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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e Sep 06. 2023

프라하의 밤거리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들.

[프라하 일기] 길 위의 즐거움



마침내 9월이 되었고, 아직까지는 사계절의 경계가 꽤나 뚜렷한 체코에서는 가을이 기다렸다는 듯 지체 없이 찾아왔습니다. 그래도 올해는 꽤나 다정한 모습으로 찾아와 준 덕분에 바뀐 것은 선선한 바람뿐, 쨍한 햇살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여전히 머물러 있어 실내에서 단 일분도 머무르기 아까운 날씨를 뽐내는 중이에요.


요즘 오후 여덟 시가 되면 제법 어둑해지는 걸 보니 확실히 가을이 왔다는 게 느껴져요. 퇴근 후 집에 오자마자 간단하게 끝낸 식사도 소화가 되었을 쯤이라 몸을 일으켜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습니다. 상쾌하기 이를 데 없는 밤공기가 이어지는 요즘, 다시 러닝을 시작했거든요.


한낮의 더위가 해가 진 후에도 식을 줄을 몰라 자정이 넘도록 열대야라는 이름으로 머물던 올여름 내내 저는 피노키오가 된 기분으로 살았어요. 매일 아침 오늘은 뛰어야지 마음을 먹었다가도 퇴근 후에는 도저히 다시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 결국 아침에 했던 다짐을 저버리고 실내 운동으로 대충 합의를 보고는 했기 때문이에요. 작년 5월 100번째 러닝에 대한 글을 썼고 어제가 150번째 러닝이었으니, 한껏 퇴화된 킬로당 러닝 속도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거죠.


다행히 요즘은 매일 저녁 준비운동을 하고 현관을 나서는 과정이 그리 어렵지 않아요. 완벽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완벽한 날씨가 해 질 녘부터 창문을 넘어 살랑살랑 불어오기 때문에 그 유혹을 떨치고 실내에 머무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나 할까요. 운동화를 신고, 이어폰을 꽂고, 열쇠를 챙겨 집을 나섭니다.


러닝앱을 누르기 전에 플레이 리스트를 먼저 열어요. 지난 며칠간 같은 노래들을 듣는 중입니다. '찬 바람이 조금씩 불어오면은' 가수 적재의 목소리와 감미로운 멜로디가 흘러나옵니다. 이 첫 구절이 재생되는 순간 씩 웃음이 나요. 러닝을 하며 듣기에는 꽤나 축 처지는 멜로디 같지만 그의 목소리와 가사들이 어둑해진 저녁의 프라하의 풍경과 날씨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없다고 느껴지거든요. 그러면 괜스레 행복한 웃음과 함께 벅찬 마음으로 첫 발돋움을 내딛게 됩니다.


오후 아홉 시쯤이 되면 집 근처 횡단보도의 신호등 들은 모두 주황색 불빛을 깜빡이며 비보호 구간으로 바뀝니다. 차들의 통행이 뜸해진 시간 좌우를 살피며 횡단보도를 건너요. 낮시간 동안 거리를 가득 메우던 관광객들도 숙소로 돌아가거나 술 한 잔 하러 어딘가로 향할 시간인지라 거리도 한껏 한적해져서 뛰는 게 훨씬 수월합니다.


저 멀리 중년 부부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식당을 나서는 모습이 보입니다. 십 미터쯤,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살짝 오른쪽으로 발을 옮깁니다. 그런데 같은 순간 두 사람도 같은 방향으로 한 발을 옮깁니다. 달려오는 제게 길을 내주기 위해서예요. 결국 또 같은 선상에서 서로를 마주하게 되자 우리는 사이에 오 미터쯤의 거리를 남겨두고 그만 다 같이 깔깔깔 웃음이 터지고 맙니다.


자그마한 체구의 여성은 큰 키를 가진 파트너의 팔을 매달리듯 부여잡고는 그의 팔뚝에 얼굴을 기대고는 웃어요. 우리 세 사람 모두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은 상태로 서로를 스쳐 지나갑니다. 물론 두 사람이 보여준 상냥한 배려에 고맙다는 말을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아요. 그렇게 생각지 못한 데서 까르르 웃고 나니 일 킬로 정도는 더 거뜬히 뛸만한 기운이 생깁니다.


작은 코너를 지나 공원의 입구를 지나갑니다. 공원 앞 거리로 발을 딛기 몇 미터 전부터 일이도 쯤은 더 낮아진 바람이 느껴집니다. 사실 이건 올해에서야 발견한 사실이에요. 거의 같은 코스로 뛰기를 시작한 지도 어느덧 3년 차, 이 공원 앞에는 가운데 차도를 두고 양 옆으로 인도가 나있는데 저는 항상 왼쪽 인도를 이용했어요.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냥 집을 나서자마자 이어지는 길을 쭉 달리다 보니 별생각 없이 왼쪽 길을 택했을 뿐이었죠.


그러다 올여름 마음을 다잡고 러닝을 하러 나갔던 날이었어요. 체코에서 한 여름의 오후 여덟 시는 해가 여전히 하늘 높이 걸려있어 더없이 밝기만 해요. 더위와 습도가 무겁게 대기를 짓누르는데 그날따라 또 거리는 얼마나 북적이는지, 원래 가던 길로는 도저히 뛰는 것이 불가능해서 건너편 오른쪽 인도로 자리를 옮겨 뛰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공원 입구에 가까워지는 순간, 방금까지 뺨을 무겁게 스치던 습하고 더운 바람이 아닌 청량한 바람이 훅 끼쳐오는 게 아니겠어요. 너무 큰 온도차에 깜짝 놀라 뛰던 다리도 급히 멈췄지요. 어디서 에어컨 바람이 나오나 하고 둘러봤는데 움직이는 거라곤 머리 위에서 살랑이는 나뭇가지뿐이었어요. 공원으로 조성된 큰 언덕에서 흘러나오는 바람이었던 겁니다.


숲의 온도가 도심보다 낮다는 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차도 하나를 사이에 두고 채 20미터도 되지 않는 두 개의 인도 사이에 이렇게 큰 온도차가 존재한다니,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었던 거죠. 인간들이 지구 온난화와 도심의 폭염을 이야기하는 순간에도 자연의 경이로운 힘은 묵묵히 그곳에 존재하고 있예요.


차도 하나만 건너면 곧바로 땀을 식혀줄 수 있는 산들바람이 있는데 저는 미련하게도 익숙함을 좇아 그 작은 차이점조차 발견하지 못했다는 게 적잖은 충격이었어요. 그러다 이내 그 충격은 즐거움으로 바뀝니다. 내가 사는 도시의 작은 비밀 하나를 또 발견한 기분이었거든요. 그리고 자연의 근사한 능력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고요. 러닝을 하지 않았다면, 그날 많은 인파로 인해 반대편으로 길을 건너지 않았다면 아마 올해 여름에도 이 근사한 비밀을 발견하지 못했텐데 이렇게 사소한 우연들이 저를 새로운 발견으로 이끌어 주었으니 즐거울 수밖에요!



공원이 흘려보내는 찬 바람으로 한껏 샤워를 하고 다시 기운을 차려 달립니다. 강가에 가까워지니 아름다운 프라하의 야경을 보며 낭만적인 저녁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와요. 젊은 연인들의 입맞춤은 그 젊고 싱그러운 기운 그대로, 나이 든 노부부의 다정하게 맞잡은 손과 애정 가득한 포옹은 그 형태 그대로 보는 사람까지 미소 짓게 합니다.


내가 행복하지 않을 때에도 나를 둘러싼 주변 환경에서 행복의 형태를 발견할 수 있는 건 참 큰 행운인 것 같아요. 거기서 행복의 기운을 한 조각씩 빌려오다 보면 어느새 내 마음에도 긍정과 행복의 기운이 물들어 있는 걸 깨닫게 되더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낭만의 도시 프라하에 산다는 건 꽤나 운이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는 중년 커플의 모습에 잠시 속도를 줄이고 그 행복한 뒷모습을 담아봅니다. 제가 쓰는 러닝 앱에서는 사진 한 장 위에 러닝 기록을 새길 수 있거든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늘의 러닝 기록과 함께 담아둘 예정이에요. 또다시 엉덩이가 무거워지는 날 이렇게 차곡차곡 모아둔 사진 중 한 장이 다시 저를 문 밖으로 이끌어줄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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