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을 정리하는 여행자

정리 전문가 K의 경우

by 정현정

정리 전문가 K에 대한 글을 브런치에 쓴 적 있다. 그 글은 책 <혼자 살기 시작했습니다>에도 실려 있다. 요컨대, 방에 엉덩이 붙일 구석도 없이 집을 어지르던 내가 정리 전문가 K의 방문 지도 후 미니멀리스트 소리까지 듣는 깔끔한 집을 갖게 됐다는 이야기다. 그 글을 쓴 이후로 지금까지 몇 년 동안 그 당시의 깔끔함과 단정함을 대체로 유지하고 있다. (K가 직접 방문 점검을 통해 확인했다.) 일생 정리와 거리가 멀었던 나로서는 정말 놀라운 변화다. 지금쯤 눈치챘을지 모르겠다. 정리 전문가 K는 나와 호주 여행을 함께 떠난 K이기도 하다.


망원동에서 부산으로 이사 간 K의 집을 한번 방문했었다. K의 집에는 내 것과 똑같은 행거형 옷장이 놓여 있다. K의 지도 아래 똑같은 제품을 따라 샀기 때문이다. K의 집이 깔끔하리라고는 생각했지만, 그 옷장이 텅텅 비어 있는 걸 보고 나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나는 점점 늘어나는 옷들을 온갖 창의적인 방법으로 수납하는데 골몰하고 있었다. 예전처럼 의자 위나 서랍장 위에 옷이 쌓이기도 했다. 그런데... 옷장이 남는다고? K는 나보다 압도적으로 옷이 적지만, 옷도 훨씬 잘 입는다. 이 모든 게 정리 전문가의 신묘한 기술일까.


호주 여행기를 쓰다가 왜 갑자기 정리 이야기를 하냐면, 우리가 처음으로 함께 한국을 떠나 호텔에서 지내면서 정리 전문가는 호텔방도 정리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실도 호주 여행과는 크게 상관없다. 여행기 제목을 '제목 없는 여행기'라고 짓길 잘했다.- K는 얼마 안 되는 적은 양의 살림살이를 가방에 그대로 넣어왔다. 그리고 그걸 그대로 꺼내 호텔 방안에 자신의 방식대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면봉이 들어있는 박스, 큰 크기의 토너 등도 그대로 가방에서 꺼내져서 화장대 위에 원래 있었던 것처럼 세팅되었다. 가방 안에 들어 있던 옷들은 옷걸이에 하나씩 착착 정리되었다. 집의 일부를 그대로 옮겨다가 놓은 것처럼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 Photo by Kai Pilger on Unsplash


반면, 정리 전문가 K의 가르침을 겨우 실천하며 살고 있는 나의 경우는 어떤가. 옷은 그때그때 캐리어에서 꺼내 입으면 그만이다. 구겨지는 옷? 애초에 가져오지도 않았다. 캐리어는 옷을 찾느라 헤쳐져 있지만, 뭐 어떤가. 나만 찾아낼 수 있으면 된다. 집이 아닌 호텔이니까, 정리에 느슨해진 나는 화장품을 쓰고 아무 데나 내려놓았다. 아까 화장품 쓰고 TV 옆에 뒀는데 어딨지? 하고 찾기 시작하면 어느새 K가 화장대 위에 자신의 화장품들 옆에 나란히 정리를 해둔 후였다. K는 전문가답게 말 없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호텔방을 정리해나갔다. ‘물건에게는 각자의 자리가 있다’는 것이 K의 가르침이었는데, 그 문장은 호텔에서도 유효했다.


K는 노련한 전문가이기 때문에, 천방지축 아무데나 물건을 두는 나와 전혀 부딪히지 않았다. 나는 다만 계속 K에게 처음 보는 이 호텔방에서 모든 물건이 있어야 할 자리를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감탄하며 물어볼 뿐이었다. 우리가 호텔을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호텔은 우리가 없는 사이 모든 걸 리셋시킨다. 방에 다시 들어서는 순간, 아침에 머리를 말리고 세면대에 둔 수건도, 뭉쳐있는 흰 이불도 사라진 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 힘을 들여 노력해야 겨우 평소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집과는 반대의 세상이다. 나는 여전히 호텔방을 정리하고 싶진 않지만, 호텔을 정리하는 여행자라는 새로운 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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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ound_june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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