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살루 성(Hapsaalu Castle)과 화이트레이디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에서 서쪽으로 약 1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합살루(Hapsaalu)라는 도시의 합살루 성(Hapsaalu Castle)에는 심령현상 매니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도 보름달이 뜨는 밤마다 나타나는 유령을 보았다는 목격담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합살루 성은 에스토니아 전국적으로 유명한 심령스팟이다. 호기심에 합살루 성에 얽힌 이야기를 찾아보던 나는 슬프고 먹먹하기도 하면서 어딘가 모르게 오싹하기도 한 그 오묘한 옛날이야기에 매료되어 합살루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이야기는 14세기 중세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합살루를 통치하던 영주는 로마 카톨릭의 전통에 따라 합살루 성을 원칙적으로 남자 사제들만 거주하는 공간으로 만들고 여자를 들이지 못하게 하는 규칙을 만들었다.성안에 살던 어느 사제는 성 밖을 돌아다니던 중 우연히 마주치게 된 어떤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 그 둘은 그 이후로도 몰래 만남을 이어갔다고 한다.
서로에 대한 그리움을 이길 수 없었던 그 둘은 합살루 성으로 함께 들어가 살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규칙상 여자는 성안에 들어올 수 없었기에 여자는 남장을 하고 수도원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신의 권력이 막강했던 중세시대 당시의 사회적 종교적 관습도 그 둘을 갈라놓을 수는 없었다. 성안에서 함께 살며 몰래 만남을 이어가던 두 남녀는 분명 행복했을 것이다. 영주가 그 둘의 사이를 의심하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결국 정체가 탄로 난 여자는 형벌로 당시 짓고 있던 합살루 성의 성벽 사이 좁은 공간에 갇히게 된다. 그녀는 그곳에서 매일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빵과 물을 공급받으면서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여자를 성안에 끌어들인 사제 또한 잔혹한 형벌을 피할 수 없었다. 합살루 성 안의 지하감옥에 갇혀 굶어 죽는 운명에 처해지게 된 것이다.그들은 매일 서로를 그리워하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모두가 잠든 밤 그들의 비명소리가 성안에서 밖으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내 두 눈으로 직접 본 합살루 성은 로마의 고대 유적지 건물들이 한데 모여있는 포로로마노처럼 매우 웅장했다. 커다란 성안에 들어서니 사방을 감싸고 있는 성벽 위에서 중세시대 관중들의 함성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여느 에스토니아의 도시와 같이 성 안에는 거대한 박물관이 있다. 코로나 팬더믹의 영향 때문인지 관객은 나 한 명뿐이었다. 700년 세월을 고스란히 느끼며 박물관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풍부한 사료와 자세한 설명 덕분에 종교가 지배하던 중세시대의 에스토니아와 합살루의 모습을 생생히 그려볼 수 있었다.
합살루 성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나는 마지막으로 여자의 원혼(White lady)이 나온다는 성안에 있는 교회 스테인글라스 앞으로 향했다. 예상했던 오싹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 한참을 서서 시대를 잘못 만난 안타까운 두 사람의 사랑이 죽어서라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했다. 그날 밤 나는 교회 스테인글라스에 서서 창밖을 내다보는 어느 여자의 원혼을 본 것 같다. 하지만 그 모습은 결코 분노에 찬 원혼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 모습은 사랑에 빠진 어느 순수한 여자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