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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아레마 : 7500년 된 숲의 정령과 대화를 나누다

코로나 시대 나 홀로 북유럽 사아레마섬 표류기

by 알바트로스



지금도 우주를 떠돌고 있을 수많은 소행성들


소행성 충돌에 관한 이야기는 인간의 무한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몇 광년이나 떨어져 있을지 모르는 은하계에서 무한한 우주를 여행해 희박한 확률을 이겨내고 지구에 불시착한 소행성은 그 신비함이나 위험성이 화산 폭발 같은 지질 활동과는 스케일이 다르다. 그리고 어느 문화권이나 신비한 자연현상은 신화의 좋은 재료가 된다. 수많은 숲의 정령에 관한 이야기가 존재하는 북유럽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나 그 소행성이 까마득히 먼 옛날 인류가 수렵채집 생활을 하던 7500년 전 지구에 떨어졌다면 세월의 흔적이 더해져 그 신비함은 배가된다. 바로 이곳 사아레마섬에 그 소행성 충돌로 생겨난 신성한 호수가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흥분감을 감출 수 없었다.


사아레마섬에서 거의 유일하게 문명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쿠레사아레에서 20km 정도 떨어진 그 신비의 호수를 향해 나는 무모한 자전거 로드트립을 감행했다. 옷을 겹겹이 껴입고 완전무장을 하고 나서 비상식량과 보조배터리를 챙겼다. 그렇게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탐험가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끼며 여행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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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자연 속으로(Into the wild)


추운 날씨에 눈이 와서 도로 상황이 좋지 못했다. 출발한 지 30분 정도 지나자 장갑을 꼈는데도 불구하고 손발이 시려오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자전거와 내 몸이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뿜어내는 온기뿐이었다. 나는 오로지 얼어 죽지 않기 위해 페달을 밟고 또 밟았다.


20210129_141526.jpg 혹한의 로드트립에 의지할 것은 이 자전거뿐이다


북유럽 특유의 가늘고 키가 큰 나무와 함께 광활한 설원이 펼쳐졌다. 눈길에 장시간 라이딩을 했더니 엉덩이가 아프고 다리 근육이 당겨오기 시작했다. 버스정류장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하고 준비해온 캐러멜을 꺼내먹었다. 너무 오래 쉴 수는 없었다. 해가 지고 체온이 더 떨어지면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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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도착한 깔리(Kaali) 마을


드디어 혹한 속 20km 라이딩 끝에 ‘깔리 크레이터(Kaali Kraater)’가 있는 깔리(Kaali) 마을에 도착했다. 군 시절 혹한기 행군이나 철인 삼종경기 비슷한 것을 한 것처럼 내 몸은 극한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마을을 둘러보았다. 정감 가는 이곳은 한국의 읍면에 해당하는 매우 작은 마을이었다. 그날 깔리 마을에는 관광객은커녕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20210129_144519.jpg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신성한 호수 깔리 크레이터(Kaali Kraater)


숲 속의 계단을 따라 조심스럽게 올라가니 직경 110m 정도 되는 제법 큰 원형 호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호수는 7500년 전 5~10km 정도 크기의 소행성 충돌로 만들어졌다. 전 세계적으로 생성시기와 생성 원인이 명확히 밝혀진 몇 안 되는 희귀한 유적지라고 한다.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은 이곳을 신성하게 여겨 주변에 큰 벽을 건설하고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쥐 죽은 듯 고요한 깔리 호수는 7500년 전 지구에 찾아온 소행성의 이야기와 어우러져 신비하고 영험한 아우라를 마구 뿜어내고 있었다. 나는 한참을 그곳에 서서 호수와 울창한 숲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고요함 속에서 우주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동안 모른 척했던 내 모든 마음속 상처들이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서른한살이라는 적지도 많지도 않은 나이에 회사를 그만두고 별다른 직업도 없이 글 쓰며 여행하는 삶을 살기까지 나는 수많은 위기를 넘겨왔다. 인간관계도 금전적인 부분도 자존감도 모두 바닥을 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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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7500년전 지구에 왔을것으로 추측되는 소행성의 파편들


대책 없이 직장을 그만두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가족과 친지들의 무언의 압박은 자존감을 깎아먹는 도둑이다. 차라리 연을 끊으면 마음이 홀가분할까? 여행을 다니느라 친구들과 마음 터놓고 술 한잔 해본 것도 언제인지 모르겠다. 광활한 우주에 나 홀로 남겨진 듯한 외로움을 홀로 견뎌내기가 너무 버겁다.


20210129_145050.jpg 추위로 얼어버린 깔리 크레이터(Kaali Kraater)


그때 7500년 전 우주의 기운이 깃든 숲의 정령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괜찮다고. 7500년 전 수렵채집 생활을 하던 때부터 수많은 인간들이 나름의 고민과 번뇌를 가지고 나를 찾아왔지만 잘 살아남았다고. 지금의 방황은 기나긴 인생길에서 극히 짧고도 꼭 필요한 시간이라고. 다 잘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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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흐리던 그날 갑자기 한줄기 빛이 내려와 나를 비추어주었다


그날 하루 종일 흐리던 사아레마섬에 짧은 시간이지만 한줄기 빛이 내려와 나를 비추어 주었다. 나는 눈물을 닦고 어떤 존재의 따스함을 느끼며 다시 힘차게 페달을 밟아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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