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기록, 여섯 번째.
난 늦게까지 일하는 날이 좋아.
아마 내가 생각하던 야근이 아니어서일지도 모르고, 아직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어. 퇴근 후에 현관문을 열고 침대로 직행하는 게 제일 좋았는데 이제는 야근 후에 집으로 가기 위해 걷는 그 밤거리도 좋아졌어.
참 감사한 건 내가 하는 야근이 사무실에 앉아 컴퓨터를 마주 보는 일이 아니라는 거야. 매주 화 목 토요일마다 나는 이스탄불 구시가지에서 가장 높은 언덕을 올라.
낮에 하는 정규투어보다 야경투어가 더 좋을 때가 있는데 아마 '친밀함' 때문인 것 같아. 이미 낮에 함께 했던 손님들과 함께하니 마음도 편하고 또 조금은 자유롭고 인간적인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시간이거든. 물론 가이드라는 타이틀은 바뀌지 않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털어놓을 수 있게 돼.
무엇보다 야근이 좋은 이유는, 일을 마치고 사무실에 들렀다 집으로 돌아갈 때 마주하는 풍경들 때문이야. 매일 봐도 질리지 않는 아야 소피아와 블루모스크는 말할 것도 없겠지, 하지만 진짜는 거리 위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이야. 시계가 열한 시를 가리키며 밤이 깊어가는데도 거리 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
호객행위를 하는 레스토랑 직원들이 있고 손수 뜨개질로 만든 목도리와 장갑 같은 걸 판매하는 아주머니들도 있어. 군밤과 옥수수를 파는 청년은 이제야 천천히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술탄 아흐멧 광장의 야경을 찍는 여행자들도 있지.
그리고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 구걸을 하는 아주머니와 아주 어린아이가 있어. 이틀에 한 번 나는 그 아이가 하루가 다르게 얼마나 자라고 있는지 확인하게 돼. 그저께 아이는 아장아장 걸음마를 열 발짝 쯤 걷더니 엄마에게 가서 안겼어. 엄마는 기특하다는 듯 함박미소를 지었고 길을 지나며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아이에게 박수를 쳐 주었어.
나도 그 모습을 보며 걷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뒤에서 턱, 하고 내 어깨를 잡는 거야.
화들짝 놀라 돌아봤더니 한 남자가 숨을 헐떡 거리면서 내 앞에 서 있었어.
그는 숨을 가쁘게 내쉬면서 손을 뻗어 내게 뭔가를 건넸는데, 그건 방금 전까지도 내 손에 들려있었던 외투였어.
내가 밤거리에 취해 걷다가 손에서 옷이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진 것도 몰랐었나 봐.
마침 길에서 사탕 팔던 아저씨가 그걸 보고 자기 리어카도 내버려 둔 채로 옷을 주워 들고 경사진 길을 나를 쫓아 뛰어 올라왔던 거야.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너무 고마운데 할 수 있는 말은 없고, 계속 '정말 고맙다'는 말만 반복했던 것 같아.
내 짧은 터키어 실력이 이렇게 원통스러울 때가 또 있었을까.
그는 내 고맙다는 인사에 그저 수줍은 미소만 지으며 별 것 아니라는 듯 오른손을 가슴 위에 올려 보이고는 힘들게 뛰어 올라왔던 길을 되돌아 리어카가 있는 곳으로 내려갔어.
다시 내게 돌아온 옷을 손에 잘 쥐고서 트램을 타러 가는데, 가슴이 두근두근 왜 이렇게 벅차는지.
연애하는 것도 아닌데 자꾸만 미소가 지어지고 행복하더라.
트램에 앉아 무릎에 놓인 그 옷을 보는데, 자꾸만 연인에게 선물 받은 꽃다발 마냥 느껴지더라.
여기엔 참 좋은 사람들이 많아,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이곳의 모습들이 내가 여기서 웃으며 생활할 수 있게 해. 너와 함께 밤새며 수다 떠는 그 행복에 비할 수는 없지만, 아직까지는 마음 둘 곳 없는 이 낯선 땅에서 내 마음을 데워주는 건 길 위에서 스치는 낯선 사람들이야.
그 벅찼던 밤을 너와 공유하기 위해 이 글을 써.
그리고 나 아무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다는 거, 잘 지낼 뿐만 아니라 야근까지 즐기면서 재밌게 일하고 있다는 거 알려주고 싶었어.
너의 3월을 내게 알려줘. 벚꽃 가득한 봄과 멋진 날씨 그리고 일상의 작은 행복이 있기를 바라. 언제나 고마워, 그리고 언제나 응원해 :)
2015년 3월 23일 이스탄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