 삶의 터전이자 탐험지였다는 것. 두 번째는 바로 여름철 내내 하루 종일 해가 떠있는 백야현상을 경험할 수 있는 나라들이라는 것이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에스토니아에도 머나먼 옛날 바이킹족이 살았으며 백야현상이 있다. 유럽 대륙 북동부의 에스토니아는 1년 중 해가 가장 긴 날을 기념하는 midsummer’s day를 시작으로 여름철 내내 밤낮없이 행사가 줄지어 열린다고 한다. 6월 중순부터 2~3개월간 에스토니아는 그야말로 잠 못 이루는 기나긴 축제의 무대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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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백야가 있으면 그 반대인 극야(흑야)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왜 몰랐던 것일까? 여자친구와 내가 에스토니아에 갔던 12월과 1월은 1년 중 해가 가장 짧고 날씨도 가장 추운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시기였다.


겨울의 에스토니아 여행은 분명 고생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의 에스토니아는 한 번쯤 가볼 만한 곳이다. 북유럽 그 자체를 느끼고 경험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자, 그럼 뼛속까지 시원해지는 겨울왕국 에스토니아로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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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도 안 되게 느린 일출과 빠른 일몰


믿기지 않겠지만 오전 9시부터 동이 트기 시작해서 10시가 다 되어야 해가 뜬다. 아침형 인간들에게는 꽤 늦은 시간인 오전 9시가 다 되어서 여유롭게 집을 나서도 여전히 새벽녘 공기를 느낄 수 있다. 더욱 황당한 것은 오후 2시 반쯤 해가 지기 시작해서 3시쯤 되면 해가 완전히 넘어간다는 점이다.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우는 날에는 눈뜨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전혀 해를 볼 수가 없다.


20201217_090628.jpg 오전 9시경 탈린
20201215_153836.jpg 오후 2시 30분경 탈린


2. 우중충한 날씨


몇 시간 되지는 않지만 해가 떠있는 시간 동안 온전히 일광욕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는 우리의 헛된 희망을 난대 없이 나타난 어떤 녀석이 산산조각 내버렸다. 범인은 우중충한 날씨다. 에스토니아의 겨울 날씨는 대체로 흐리고 눈과 비가 많이 내린다.


에스토니아 남서부의 해변가에 위치한 페르누(Pärnu)는 이곳 사람들 사이에서 휴양지로 유명한 도시다. 그러나 에스토니아의 겨울 앞에서 휴양도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겨울의 페르누(Pärnu)는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유령도시처럼 황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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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시무시한 눈과 살인적인 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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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토니아의 겨울은 눈이 참 많이 내린다. 무서울 정도로 많이 내리는 눈은 중세풍 건물들과 함께 어우러져 그 자체로 겨울왕국을 연상시킨다. 한파는 말할 것도 없다. 영하 10도를 밑도는 에스토니아의 추위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겨울철에 수시로 따뜻한 와인(gluhwein)을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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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에스토니아에 와서 새삼 놀라게 된 사실 하나가 있다. 북유럽이지만 오히려 한국의 겨울보다는 견딜만하다는 점이다. 영하 15~20도를 밑도는 겨울철 서울의 매서운 칼바람과 체감온도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비교해 보아도 뒤지지 않는다.


에스토니아 서쪽의 작은 섬 사아레마를 여행할 때 너무 추워서 덜덜 떨고 있던 나를 보면서 레스토랑 직원이 웃으며 물었다. “여기 많이 춥지?” 나는 그에게 조용히 아시아 대륙 북동쪽에 위치한 한국이라는 나라의 날씨에 대해 알려주었다. 사계절은 있지만 여름은 아프리카보다 덥고 겨울은 북유럽보다 추운 말도 안 되는 내 고향의 날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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