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a Sunburned Country
호주로 떠나기 전 일주일 정도는 미세먼지 알림이 거의 매일 '매우 나쁨'과 '나쁨'이 번갈아 떴다. '나가지 마시오'라는 경고를 매일 아침 출근길에 집을 나서며 확인했다. 회사에 가면 모두가 미세먼지 이야기를 했다. 미래를 나쁘게 그린 영화의 한 장면에 출연하는 기분이었다. 호주로 여행을 간다고 하자, 모두가 공기 이야기를 했다. 맑은 공기 많이 마시고 와야지. 호주의 날씨보다도 오로지, 공기의 질. 그것만 생각했다.
시드니에 도착한 다음날은 본다이 비치에 갔다가, 오페라 하우스에서 예약한 공연을 보는 일정이었다. 본다이 비치에서 원 없이 맑은 공기를 마시고(호주에 도착한 순간부터 마셨지만), 짧은 트래킹을 했다. 해변에 하릴없이 앉아도 있었다. 피시 앤 칩스에 맥주도 마셨다. 모든 게 비현실 적이었다. 하늘은 맑고 푸르고, 거대한 해변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이런 날씨라면, 도대체 무슨 고민인들 오래 할 수 있을까. 햇빛이 거대한 낙관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하루 종일 본다이 비치에 있고 싶었지만, 오페라 하우스에 공연을 보러 가야 했다. 다시 우버를 타고 오페라 하우스로 이동했다. 그때였다. 오페라 하우스에서 들른 화장실에서 내 목과 쇄골 쪽이 새빨간 색이 된 걸 발견한 건. 나는 당황했고, 얼굴을 살폈다. 다행히 얼굴은 빨갛지 않았는데, 목주변이 빨갰다. 나는 크게 낙담했다. 아, 이제 맥주를 마실 수 없는 걸까. 한잔 마셨다고 이렇게 빨개지다니. 한국에서는 안 그랬는데, 왜 여기서 이런담. 친구 K에게 이제 나의 음주 생활의 고비가 찾아왔음을 알렸다. K는 얼굴색 하나 안 변했는데, 왜 나만. 억울한 마음을 안고 공연을 보고 나오니,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이제 술기운이 사라지기도 충분한 시간이었는데, 내 목이 여전히 빨갰다. 그것도 이상한 자국으로 얼룩덜룩하게. 범인은, 태양이었다.
완전히 어두워진 후, 호텔에 도착해 몸을 살폈다. 목만 문제가 아니었다. 옷이 가리지 않은 모든 부위, 대충 썬스틱을 바른 부분이 썬스틱 자국을 그대로 남기며 시뻘겋게 달아 올라 있었다. 온라인에서 유명했던 '썬스틱 오빠 등에 바른 후기'를 읽고, 그 썬스틱을 찾아서 샀던 내가 그 자국을 똑같이 남기게 되다니... K는 나도 온라인 유명 후기가 될 수 있겠다며, 사진을 찍어서 후기를 올리자고 제안했다. 나는... 울고 싶었다.
어째서 썬스틱을 더 꼼꼼하게 바르지 않았을까. 햇빛을 그 정도 쐬면서 왜 선크림을 더 바를 생각을 안 했을까. 아니 그보다 어디서도 이렇게 탄 적이 없는데, 햇빛이 이렇게 강렬할 수 있는 걸까. 옷에 스치기만 해도 따가운 피부에 찬 물수건을 얹고... 후회를 거듭했다.
호주는 햇빛이 너무너무너무 강렬하다. 이번에 온 몸으로 체험한 진실이다. 다음날 나는 강력한 효과의 썬스틱을 버리고, 온몸에 골고루 펴 바를 수 있는 대용량 선크림을 샀다. 호주의 햇빛은 고작 썬스틱으로 대적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선크림도 충분하진 않았던 것이, 다음날엔 정수리가 탔다는 걸 깨달았고... 두피에서 껍질이 벗겨졌다. 빛이라고는 형광등 빛만 받던 나약한 사무실 인간에게 호주의 햇빛은 너무나 거대한 공격이다. 여러분은 꼭... 모자도 쓰시길.
영화 '레이디스 인 블랙'에는 유럽에서 호주로 망명해온 남자와 호주 여자의 사랑이야기가 나오는데, 오스트리아 출신의 남자는 호주 여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호주 사람들은 참 재밌어요. 이런 날씨에서도 어떻게 고민이란 걸 할 수 있죠?" 영화에서는 그 순간 진지하게 고민을 털어놓으려는 여자에게 조금 무례한 게 아닐까 싶었지만 미세먼지의 나라에서 간 나도 그 의문이 드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이 강렬한 태양 아래서, 화상 이외의 어떤 고민이 있을 수 있죠? 썬스틱 자국은 여름이 다가오는 지금도 지워지지 않고 있다. 호주가 아직 내 몸에 남아 있다.
* 본다이 비치에서 피시 앤 칩스를 먹은 곳 : 더 버킷 리스트 The Bucket List
- 수요 미식회에 나온 맛집이라고 한다. 무난히 맛있고, 분위기가 좋다.
- 주소 : Bondi Pavilion, Shop, 1 Queen Elizabeth Dr, Bondi Beach NSW 2026 오스트레일리아
** 'In a Sunburned Country'는 빌 브라이슨의 호주 여행기 원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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