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은 전복식당을 가지 않는다?
제주도에 대한 글을 쓰면서 제주에서 유명한 흑돼지, 갈치, 고기 국수, 보말칼국수 같은 음식을 소개하지 않는다는 것이 계속 마음속 짐으로 남아 있었다. 글을 시작할 때 호탕하게 '나만의 맛집 지도를 그려보자.'라고 말했지만,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가 맛있는 것을 먹는 식문화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찝찝함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제주도 여행을 준비하는 친구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있다. "제주도민은 뭘 먹고 사냐?", "관광지 맛집 말고 현지인 맛집 추천해줘!". 제주에 온 지 얼마 안 된 병아리 시절에는 블로그나 SNS에 '도민 맛집'이라고 검색을 해서 친구들에게 식당을 알려 준 적이 있었다. 그때 친구들에게 가보지도 않은 곳을 추천한다는 게 너무 미안했다. 더 슬픈 것은 그곳을 다녀온 친구들에게 "여기 진짜 맛집 맞는 거지?"라고 연락을 받은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지금에서야 인터넷에 '도민 맛집'이라는 것은 하나의 광고 키워드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제주도에서 지내며 수백 곳의 식당을 방문했던 것 같다. 제주도에 산 지는 1년하고 반 정도밖에 되지 않아 도민이라고 말하긴 부끄럽지만, 그래도 이제는 집 주변 단골집도 생기고 도민이 가는 식당과 관광객들이 가는 식당은 어느 정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제주도 생활에서는 병아리일 뿐이지만 머리도 조금 컸겠다 이참에 주변의 도민들에게도 물어보고 내가 가던 식당들을 종합해서 현지인 맛집 리스트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맛집 리스트를 만들며 도민들과 이야기하면서 새로운 것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가장 충격을 받았던 것은 도민들은 전복을 거의 먹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TV에서 해녀들이 전복을 따는 모습을 많이 봐서 그런가? 나도 그랬고 제주에 오는 여행자들은 제주 해녀를 생각하고 전복돌솥밥이나 전복구이 같은 전복요리를 많이 찾는다. 하지만 도민들은 전복요리를 횟집에서 회를 먹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대체재 정도로 생각할 뿐이었다. 전복은 제주에 많이 나는 해산물이 아니라서 해녀가 딴 희귀하고 비싼 자연산 전복을 제외하고 제주에서 먹는 전복 대부분은 완도 양식장에서 사 온다고 한다. 바다가 온 천지라 전복이 넘쳐날 것으로 생각했던 내 생각은 오산이었다.
해물 라면과 해물탕도 도민들이 굳이 밖에서 사 먹지 않는 요리이다. 해물 라면과 해물탕의 주재료인 조개류나 갑각류는 육지에서 가져오는 것들이 많은데 좋은 해산물이 많은 제주에서 굳이 육지에서 가져오는 것을 먹을 필요가 없다나 뭐라나. 먹더라도 직접 신선한 재료를 사서 집에서 만들어 먹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이처럼 섬나라인 제주는 질 좋은 해산물이 많이 나서 그런지 신선한 토종 해산물에 대한 자부심도 있는 것 같았다.
해산물 중에서도 제주 갈치는 전국 어업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많이 잡히고 질도 좋다고 한다. 도민들도 갈치구이를 자주 먹는데 밖에서 사 먹을 때는 주로 갈치조림으로 백반집에서 저렴하게 먹고 통 갈치 집은 가격이 비싸서 육지에서 손님이 오는 것과 같이 특별한 날에만 주로 간다고 했다. 또 횟집에 가면 신선한 갈치 회를 애피타이저로 내주기도 하는데 육지에서 구이로만 먹던 갈치를 회로 먹어보니 색달랐다.
회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정말 많아서 날이 선선할 때는 시장에서 직접 횟감을 보고 회를 떠먹고 머리와 뼈 등 남은 재료들을 집에 싸가서 매운탕을 끓여 먹기도 한다. 또 제주 시내에는 치킨집만큼 횟집이 많아 치맥(치킨에 맥주)보다 회쏘(회에 소주)에 더 익숙한 도민들도 많다.
그리고 신선한 고등어회는 제주도에서 맛볼 수 있는 특산물 중 하나이다. 고등어는 성질이 급해 물 밖으로 나오면 금세 죽어버린다. 다른 생선보다 부패의 진행도도 빠르고 신선도가 저하되기 쉬워 취급하기가 매우 까다로워서 바닷가 근처가 아니면 신선한 고등어회를 먹기가 힘들다고 한다.
나는 제주도에 와서 고등어회를 처음 먹어봤는데 고소하고 쫄깃한 매력에 빠져 첫해 겨울에는 매주 한 번씩은 고등어회를 먹으러 갈 정도였다. 찬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10월 중순부터 고등어회가 제철인데 제주도에서는 저렴한 가격에 신선한 고등어회를 마음껏 먹을 수 있다. 한 번은 육지에서 고등어회를 먹고 비린 맛에 좋지 않은 기억이 있던 친구가 왔었는데 내가 기어코 제주 고등어회를 먹고 가야 한다고 설득을 한 적이 있었다. 그날 이후로 이 친구는 제주도에 오면 고등어회를 꼭 먹고 간다고 한다. 참고로 제주도도 육지와 같이 양식 고등어회를 파는 곳이 많기 때문에 자연산 고등어회를 먹기 위해서는 잘 찾아가야 한다. 고등어구이는 노르웨이 등 수입산이 주이므로 고등어회와 근본은 같지만, 많이 다른 음식인 것 같다.
해산물 이외에 제주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을 꼽으라면 단연코 흑돼지가 아닐까 싶다. 최근에 인터넷을 보다 보면 '제주 흑돼지는 마케팅이다.'라는 글을 많이 볼 수 있다.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 같다. 제주뿐만 아니라 지리산, 김천 등 육지에도 흑돼지를 사육하는 곳은 많다. 또한, 제주 토종 흑돼지는 개체 수가 부족하여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어 있어 우리가 제주에서 먹을 수 있는 흑돼지는 외국산 품종과 교잡을 통해 개량된 흑돼지이다.
종으로 보면 육지의 돼지와 큰 차별점을 가지지 않는 것 같지만 나는 제주 돼지만의 다른 큰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짧은 유통단계이다. 제주도의 돼지고기는 섬 안에서 사육부터 가공까지 모두 이루어지기 때문에 고기가 신선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흑돼지가 아니더라도 마트에서 사 먹는 일반 돼지고기나 식당의 백돼지도 육지보다 유독 맛있게 느껴졌다. 도민들은 고기를 먹을 때 흑돼지와 백돼지를 크게 따지지는 않는다고 한다. 재료가 신선하고 좋으면 기본 이상은 하는 것. 이것이 로컬푸드의 장점이 아닐까? 제주에서는 너무 큰 기대만 하지 않는다면 어딜 가서 먹어도 평균 이상의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밖에 고기 국수나 보말칼국수, 고사리 해장국 같은 음식은 간단하게 끼니를 때울 때 주로 먹는 것으로 굳이 멀리 찾아가서 먹는 음식은 아니지만, 집 근처에 단골 식당은 하나씩 있다고 한다. 마치 육지 사람들이 집 앞에 단골 국밥집이나 분식집이 하나 있듯 제주도민에게는 단골 고기 국숫집이 있다. 도민에게는 일상적인 음식이지만 육지에서는 보기 힘든 음식이기 때문에 제주에 오면 한 번쯤 먹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요즘 SNS에서는 예쁜 플레이팅과 감성 있는 인테리어로 비싼 가격을 받는 백반집들을 볼 수 있는데 이곳들은 대부분 여행자를 위한 장소라고 생각하면 된다. 백반이 만원이 넘는다...? 도민들은 분노한다. 시내에는 정식에 7~8천 원 하며 생선에 고기반찬까지 나오는, 기사식당같이 투박하지만 맛있는 백반집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