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기분
어느 날 현지인 맛집을 강력하게 고집한 한 친구가 제주도에 놀러 왔다. 나는 '드디어 현지인의 맛을 보여줄 때가 왔구나.' 생각하고 며칠 동안 애를 쓰며 만들었던 현지 맛집 리스트를 최대한 활용해 여행 계획을 짰다.
비행기에 내리자마자 시내 관공서 근처에 내가 쉬는 날 추리닝 차림으로 자주 가던 고기 국숫집을 데려갔다. 평일 점심시간에는 근처 회사원들이 와서 기다리기도 하지만 그날은 주말이어서 그런지 손님이 한 테이블밖에 없었다. 맛집이라고 했는데 손님이 너무 없어서일까? 나는 왠지 모르게 조금 머쓱했다. 조용한 가게에서는 은은하게 퍼지는 TV 소리와 가끔씩 주방 집기 부딪치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하지만 친구는 이런 투박하고 허름한 느낌의 가게가 진짜 맛집이라며 잔뜩 기대했다. 국수가 나오고 나는 마치 요리경연대회에 내 요리를 출품한 것처럼 긴장이 됐다. 친구는 정말 대회 심사자라도 된 듯 국수의 냄새를 맡고 국물을 한 숟갈 떠먹어본 뒤에 몇 번을 쩝쩝거렸다. 그리고 젓가락으로 크게 국수를 집었는데, 친구가 면을 입에 넣자마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맛있지?"라며 연신 물었다. 친구는 맛있다고 했다. 역시 현지인 맛집은 맛없을 수가 없지 하며 어깨 뽕이 잔뜩 들어갔다. 힘들게 만든 맛집 리스트가 도움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만족스러운 첫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바다도 보고 오름을 걸으며 잠깐의 관광 시간을 가졌다.
날이 어두워질 때쯤 저녁을 먹기 위해 다시 시내로 들어왔다. 저녁은 여러 가지 반찬과 갈치조림이 나오는 곳으로 같이 일하는 도민분이 추천해주신 백반집이었다. 이 식당은 오래된 주택들 사이에 끼어 있었는데 시골 할머니 집에 가면 볼 수 있는 기사식당 느낌이 났다. 주말 저녁이라 그런지 이곳도 사람이 거의 없었다. 우리는 음식에 집중한 채 조용히 밥을 먹고 나왔다. 달콤 짭짜름한 갈치조림은 밥도둑이었고 반찬들도 정갈했다.
완벽한 여행코스에 스스로 만족하며 숙소로 가는 길에 마음속으로 짝짝짝 손뼉을 쳤다. 그런데 친구는 갑자기 내일은 본인이 인터넷에서 찾아온 식당에 가보자고 했다. 나는 아직 맛보여주고 싶은 식당 리스트가 한참 남았는데 왜!? 라는 생각이 들었고 친구에게 오늘 먹은 음식들이 별로였냐고 물어보았다. 친구는 정말 맛있었지만 "여행을 온 기분을 더 내고 싶다."라고 했다. 여행의 기분...? 나는 이 말 한마디에 여행지 식당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관광지의 유명한 식당들은 엄청난 광고로 홍보가 잘되어있는 경우가 많다. 인플루언서들이 방문해 음식을 예쁘게 찍어서 SNS 올려놨다던가 TV 프로그램에서 맛집으로 소개되어 사진이나 영상으로 식당을 미리 접하는 경우도 있다. 식당에 들어가기 전부터 미리 찾았던 정보들로 '누가 여기를 왔다 갔네.', '어떤 TV 프로그램에 나왔었네.', '여기는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특별한 메뉴가 있대.' 등등 친구와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보통 이렇게 유명한 식당은 맛뿐만 아니라 관광객을 위한 무기가 하나씩 있다. 주변의 멋진 뷰라던가 이색적인 공간, 화려한 음식 비주얼 같은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방문객에게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던져주고 음식의 맛과 관계없이 여행을 더욱 풍족하게 해 준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로 붐벼 줄을 서게 되면 식당의 매력은 더 올라가는 것 같다. 평소 회사 점심시간이나 쉬는 날 집 앞에서 간단히 끼니를 때울 때 1시간씩 기다리며 밥을 먹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보통 때 마음의 여유가 부족해서 하지 못했던 경험을 여행 와서 할 수 있다면 두근대는 새로운 자극을 줄 것이다. 과한 대기는 짜증을 유발하지만, 여행자들 틈에서 에너지를 함께 나누며 맛있는 음식을 기다리는 것은 여행에 감칠맛을 더해주기도 한다. 물론 음식을 먹기 위해 기다리는 것을 정말 싫어하는 사람들은 아니겠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친구에게 현지 맛집이라고 데리고 다녔던 식당들은 여행자에게 던져주는 소재가 부족했던 것 같다. 밥을 먹고 가는 차 안에서 우리는 '이게 고기 국수구나', '맛있네' 이외의 다른 할 말이 딱히 없었다. 어쩌면 식당 광고를 하는 사람들은 음식의 맛을 알리기 위해서가 아닌 식당에 이야기를 심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닐까?
여행을 가면 뭔가 특별한 게 먹고 싶다. 그러한 특별함은 그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특산물 같은 것도 있지만 이런 곳에 식당에 있을까 싶은 특별한 장소, 많은 여행자 속에서 함께 먹는 분위기 같은 것에 의해서도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요하고 투박한, 도심 사이에 있던 식당은 친구에게 여행지가 아닌 집 앞 동네 마실 느낌을 줬던 것 같다. 음식은 맛이 있었지만, 분위기는 맛이 있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이번 내 추천은 반쪽짜리였던 것 같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멀리서 친구가 여행을 오면 '나 여기 가보려는데 가봤어?' 이런 말을 많이 들어 봤을 것이다. 하지만 지방 사람으로서 나도 그랬고 정작 몇 년을 산 주민은 그런 곳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아무리 맛있는 집이라도 여행 온 친구에게 "거기 말고 내가 자주 가는 집 앞에 국밥집을 가~" 라고 하는 것도 맞지 않는 것 같다.
여행자가 요구하는 맛집에 대한 니즈와 주민의 니즈는 다르다. 여행자들은 기록에 남기기 좋게 예쁜 외관과 플레이팅을 중시하고 이곳에서만 먹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현지스러운 메뉴를 주로 찾는 것 같다. 반면에 주민은 식당의 위치와 가격 그리고 입소문에 민감하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하고 별것이 아닌데 내가 당사자가 되면 잊게 된다.
이렇게 깨달음의 시간을 가지고 나는 무조건 현지인 맛집을 원하는 친구들에게 도민들이 가는 시내의 식당들뿐 아니라 관광지의 유명한 식당도 함께 알려준다. 무조건 맛있는 집만 고집하는 것이 아닌, 다양한 이야기를 가진 식당을 조화롭게 방문하는 것이 여행의 감성을 고양하는데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맛집은 맛으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재료와 음식의 비주얼뿐 아니라 여러 가지 보이지 않는 요소들이 합쳐져서 식당의 새로운 맛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아쉽지만 내가 만든 맛집 리스트는 이곳에 싣지 못했다. 자랑할만한 엄청난 정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우이겠지만 현지 맛집이라고 했는데 소문이 많이 나버려 관광객들로 북적댄다면 그곳은 더는 현지인이 이용하지 않는 식당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